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만 죽였다" 허풍 떤 아이히만, 법정에선 "나는 도구였다" 발뺌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16]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44

윤석열의 12.3 계엄이 실패로 끝난 데는 여러 요인이 얽혀 있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는 계엄군으로 동원됐던 장병들이 '당나라 군대'마냥 일부러 굼뜬 걸음을 걸으면서 사실상 태업을 했다는 점이 꼽힌다. 대한민국 정예병의 활력 넘치는 잽싼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나중에 국회 청문회에서 드러난 사실이지만, 이들은 상부의 옳지 못한 명령을 처음부터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한마디로 '사람에게 무조건 충성을 바치는 무뇌(無腦)의 인간'이 되길 거부했다.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말하면서 꼽은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 친위대 중령, 독일 국가보안본부 제4국 B과장)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나쁜 짓을 저지르면서 고민이나 생각을 해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 했다. 특전사 요원들을 비롯해 12.3 계엄에 동원됐던 장병들이 만에 하나 아이히만이나 루돌프 회스(1901-1947, 친위대 중령,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처럼 아무 생각 없이 '상부의 명령이니까...'하며 작전을 펼쳤더라면 어땠을까. 윤석열 탄핵은 물론 6.3 대선은 생각도 못할 일이다.

아렌트를 '파문'시킨 유대인 주류사회

법정에서 아이히만과 회스가 똑같이 주장했듯이, 그들과 같은 실무자급 지휘관이 없었어도 누군가는 집단 학살과정에서 저마다에게 주어진 일을 맡아 처리해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이 둘의 역할이 유대인의 운명을 크게 흔들었음을 보여줬다. 나치 중간간부로 홀로코스트에 관여한 이들 두 친위대 중령은 공통점을 지녔다. 둘 다 재능은 뛰어나진 않았어도 명령에 따라 주어진 임무를 열심히 해내는 성실성으로 상관의 인정을 받았다. 자신들의 행동이 낳을 결과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악행을 저질렀다. 그렇기에 1961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보면서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문제의 화두를 내놓았다.

아이히만이 '사악한 괴물'이 아니라 '생각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이라는 아렌트의 판단은 누구보다 유대인들의 반발을 불렀다. 홀로코스트 주범 가운데 하나로 아이히만을 꼽아왔던 유대인들은 "아이히만이 괴물이 아니라면 누가 괴물인가"하며 아렌트를 비난했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무죄라 주장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럼에도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감싸고 유대인 희생자들(피해 당사자와 유족)을 모욕했다"고 발끈했다.

리처드 번스타인(미 뉴스쿨대, 철학)은 아렌트에 관한 여러 권을 책을 썼다. 아렌트가 미 주간지 <뉴요커>에 5회에 걸친 아이히만 재판 방청기를 내보내고, 이를 바탕으로 단행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출판했을 때 유대인 사회가 보인 부정적 반응에 대해 번스타인은 이렇게 적고 있다.

[아렌트는 악의에 찬 공격을 받았다. 그녀가 아이히만을 위해 변명하고 있고, 아이히만에게 희생된 유대인들보다 아이히만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했으며, (나치에 협력했던 유대인지도자들 때문에) 유대인이 스스로 절멸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는 비난이었다. 많은 사람이 아렌트가 사용한 역설적인 문체에 감정이 상했다. 어떤 이들은 그녀가 '경박하고' '악의에 차 있다'고 비난했다. '악의 평범성'이란 표현이 유대인 수백만의 절멸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사람들은 아렌트의 사적인 부분까지 공격했다. 아렌트가 '스스로를 멸시하는 유대인'이란 비난이었다](리처드 번스타인,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한길사, 2018, 91쪽).

