이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시기가 다가왔다. 구리시도 그늘막·무더위쉼터, 차가운 생수, 양심우산 등 ‘여름철 폭염대응 종합대책’을 발표하며 더위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요즘이야 에어컨과 냉장고 등으로 더위를 잠시 피한다고 하지만 그런 문명의 이기(利器)가 없던 예전의 사람들은 더위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흔히 ‘피서(避暑)’를 말하곤 하는데 이는 더위(暑)를 피해(避) 시원한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있어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예로부터 목축을 하는 사람들은 가축들이 초원의 풀을 다 뜯어먹어 주변이 황무지로 변하면 풀이 무성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혹은 적의 공격을 받거나 질병으로 가축들이 다 죽으면 다른 부족들이 키우는 가축을 약탈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곤 했다. 옮겨 다니는 게 익숙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달랐다. 자기가 일군 논밭을 떠날 수 없었다.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농사를 망쳤더라도 씨앗만 잘 보관하고 있다면 내년을 기약할 수 있기에 그들은 한번 정착한 곳을 버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근거지를 버리고 떠나는 경우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러 주변 사람들에게 내쫓김을 당하는 게 고작이라고 할까. 특히 사람들의 도움이 없으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기에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개인주의는 발붙일 수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들은 떠나지 않고 견디는 DNA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유가(儒家)에서는 피서(避暑)가 아닌 망서(忘暑) 혹은 승서(勝暑)를 내세우곤 한다.
망서(忘暑)는 더위(暑)를 잊는(忘) 것이고, 승서(勝暑)는 더위(暑)를 이겨내는(勝) 것이다. 이긴다고 하여 더위와 싸운다는 뜻이 아니다. 적이 쳐들어왔을 때, 성문(城門)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일절 대응하지 않고 견뎌내는 것이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적은 제풀에 지쳐 후퇴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단단하게 나를 지켜내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더위에 대응을 하지 않으니 망서(忘暑)가 되고, 그렇게 견뎌내니 가을이 다가와 여름은 물러난다. 그러니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승서(勝暑)가 아니겠는가.
조선의 임금 중에 가장 뛰어난 리더십과 심오한 통치철학을 겸비했던 정조(正祖)의 예를 살펴보자.
정조가 거주하던 창덕궁 관물헌(觀物軒)은 궁궐 안에서도 무척이나 더운 곳이었다. 이에 신하 중 한 사람이 정조에게 “여기는 너무 더우니 서늘한 곳으로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이곳을 버리고 서늘한 곳으로 옮긴다고 하여 더위가 없어지겠습니까? 그저 조금 더위가 덜할 뿐이겠지요. 그러나 또 거기서 지내다보면 다시 더위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또 조금 더 서늘한 곳으로 옮기고 싶은 생각이 들겠지요? 그렇게 계속 옮겨 다닐까요? 그건 아니지요. 여름이면 더운 게 정상입니다. 여기서도 정신을 집중하여 책을 읽다보면 더위는 잊을 수 있습니다.”
구리시가 발표한 폭염대책을 살펴보면 기존의 그늘막 189개소에 더해 올해 39개소를 추가 설치하고 야외 무더위쉼터에 물놀이형 시설 10개소, 경관용 수경시설 11개소 등을 운영하고 여기에 더해 ‘스마트 쉘터’ 24개소를 무더위쉼터로 추가 지정·운영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7~9월 중 45일 동안 야외 무더위쉼터에 시원한 생수를 자율적으로 가져다 마실 수 있도록 냉장고 6개소, 아이스박스 12개소 등 총 18개소의 ‘여기워터 힐링고’를 설치·운영하고 ‘사계절 양심우산 대여소’를 통해 여름철 소나기 또는 한낮의 뜨거운 햇빛을 잠시 피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저소득층 장애인, 고령자, 노숙자, 옥외 노동자(이동 노동자, 건설 노동자 등) 등을 위한 조치도 눈에 띈다.
재난 도우미 230명이 홀로 어르신들의 안부와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이상징후가 발생하면 전문 상담사가 긴급출동하는 폭염 예방 활동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동 노동자의 온열질환 예방을 위해 ‘이동 노동자 쉼터’(인창동 소재)를 24시간 개방 운영하며, 시원한 생수와 무더위 질환 예방 물품도 지원한다고 한다.
세심하게 시민들을 배려하는 모습이 돋보인다. 더위를 피해 도피하는 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는 것도 적절해 보인다.
예전 선배들의 조언을 생각한다면 더위를 피해 도망갈 곳은 없다. 다만 견뎌서 이겨낼 뿐이다. 덥다고 서로 짜증내며 다투지 않고 견디는 동안 지치지 않도록 서로 격려하는 문화의 정착이 가장 멋진 폭염대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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