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미국은 인종주의가 잉태한 갈등과 반목으로 격렬한 내홍을 겪고 있었다. 흑인노예 해방을 둘러싸고 나라가 두 쪽 날판이더니 끝내 남북전쟁(1861~1865년)이 터져 5년간 북부와 남부가 총부리를 맞대고 싸웠다. 노예해방을 주장하는 북부가 이겼지만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인종차별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수정헌법 제13, 14, 15조가 규정한 '노예제도 폐지', '흑인 시민권 부여', '흑인 참정권 허용'과 관련한 법률들의 집행을 감시, 감독하기 위해 북부군이 파견되었다. 그 기간을 재건시기(Reconstruction Era-1865~1877년)라고 말한다. 그 기간이 끝나 북부군이 철수하자 남부 흑인에게는 고통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후의 현실은 흑인들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헌법조항은 휴지조각처럼 예사로 무시되고 위반이 다반사로 이뤄졌다. KKK 같은 극단적 인종주의 단체가 되살아나 백인우월주의가 다시 활개를 쳤다. 흑인들을 이유 없이 살해하는 참극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무엇보다도 자유를 찾은 노예들이 전후경제에서 생존의 기회를 잡기란 하늘의 별따기 마냥 어려웠다.
북아메리카에서 백인의 정착과정은 땅을 뺏으려는 백인과 뺏기지 않으려는 원주민 사이에는 한 맺힌 교전이 이어졌다. 원주민 토지 강탈전은 오늘날 미국 국토의 전역에서 끝없이 전개되었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인디언을 적군, 또는 적국으로 간주하여 섬멸대상으로 삼았었다.
미국역사는 그 기간을 대체로 1622~1890년으로 보는데 백인과 원주민의 무수한 무력충돌을 통틀어 미국 인디언 전쟁(American Indian Wars)라고 일컫는다. 인디언을 인종청소의 대상으로 삼고 있던 미국연방정부가 다 죽이기에는 버겁다고 판단했던지 1830년 인디언 이주법(Indian Removal Act)을 제정했다.
그 법에 따라 대포로 무장한 기병대를 동원하여 동부와 남부에 밀집해 살던 원주민 부족들을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오늘날 오클라호마 주의 허허벌판에 이른바 유보지라는 곳을 만들어 원주민들을 끌고 가서 포로처럼 격리, 수용했던 것이다. 또 서부의 인디언들도 그곳의 동쪽에 가두었다. 그 과정에 수많은 원주민들이 학살되었다. 그에 따라 19세기 말엽에는 미국의 원주민 인구가 백인의 100분의 1 수준인 25만~30만명으로 줄어들었다.
1848~1855년 미국사회를 흥분시킨 골드 러시가 터졌다. 서부에서 금이 발견되었다고 알려지자 동부에서 빈털터리 이민자들이 저마다 벼락부자의 꿈을 안고 서부로 달려갔다. 중국인 쿨리의 북아메리카 이주도 그 무렵부터 주로 이뤄졌다. 초기에는 금이 노천에서 많이 나오는 데다 대형토목공사도 많이 쏟아져 일감이 넘쳐났다.
그 통에 백인들이 중국인 광부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채금량이 차츰 줄어들자 중국인들이 일자리를 뺏어간다며 적개심과 증오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외국인 광부세법과 같은 규제법을 만들어 중국인 쿨리들을 금광에서 쫓아냈다.
그 무렵 미국사회는 흑인노예 해방을 둘러싼 남북전쟁, 토지강탈을 위한 원주민 강제이주가 맞물려 인종차별문제로 긴장감이 극도에 달해 있었다. 그런 상황인데 피부색이 인디언과 흡사하게 생긴 중국인들이 불쑥 무리를 지어 나타나자 백인사회가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이다. 중국인 배척운동이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이유를 내세웠지만 그 기저에는 백인우월주의의 배타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백인들이 중국인들을 경계하던 터에 그들의 증오심을 폭발하게 만든 직접적인 동기는 유색인이 감히 백인여자와 결혼했다는 분노였다. 중국인들이 더러 미국사회의 밑바닥에서 작부나 창부로 먹고살던 백인여자와 결혼했다. 그러자 많은 주들이 이인종(異人種)결혼반대법(Anti-Miscegenation Law)을 제정하여 중국남자와 백인여자의 결혼을 금지했다.

그럼에도 1850년대 중반 중국인들이 서부에서 뉴욕까지 진출하더니 그 중에서 11명이 아일랜드 여자와 결혼한 사실이 드러나자 미국사회는 더욱 격앙되었다. 백인의 나라 아메리카의 인종적 순혈주의를 오염시킨다는 것이었다. 1800년대 후반 38개주에서 제정된 이인종결혼반대법이 중국남자와 백인여자의 결혼을 금지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하고도 남는다.
중국인 쿨리들은 남북전쟁이 종식된 이후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은 인도인 쿨리와 달리 가족을 동반하지 않아 이주자가 모두 남자였다. 중국인 여자는 전족(纏足)이라고 해서 어릴 적부터 발가락을 발바닥 쪽으로 동여매어 못 자라게 했다. 그 까닭에 발이 기형적으로 성장해 똑바로 서기도 어려워 아버지, 남편, 오빠를 따라 가지 못했다.
그러자 매춘을 목적으로 중국인 여자를 멕시코 국경을 통해 밀입국시키기 시작했다. 중국여자에게 스페인어 몇 마디를 가르친 다음에 멕시코 원주민으로 위장해서 미국으로 데려갔던 것이다. 1875년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란트가 연두교서에서 그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급기야 그 해 중국여자와 일본여자의 입국을 금지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캘리포니아 출신 연방하원의원 호레이스 F. 페이지의 이름을 따서 1875년 제정된 페이지법이 그것이었다. 그 법은 연방정부 차원에서 처음 제정된 이민규제법으로서 중국인의 계약노동을 불법화하는 한편 중국여자는 부도덕한 목적의 이민을 금지했다. 쉽게 말해 남자는 집단이주를 금지하고 여자는 매춘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입국이 허용되었다.
미국이 이민자의 나라이지만 이른바 유색인인 중국인에게는 이민을 허용하지 않았다. 막일꾼이 모자라 중국인들을 데려다 싼값에 부려놓고는 막상 대형토목공사가 끝나자 중국인 쿨리들이 백인의 일자리를 뺏어간다는 핑계를 내세워 중국인 추방운동을 벌였다. 마침내 연방정부가 중국인의 이민을 금지하는 중국인 배제법(Chinese Exclusion Act)을 제정했으니 그 때가 1882년 5월이었다.
모든 중국인을 추방의 공포에 휩싸여 떨게 만든 중국인 배제법은 61년이 지난 1943년 매그너슨 법(Magnuson Act)이 제정되면서 폐지되었다. 일본이 만주침략을 감행하자 중국이 일본에 대항하여 선전포고를 했던 덕분이었다. 결과적으로 중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함으로써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던 것이다. 그 법에 따라 대도시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숨을 죽이고 숨어살던 중국인들이 햇빛을 보게 되었다.
중국인 배제법이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백인과 백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캘리포니아주법은 그 대로 존속했었다. 그 법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1948년 캘리포니아 주대법원이 이인종간의 결혼금지는 주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린 다음에야 폐지되었다. 다른 주들은 비슷한 법률을 그대로 존치했었다.
그러다 1967년 연방대법원이 이인종(異人種) 결혼금지법(Anti-Miscegenation Law)은 헌법에 위배된다고 만장일치로 판결을 내린 다음에야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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