위 인용문 끝에서 '스스로를 멸시하는 유대인'(또는 '자기혐오에 빠진 유대인')이란 구절은 21세기 유대인 극우 강경파들도 자주 입에 담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팔레스타인을 겨냥한 이스라엘의 군사적 강공책이 전쟁범죄'라고 비판하는 이스라엘 평화주의자들을 겨냥해서 쓰는 용어다. 이스라엘 사회에선 소수자인 유대인 평화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과의 평화공존을 주장하지만, 극우파 유대인들의 시각에선 평화주의자들이 '자기혐오에 빠진 유대인'이고 '배신자'다. 일본의 극우파들이 잘못된 과거사를 반성적으로 돌아보자는 일본 지식인을 향해 "당신은 자학사관(自虐史觀)에 빠졌다"라고 공격하는 것과 같다(김재명, <일본의 전쟁범죄>, 진실의힘, 2024, 83쪽, 87쪽, 111쪽 참조).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진실을 하나 꼽자면, 이스라엘과 미국의 유대인 지도자들이 아렌트를 못마땅하게 여긴 데엔 '악의 평범성' 논리 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컸다. 나치 독일에 협력하면서 유대인 게토(ghetto)의 반인권적 통치를 거들었던 '유대인 평의회'(Judenrat) 소속 지도자들이 순차적으로 (자신과 가족들을 후순위로 빼돌리고) 동족인 유대인들을 폴란드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는 데 협력했던 사실을 들춰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유대인 지도자들은 (유대인 추방 일을 맡았던) 아이히만의 공범자 또는 협력자로 비쳐지기 마련이었다. 아렌트의 비판을 들어보자.

[자기 민족을 파괴하는 데 유대인 지도자들이 한 역할은 유대인에게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 모든 어두운 이야기 가운데 가장 어두운 장을 이룬다. (중략) 그들은 유대인을 체포하는 데 도움을 주고 그들을 기차에 태우도록 경찰력(유대인경찰)을 제공했다. 그들이 새로운 권력을 얼마나 즐기고 있었는지를 우리는 여전히 감지할 수 있다. 진실은 더 끔찍했다](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187-188쪽).

아렌트는 '유대인 지도층이 차라리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면 (아이히만과의 협력을 거부했다면) 그나마 유대인 희생을 줄였을 것'이란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로 말미암아 아렌트는 유대인 주류 사회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아렌트의 책은 금서 목록에 올랐다. 바로 10여 년 전만 해도 이스라엘에서 아렌트의 책을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납치돼 아얄론 감옥에 갇힌 아돌프 아이히만. 좁은 마당을 걸으며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1961년 4월21일). ⓒ위키미디어

"아이히만은 천박한 허풍쟁이"

예루살렘 재판이 끝나고 아이히만이 교수형(1962년 6월1일)이 이뤄진 뒤로도 '악의 평범성' 논란은 줄곧 이어졌다. 예루살렘 재판 10년 뒤 아렌트는 사유(思惟)를 주제로 한 두툼한 책(The Life of the Mind, 1971)을 펴냈다. 여기서 아렌트는 어떻게 아이히만에게서 '악의 평범성'을 찾아냈는지를 밝힌다.

[나는 아이히만에게서 나타나는 천박함에 충격을 받았고, 소름 끼치는 그의 행적들에 내포된 악의 심층적 근원이나 동기를 추적하고 싶었으나 불가능했다. 아이히만이 재판을 받던 당시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아주 정상이었고, 평범하면 평범했지 결코 악마적이거나 괴물 같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에게서는 확고한 이데올로기적 신념이나 특이한 악의적 동기와 같은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한나 아렌트, <정신의 삶, 사유와 의지>, 푸른숲, 2019, 47쪽).

아이히만은 아우비츠 수용소장을 지낸 루돌프 회스보다 5살 아래다. 중학교를 중퇴한 회스와 마찬가지로 아이히만도 공부에 뜻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그 뒤 다녔던 직업기술학교도 끝까지 마치질 못했다. 지방도시에서 전철 및 전기회사의 회계원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도 아니고, 이렇다 할 재능을 갖춘 학생도 아니라고 여겼다.

