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과 선생님 사이, 한국어교원

[한국어교원, 교단 너머 이야기] ② 한국어가 이끈 길

지난 5월 스승의날을 맞아 직장갑질119와 온라인노조 한국어교원지부가 '교단 너머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한국어교원 수기 공모전을 열었다. 수기에는 외국인이 한국을 접하며 처음 만나는 선생님이자 초단기 계약과 공짜 노동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인 한국어교원들이 겪는 고충, 그리고 애환이 담겼다. 세 편의 수상작을 최우수상 한 편과 우수상 두 편 순으로 싣는다. 편집자

생계의 길을 찾다

남편의 위태롭던 사업은 결국 파산이라는 이름으로 무너졌다. 경매로 집을 잃었고 간신히 전세방을 얻어 옮겨 앉은 나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오래 생각했다. 밑천도 기술도 없었고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다. 오랜 숙고 끝에 내가 택한 것은 말 즉 한국어였다. 내 몸 하나만 책임질 수 있으면 된다는 일념으로 코이카 봉사단원을 신청했고, 요르단 대학교에 배치받았다. 그러나 코로나가 창궐하던 세계적인 팬데믹 시절이어서 1년 만에 귀국해야 했다. 다시 돌아가리라 믿었지만, 코로나는 예상보다 훨씬 길었고 교육환경도 바꾸어 놓았다. 나는 다시 태국의 매조대학교 학생들에게 온라인으로 한국어를 가르쳤다. 생계형으로 선택했던 한국어 교육은 이후 이란의 테헤란으로, 튀니지의 튀니스로 이어졌다. 여행지로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낯선 두 도시는 교육자이면서 동시에 근로자라는 두 가지 사실에 눈뜨게 했다.

페르시아의 창에 비친 나

이란과 튀니지, 두 나라는 물리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내겐 멀기만 한 나라였다. 두 나라가 내게 주는 느낌도 너무나 달랐다. 테헤란의 학습자들은 내가 가르칠 준비가 되기도 전에 이미 배울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다. 학당 관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환대, 학생들과의 교감, 한때 대제국이었던 페르시아의 후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자긍심. 이 모든 것이 내가 선택한 이 길이 정말 잘한 선택이라는 확신을 갖게해 주었다. 나는 늘 존경받는 선생님이었고, 때로는 귀한 손님이었고, 또 때로는 맛있는 음식과 문화를 나누는 아주 친한 친구였다. 이란은 폐쇄적이라는 말은 내 앞에서는 힘을 잃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이란의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어 서둘러 귀국을 선택해야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온라인 수업을 하면서도 테헤란의 기억으로 내 마음은 항상 따듯했다. 이란은 물리적으로는 여전히 먼 나라였지만 심정적으로는 너무나 가까운 이웃이 되어 있었다.

온기 없는 교실

그 마음이 식기도 전에 도착한 튀니스에서 믿음과 확신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시간표는 이미 나와 있었고, 20여 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바로 그날부터 수업은 시작되었다. 같은 교재, 같은 마음으로 수업을 했지만 학생들의 표정은 무심했다. 교재 내용에 관해서도 내 개인에 대해서도 어떤 관심도 질문도 없었다. 나의 등장은 반가움보다 의무였고, 학생들은 질문보다 지각과 결석이 더 많았다. 교실의 공기는 냉랭했고 그곳에서 나는 누군가의 대체 인력이었으며 외부인이었다.

교원으로서는 학사일정을 소화해야 했고, 생활인으로서 집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방문해야 했다. 이곳 사람들은 프랑스어와 튀니지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영어만 쓸 줄 아는 나는 반벙어리와 다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튀니스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임종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자식으로서 마땅히 장례식에는 참석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소속되어 있는 재단과 시차, 공휴일, 담당자의 늦장 대응 등으로 불협화음이 길게 이어졌고 마땅히 받아야 할 부모 사망 특별 휴가를 받지 못했다.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 안타까웠지만 나는 파견 교원의 책임과 의무는 다했다. 출퇴근과 수업은 늘 같은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시작되고 끝났다. 학습자들의 환경에 맞추다 보니 수업은 오후 늦게 시작하고 밤에 끝났다. 마트도 문을 닫고, 빵 가게에는 저녁으로 먹을 빵이 모두 팔린 뒤였다. 저녁이 없는 삶을 뼛속 깊이 실감했다. 그러나 누구를 원망하랴. 내가 선택한 일인 것을.

한 학기가 마무리될 즈음, 수료식 준비로 책걸상을 옮기라는 말을 들었다. 당연히 함께 옮길 줄 알았지만, 혼자 절반 이상을 날라야 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팔다리가 후들거리는데, 옆에 있는 운영요원은 보내야 할 서류가 있다며 컴퓨터 앞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결국 40개가 넘는 책걸상을 오기로 혼자 옮겼다. 너무도 힘들어 "이건 나이로 보나, 관계로 보나 옳지 않다"고 말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우린 경로우대 같은 거 없다"는 말이었다. 말문이 막혔다. 내가 원한 건 우대가 아니라 협조와 연대였다. 그리고 정작 수료식을 할 때는 식순도 알려주지 않았다. 예정된 시작 시간이 되어 수료식 장소로 내려가 사회를 맡고 있는 학생에게 식순을 묻고 행사에 스스로 끼어들었다. 마치 초대받지 못한 손님 같았다.

내가 이곳에서 어떤 존재로 여겨지고 있는지 깨닫는 데에는 한 학기로 충분했다. 주어진 일정을 수행하는 사람, 정해진 시간에 수업만 하고 어떤 일에도 관여해서는 안 되는 사람, 시키는 일만 해야 하는 사람, 감정 없는 기능인으로 파악되는 존재였다. 책상, 교재, 출석부 등 표면적으로는 아무것도 어긋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하루에는 사람이 없었다. 온기도, 웃음도, 가벼운 농담도, 따듯한 차 한 잔도, 지친 하루를 나누는 말 한마디도 없었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가졌는데 정작 나는 한국말이 고팠다. 사람은 사라지고 일꾼만 존재한다는 느낌이 스멀스멀 내 가슴에 스며들었다. 주인의 명령으로 남의 집에 품앗이 나온 머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본분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무심함 너머의 진심

그런데 한 학기를 마무리하자 그동안 무심하던 학습자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수료식 날, 많은 학생이 함께 사진을 찍자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다음 학기에도 꼭 자기들의 반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깊은 포옹으로 전해온 그들의 진심은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소 닭 보듯 하던 눈빛이 따듯한 신뢰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 두 번째 학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학생들과 함께할 수료식 일정을, 하필이면 내가 지방 출강을 가는 날로 잡아놓았다. 교사 없이 진행되는 수료식. 학생도, 교사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이 결정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먼 나라에서 만난 모든 인연에게 '작은 선물'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는 귀한 선물이 된 것 같고, 또 누군가에게는 뚱한 머슴이었던 것 같다. 두 도시에서 두 개의 이름으로 살아낸 시간. 때로는 선생님이었고, 때로는 손님이었으며, 또 때로는 품앗이 나간 머슴이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교단이라는 하나의 길 위에 서 있다. 이것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며 다시 선택해도 걸을 길이라는 믿음으로.

▲ 2023년 8월 7일 오전 서울 강남구 코엑스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열린 '2023 세계 한국어 교육자 대회'에서 참석자들이 토크콘서트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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