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의 밤, 그는 자신이 써내려 간 이 드라마의 결말을 알았을까. 국민에게 혹독한 겨울을 선사했던 그는 봄이 되어 겨울을 맞닥뜨렸고, 겨우내 봄을 부르짖었던 국민은 마침내 따스한 계절을 맞이했다.
헌법재판소가 38일간의 장고 끝에 4일 윤석열 '파면' 선고를 내렸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지 111일 만에 마침표를 찍은 셈이다. 12.3 비상계엄 선포 당일을 기준으로는 123일 만이다.
그 어느 때보다 길었던, 비상계엄 선포의 날부터 헌재 선고까지 123일간의 시간을 정리했다.

윤석열 '내란'의 시작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3일 오후 10시 28분 긴급 대국민담화를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오후 11시 박안수 계엄사령관 명의의 포고령이 반포됐으며, 국회 출입이 봉쇄됐다. 시민들이 국회 주변으로 모였으며, 야당 국회의원들은 시민들의 도움으로 국회 담을 넘어 본회의장으로 향했다.
계엄군 230여 명이 오후 11시 48분부터 오전 1시 18분까지 헬기를 24차례 동원해 국회 경내로 진입했다. 이들은 국회 본관 유리창을 깨고 진입해 전력 차단을 시도하는 등 의원들의 계엄 해제를 저지했다. 그러나 국회는 오전 1시 3분 계엄 해제 요구안을 재석 의원 190명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
윤 전 대통령은 오전 4시 20분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를 수용할 것이라며 두 번째 담화를 발표했으며, 10분 뒤 한덕수 국무총리,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등이 참석한 국무회의에서 계엄 해제안을 의결했다. 이로써 윤 대통령의 '내란'은 6시간만에 막을 내렸다.
국회는 이날 오후 1차 탄핵안을 발의했으나 7일 탄핵안 투표 불성립으로 폐기됐다. 이어 12일 2차 탄핵안을 발의, 14일 찬성 204표로 가결됐다. 이렇게 윤 대통령 탄핵안은 사건번호 '2024헌나8'로 헌재에 접수됐다.

헌재, '탄핵심판'의 시작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헌재의 탄핵심판은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사건을 심리할 재판관은 6명뿐이었으며, 정부 여당 및 피청구인 측은 '재판 지연 작전'을 썼다.
윤 전 대통령은 헌재가 우편과 전자 시스템으로, 또 인편으로 보낸 준비절차 기일 통지 등 탄핵심판 문서를 모두 거부했다. 헌재는 결국 지난해 12월 23일에야 '발송 송달'을 실시함으로써 사건 접수 9일 만에야 윤 전 대통령 탄핵 사건을 개문발차할 수 있었다. 발송 송달은 소송 관계자가 법원의 문서를 받지 않을 때 적용하는 '송달 간주' 방법이다.
국회는 헌법 재판관 후보 임명 절차를 서둘러 진행해 12월 26일 마은혁·정계선·조한창 후보자 임명동의안을 통과시켰으나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한덕수 국무총리의 거부에 임명 길이 막혔다. 결국 국회는 '한덕수 탄핵'으로 맞섰다. 한 총리 다음으로 권한대행이 된 최상목 경제부총리는 12월 31일 후보자 3명 중 2명만 임명해 탄핵심리 최소 조건(8인 체제)을 겨우 맞췄다.
윤 전 대통령 측은 변호인 구인난을 겪다 1차 변론준비기일이었던 지난해 12월 27일 당일 오전 가까스로 변호인단을 꾸렸다. 윤 전 대통령 변호인단은 탄핵심판에 필요한 의견서와 답변서 제출을 미루고, 증인 신청을 무더기로 하고, 두서 없이 길게 의사진행 발언을 하는 등 재판 지연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헌재는 1차와 2차(1월 3일) 변론준비기일을 통해 윤 전 대통령 탄핵 사건 쟁점을 △12.3 비상계엄 선포 적법성 △포고령 1호의 위법성 △군경 동원 국회 침탈 시도 △선거관리위원회 침탈 시도 △정치인 체포 지시 여부 등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주 2회 변론기일을 지정했다.
윤석열 '탄핵 공작' 항변의 시작
윤 전 대통령은 탄핵소추된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세 번째이지만, 그 외 여러 방면에서 헌정사상 '최초'라는 수식어의 주인공이 됐다.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수사기관의 체포영장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영장 집행을 거부해 1월 15일 대통령 관저에서 체포됐다.
구치소 수감 중에 법원의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는가 하면, 헌재 탄핵심판 변론기일에 참석해 '헌정사 최초 탄핵심판 출석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1월 14일부터 2월 25일 총 11차례 열린 변론기일 중 총 8번 출석했고, 구치소부터 헌재까지 그의 출석길은 매번 생중계됐다.
윤 전 대통령은 변론기일에 출석할 때마다 짧게는 2~3분에서 길게는 67분까지 의견진술을 했다. 그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증인으로 출석한 4차 변론기일(1월 23일)에서 직접 증인신문을 하며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답변을 김 전 장관으로부터 끌어냈다.
반면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곽종근 전 특전사령관 등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증인들을 상대로는 "내란 몰이", "탄핵 공작", "목적어 없는", "엮어낸 것", "상식에 안 맞는 뜬금없는 얘기"라며 자신의 계엄 선포로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로 항변했다.
윤 전 대통령은 최종 의견진술에서 "12.3 비상계엄은 과거의 계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무력으로 국민을 억압하는 계엄이 아니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라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며 반성도 없이 "직무에 복귀하게 된다면, 개헌과 정치 개혁의 추진에 임기 후반부를 집중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주권자, '윤석열 파면' 명령의 시간
헌재의 시간이 흘러가는 와중에 법원의 시간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는 2월 20일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기소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공판 준비 및 구속취소 심문을 진행했다. 법원은 2주 뒤 '날'이 아닌 '시간'으로 계산해 윤 전 대통령의 구속취소 청구를 인용했다. 그렇게 윤 전 대통령은 3월 8일 수감 52일 만에 서울구치소에서 출소해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됐다.
잠시 가라앉았던 탄핵 촉구 집회의 열기는 법원의 구속취소 및 검찰의 즉시항고 포기를 계기로 다시 달아올랐다.
시민들은 계엄 사태 이후 넉 달 가까이 광장에서 "윤석열 파면"을 외쳤다. 국회 앞에서, 한남동 관저 앞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남태령 고개에서, 헌재 인근에서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범시민행진'을 이어왔다. 지난달 29일 기준 범시민대행진 참여 시민은 연인원 100만 명을 넘었다.
시민들은 민주주의 회복과 헌정질서를 되찾기 위해 기자회견·시국선언·삭발·단식·밤샘·삼보일배·오체투지 등 모든 방법을 동원했으며, 헌재의 선고 직전까지도 "국민은 이미 윤석열을 파면했다! 헌재는 '8대 0' 만장일치 파면을 선고하라!"고 명령했다. 엄동설한에 내려졌던 비상계엄은 꽃 피는 봄에 '윤석열 파면' 엔딩으로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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