전기회사를 그만 두고 작은 광산을 사들인 아버지는 아들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단순 광부로 일하도록 했다. 아이히만은 친위대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토목기사로 일했다"고 주변사람들을 속이곤 했다. 1932년 아이히만이 나치당 입당에 이어 같은 해에 친위대로 들어갈 때 작성한 이력서 직업란엔 광부나 그 뒤의 직업인 세일즈맨이 아닌, '토목기사'로 적혀 있다. 이를 두고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은 허풍쟁이'라 꼬집었다.

"아이히만이 모든 공식기록에서 직업으로 기록한 '토목기사'라는 것은 (마치 어떤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기에 히브리어와 이디시어(유럽 유대인의 언어)에 능숙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명백한 거짓말을 아이히만은 자신의 친위대 동료들과 유대인 희생자들에게 즐겨 말했다. 분명히 허풍이 언제나 아이히만의 가장 큰 죄 가운데 하나였다](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21, 82-83쪽).

"500만 죽였으니 웃으며 무덤에 뛰어들겠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남들에게 큰소리를 치는 것을 좋아하고 속물적인 근성을 지닌 허튼 인간으로 봤다. 아렌트의 표현을 빌자면, '허풍(bragging)은 아이히만을 파멸시킨 악덕'이었다. 아렌트는 심지어 500만 명을 죽였다는 아이히만의 말을 '허풍'으로 여겼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가 부하들에게 "나는 내 무덤에 웃으며 뛰어들 것이다. 500만 명의 유대인(또는, 그가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고 주장한 '제국의 적들')을 죽였다는 사실이 내 양심에 큰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은 완전히 허풍이었다. 그는 무덤에 뛰어들지 않았다](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21, 102-103쪽. 번역문에 오류가 있어서 바로잡음. 원문은 "I will jump into my grave laughing, because the fact that I have the death of five million Jews [or 'enemies of the Reich', as he always claimed to have said] on my conscience gives me extraordinary satisfaction." 번역문은 "500만 명 유대인의 죽음에 내 양심이 거리낀다는 사실이 나에게 대단한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라 돼 있음).

누가 들어도 유대인 500만 명을 마치 아이히만 혼자 죽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당연히 '허풍'으로 여길 것이다. 유대인 죽음은 아이히만 혼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나치 정권의 여러 관련자들이 각자의 역할을 해냄으로써 나온 총제적인 비극적 결과다. 따라서 아이히만의 위 발언은 터무니없다. 아렌트에 따르면, 그럼에도 아이히만은 '그 저주받을 말을 들어줄 만한 모든 이들에게 그 말을 역겹도록 되풀이했다'고 꼬집었다(헝가리에서 아이히만을 만난 적이 있던 전 공사관 호르스트 그렐은 예루살렘 재판에서 "아이히만이 허풍을 떨었다고 생각한다"고 증언했다).

"아이히만이 칸트를 말하다니...무례했다"

아렌트가 지적하는 아이히만의 '허풍'은 500만 학살설만이 아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열차에 실어 수용소로 보내기 앞서 일정 지역에 가둬 놓는 게토 체계를 그 자신이 '발명'했다고 큰소리쳤다. 또한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로 유대인들을 집단 이송하려던 계획(대서양을 지배하는 영국 해군의 위협 때문에 탁상공론에 그쳤던 계획)을 아이히만 자신이 생각해낸 것처럼 말한 것도 아렌트가 보기엔 완전히 허풍이었다(실제로 게토 체계는 아이히만의 직속 상관인 국가보안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발상으로 알려졌고, 마다가스카르 이송 계획은 독일 외무부에서 처음 논의됐다).

예루살렘 법정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의 어설픈 지식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사람마다 조금씩 그런 성향이 있지만, 아이히만의 경우는 좀 지나쳤다. 법정에서 아이히만은 "나 자신은 일평생 이마누엘 칸트의 도덕 계율을 따랐고, 칸트의 의무 개념을 나 자신의 지도 원리로 삼았다"고 밝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무슨 뜻이냐며 질문이 이어지자, 아이히만은 칸트의 '정언 명령'(定言命令, Kategorischer Imperativ)을 들먹이며 그 자신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으로도 타당한 명령에 따라 행동했다고 주장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이히만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도 읽어봤다고 덧붙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필자는 학부에서 철학과를 다녔어도 18세기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의 독일어 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번역본도 제대로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문체는 딱딱하고 내용은 어려웠다. 그런데 고교 중퇴 학력의 아이히만이 칸트를 읽었다 하니.....법정은 물론 TV 법정 녹화 화면을 몇 시간 차이로 받아본 전 세계 시청자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예루살렘 재판이 워낙 화제를 모았기에, 한국의 '대한뉴스'(당시의 명칭은 '대한늬우스')는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국내 영화관에서 틀어주었다.

아이히만이 칸트를 말했던 수준은 마치 한국의 보통사람들이 가끔씩 공자 말씀에 따르면...하고 가볍게 얘기를 주고받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칸트를 꼽아가며 어설프게 자신의 범죄행위를 변명하는 모습이 한나 아렌트에게도 꽤나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듯하다. 1970년에 가졌던 한 인터뷰(2013년 <Hannah Arendt, The Last Interview and Other Conversations>로 출간)에서 아이히만이 법정에서 칸트를 입에 올렸다는 사실을 대담자가 떠올리자, 곧바로 이렇게 대꾸했다. "꽤나 무례한 언급 아닌가요? 아이히만이 하기에는요."(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말>, 마음산책, 2016, 85쪽).

▲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들. 1945년 1월27일 소련군이 수용소를 접수한 뒤의 모습이다. ⒸAlexander Voronzow

"기차에 실어 보냈을 뿐, 내가 안 죽였다"

이렇듯 아렌트가 보기에 여러 모로 '허풍'을 부렸던 아이히만이었지만, 예루살렘 법정에서는 "상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식으로 자세를 한껏 낮추고 발뺌을 하려했다. "명령에 따라 사람들을 모으고 떠나는 날짜에 맞춰 기차에 실어 수용소로 보냈을 뿐이다. 내가 그들을 죽인 것은 아니다"라고도 했다. 그가 열차에 태워 보낸 사람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닿자말자 치클론B 독가스로 처형되거나 노예노동을 강요당할 운명이라는 사실에 대해선 깊이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고 나 몰라라 했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가리켜 흔히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나와 내식구만 챙기는 것이 아닌, 타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한 경우다. 이름난 신경과학자이자 발달심리학자인 사이먼 배런코언(캠브리지대)은 그의 화제작 <공감 제로>(Zero Degrees of Empathy, 2011)에서 "공감 회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람은 잔인한 행동을 한다"고 했다. 아이히만뿐 아니라 나치 간부들이 대체로 그랬을 것이다. 아렌트가 보기에 허풍보다 더 심각한 아이히만의 성격적 결함은 '그 어느 것도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관청용어(Amtssprache)만이 나의 용어입니다." 예루살렘 법정에서 아이히만은 독일어로 그렇게 말했다. 아이히만이 말하는 '관청용어'는 나치 시대의 관리들이나 군 지휘부가 쓰던 그들만의 일상용어를 가리킨다. 이를테면, 유대인 집단학살을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로 말하고, 폴란드 수용소로의 추방을 '동쪽으로 이주시킨다' 등이다. 아렌트가 보기에, 관청용어가 아이히만의 일상 언어가 된 것은 '상투어가 아니고서는 (타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단 한 구절도 말할 능력이 정말 없었기 때문'이다. 아렌트의 비판을 들어보자.

[아이히만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가 말하는 데 무능력(inability to speak) 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과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떤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과 다른 사람의 현존(presence)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106쪽).

'생각하는 데 무능력'은 한문투의 말로 흔히 무사유(無思惟)라 한다. 쉬운 우리말로 '아무 생각이 없다' 또는 '생각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옳고 그름을 헤아리지 못하는 로봇이나 다름없다. 12.3 계엄 때 로봇 병사들이 여의도 국회에 투입됐다면, 컴퓨터 칩에 입력된 대로 마구잡이 체포(수거)가 이뤄졌을 것이다. 계엄군엔 '생각이 깊은 민주 장병들'이 많았기에 본분을 지켰고 내란의 피바람을 막았다.

"반유대주의를 오래 전에 버렸다"

예루살렘 법정에 선 아이히만을 방탄 유리창 넘어 처음 본 사람들은 살짝 대머리에 검정 테 안경을 낀 아이히만이 수백만 유대인을 죽인 '괴물'로 보기는 어려웠다. 몇 시간 차이를 두고 텔레비전 녹화 화면을 본 전세계 시청자들의 눈에도 아이히만은 어리숙하고 겁에 질린 노인의 모습이었다(다음 주 글에서 다루겠지만, 지난날 아이히만이 했던 말들을 기억하는 몇몇 사람들은 법정의 아이히만이 '연기'를 아주 잘 하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재판이 이어지면서 아이히만은 그가 유대인 문제 최종해결을 위해 열심히 맡아 해냈던 악마적 역할이나 유대인을 절멸시켜야 한다는 반유대 신념을 부정했다. 그저 나치 행정과 법체계에 따라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를 따랐던 '성실하고 선량한' 공무원처럼 보이도록 했다. 지난날 아르헨티나에서 골수 나치들에게 들려주었던 강성발언들은 숨겼다. 아르헨티나 시절의 아이히만 행적을 파헤친 독일 철학자․역사학자인 베티나 슈탕네트의 책(Eichmann vor Jerusalem, 2011)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기본적으로 아이히만의 방어 전략은 자신이 더 이상 민족사회주의자(Nazi)가 아니며, 지난 15년 동안 죄 짓지 않고 평범하게, 무엇보다 정치와 거리를 두고 살아온 시민임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오래된 적개심을, 무엇보다 반유대주의를 오래 전에 버렸다고 주장했다](베티나 슈탕네트,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글항아리, 2025, 418쪽).

예루살렘 법정에서 아렌트가 바라본 아이히만은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로봇이었다. 그렇기에 아렌트는 그가 악행을 저질렀는데도 평범(또는 진부)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악의 평범성'이란 단어를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아이히만은 그저 '평범하다'고만 단정하고 넘어갈 수 없는 끔찍한 과거사를 지닌 전쟁범죄자다. 그의 내면에 무시무시한 '피의 기억'을 묻어둔 인간유형이다.

"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에 남아있던 아이히만의 가족은 한 집안의 가장인 그를 살리려 애썼다. 수소문 끝에 독일 쾰른의 로베르토 세르바티우스를 변호사로 선임했다. 세르바티우스는 독일 패전 뒤 열렸던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도 일부 전범들의 변호사로 일했던 전력을 지녔다. 그의 변론 비용은 당시로선 거액인 2만~3만 달러쯤으로 알려진다. 변호사 비용은 아이히만 가족이 조금 내긴 했지만, 대부분은 이스라엘 정부가 댔다. 독일 패전 뒤 열렸던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전범자들의 변호사 비용을 전승국이 치렀던 전례를 따라서였다.

피고인 아이히만이 사형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세르바티우스 변호사는 이스라엘 검사들과 재판 내내 입씨름을 벌였다. 1961년 4월11일 처음 열린 재판에서 세르바티우스 변호사는 △예루살렘 법정의 재판부가 이미 편파적으로 구성되었기에 아이히만 재판을 다룰 권리가 없고 △아이히만의 범죄를 소급해서 처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이스라엘 국회(Knesset)는 1950년 나치의 집단 살해 관련자들을 시효에 관계없이 사형에까지 처할 수 있다는 특별법을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최후진술(1961년 8월14일)에서 자신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 단시 유대인 수송과 행정업무를 수행했을 뿐, 유대인학살에 개인적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최후진술은 매우 짧았다. 감정적인 호소도 하지 않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나는 내가 받은 명령을 이행하는 데 관여했다는 의미에서 죄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나는 책임 있는 지도자가 아니었으며, 권력자들의 손에 쥐어진 하나의 도구(Wergzeug)였습니다. 나는 증오심에서 행동한 것이 아니었고, 개인적이 동기에서 행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이 재판부에 정의를 간청합니다](The Trials of Adolf Eichmann: Record of Proceedings in the District Court of Jerusalem, Volume 5, Israel State Archives, 1993, 2485-2487쪽).

아이히만은 자신이 기소된 범죄들 가운데 상부의 명령을 이행하는 데 관여했다는(상부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을 수송열차에 태워 보내도록 했던) '교사'(敎唆) 부분에선 유죄를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최후진술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행동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지 않고 단순한 명령 이행만을 강조했던 아이히만의 모습에서 '그의 평범성과 무사유성이 마지막까지 드러났다"고 평했다. 아이히만의 최후진술을 들으면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머릿속에 더욱 굳혔다.

▲ 1942년 1월20일 베를린 교외 반제에서 나치 독일 차관급 관리들이 모여 유대인 절멸을 논의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회의 서기를 맡았다. 반제회의가 열렸던 건물은 지금은 기념관으로 쓰인다. Ⓒ김재명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사악하게 생각했다"

1950년대 아르헨티나 시절 나치 도망자들 앞에서 아이히만이 털어놓았던 발언 수준은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는 사뭇 달랐다. 아렌트가 느꼈던 '허풍'이 좀 섞인 듯하지만, 그 무렵의 아이히만은 '지도자 히틀러를 따르는 확신에 찬 이념적 골수 나치'처럼 보인다. 아이히만 기록은 '아르헨티나 문서'로 불린다. 1957년 네델란드 무장친위대 출신의 나치 도망자 빌렘 사센(Willem Sassen, 1918-2002)이 아이히만의 동의 아래 만든 녹음테이프와 이를 풀어쓴 두툼한 녹취록이다.

'아르헨티나 문서'를 보면,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아이히만은 말을 못하는 자가 아니었다. 말을 너무 많이 하는 자였다. 하지만 1961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에선 녹취록의 극히 일부만 제출됐고, 그나마 부분적으로만 증거로 채택됐다. 아이히만 연구자들은 한나 아렌트가 이 자료들을 꼼꼼히 듣고 볼 기회가 주어졌다면, '악의 평범성'보다는 다른 분석을 내놓았을 것이라 말한다.

독일 철학자․역사학자인 베티나 슈탕네트도 그러하다. 슈탕네트는 아이히만의 녹음테이프와 녹취록을 바탕으로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Eichmann vor Jerusalem, 2011)이란 역작을 펴냈다. 여기엔 아이히만의 지난날 행적과 생각이 비판적으로 잘 정리돼 있다. 슈탕네트는 아이히만을 '나치즘으로 무장한 확신범'로 평가한다.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을 써낸 5년 뒤 슈탕네트는 철학 수필집 <Böses Denken>(나쁜 생각, 또는 악한 생각, 2016)에서도 위와 같은 의견을 내면서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비판적으로 다뤘다. 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생각이 없는 평범한 관료'가 아니었다. "아이히만은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악하게 생각했다"(Eichmann konnte denken, aber er dachte böse). 따라서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가해자 아이히만의 책임을 덜어주는 측면이 있다고 비판한다.

슈탕네트뿐 아니다. 크리스토퍼 브라우닝(노스캐롤라니아대, 독일현대사), 이동기(강원대, 평화학)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이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법정 연기에 속아 넘어갔다"고 지적한다. 다음 주엔 아이히만의 '아르헨티나 문서'와 슈탕네트의 책 두 권을 바탕으로, 다른 여러 연구자들의 '악의 평범성' 논의를 좀 더 들여다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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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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