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 적응 힘들었던 지식인들, 끝내 '무슬림' 좀비로 숨졌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11]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39

지난 주 글에서 오스트리아 유대인 장 아메리, 이탈리아 유대인 프리모 레비, 이 두 지식인이 나치의 전쟁범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음을 살펴봤다. 이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고난의 시간을 보냈던 이른바 '홀로코스트 생존자'이고, 훗날 '자유로운 죽음'을 말하면서 스스로의 결단에 따라 죽음을 앞당겼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의미 있는 또 다른 공통점을 꼽자면, 둘 다 "아우슈비츠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용서나 화해를 쉽게 입에 올리지 말라"고 했다.

"정치인 등 제3자가 '용서하라'고 끼어들 수 없다"

이와 관련, 독자 한 분이 메일을 주셨다. 일본의 전쟁범죄를 둘러싼 용서·화해 논란에 관련해서다. 과거사에 대해 일본인들이 진심 어린 사죄를 하지 않는데도, 피해자들이 용서를 말하지 않는데도 정치인들이나 제3자가 너무 쉽게 용서나 화해를 말하는 것 같다는 요지였다. 백번 맞는 말씀이다. 지난 2022년 7월 선거 유세 중에 사제 총에 맞아 죽은 아베 신조를 비롯한 일본 정치인들은 입으로는 '사죄'를 말하면서도, 되돌아서면 망언을 내뱉곤 했다.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그들의 행태는 동아시아 과거사 문제를 풀기 어렵도록 만들었다.

더구나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뒤 일본에 보인 저자세 외교는 일본 극우들의 간덩이를 키웠고, 지난날 그들의 '잔혹한 전쟁범죄 기억'을 흐리도록 만들었다. 윤석열은 "나는 100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일본이 (용서를 받으려고)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2023년 4월 미국 방문 중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 그러면서 '제3자 변제'라는 희한한 해법을 내놓아 피해 당사자 또는 유족들을 다시 울렸다. 진심어린 사죄와 더불어 배상금을 내놓아야 마땅한 일본의 전범기업들은 얼마나 윤석열이 고마울까 싶다.

사과와 용서의 문제와 관련, 2009년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Der Vorleser, 1995)의 저자 베른하르트 슐링크(훔볼트대 교수, 법학)의 견해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 본업이 법학자인 그는 나치정권의 전쟁범죄에 대한 법적·도덕적 책임을 살피면서 '피해자만이 용서할 수 있는 주체'라고 못 박았다. 가해자가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기에 피해자가 용서를 못하고 있는데, 정치가를 비롯한 제3자가 '용서하라'고 끼어들 수 없다고 슐링크는 강조했다(김재명, <일본의 전쟁범죄>, 진실의 힘, 2024, 621-222쪽 참조).

장 아메리는 1978년, 프리모 레비는 1987년에 각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이 숨질 무렵 독일은 동서로 나뉜 상태였지만 과거사 문제에서 반성적인 자세로 돌아서고 있었다.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생자를 추모한 때가 1970년이었으니, 독일은 일찍부터 일본과는 달리 열린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이 두 지식인은 "독일인을 용서한다"는 말을 남기지 않았다. 나치의 끔찍한 전쟁범죄는 이 두 지식인뿐만 아니라 다른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게 지우기 어려운 트라우마를 남겼다. 성노예 '위안부' 희생자들도 마찬가지다.

▲ 나치 수용소에서 도랑 파는 일에 동원된 수감자들. 육체노동을 하던 기능공이나 기술자들과 달리 지식인들은 수용소의 힘든 노예노동을 견뎌내기 어려웠다. ⓒ위키미디어

상실감 안기는 의도적 프로그래밍

수용소를 비롯한 수감시설은 우리 인간을 옥죄는 특수한 공간이다. 1980년대 미 사회학회 회장을 지낸 어빙 코프만(펜실베이니아대, 사회학)은 정신병원과 교도소 수감자들과 그들을 관리·감시하는 기관과의 관계를 꼼꼼히 살펴본 연구자다. 일반 사회로부터 격리돼 개인적 자유를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만과 저항이 어떻게 통제되는가에 관심을 쏟은 끝에, 역작 <수용소>(원제목은 Asylums, 1961)를 써냈다(코프만은 1982년 미 사회학회 회장에 오른 바로 뒤 위암으로 타계했다).

수감자는 바깥세계와의 사회적 접촉과 이탈을 막는 장치(높은 벽, 철조망) 안에 갇히고, 수감자의 일상은 모든 면에서 빈틈없이 통제받는다. 그렇기에 수용소는 (코프만의 용어를 빌리자면) '총체적 기관'이다. 이 기관이 잘 돌아가려면 수감자에게 모욕감과 상실감을 안겨주어서라도 순순히 복종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코프만은 이를 '프로그래밍'(programming)이라 했다. 수감자를 '시설 속 행정 기계의 작은 톱니'로 만드는 과정이다.

[입소 과정에서 처음 대면 접촉을 할 때부터 신입은 직원에게 존대를 표해야 한다. 수감자들은 자신들만의 평안함이 영원히 중지되거나 유보해야 한다는 통고를 받는다. 이런 최초의 사회화 과정에서 '복종 테스트'가 따르기도 한다. 반항적인 수감자는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처벌을 받는다. 이 처벌은 그가 공개적으로 "내가 졌다"며 스스로 무릎을 꿇을 때까지 이어진다.](어빙 코프만, <수용소>, 문학과지성사, 2018, 31쪽)

나치의 수용소는 일반 정신병동·교도소의 통제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폭력적인 프로그래밍'으로 악명이 높았다. 지독한 모욕감과 상실감을 안겼고, 밤에 자다가도 놀라 비명을 지를만큼 공포감을 심었다. 어설픈 반항이나 불복종은 곧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곳은 치외법권 지대나 다름없었다. 현장에서 심한 매질을 하거나 권총을 뽑아 죽여도 전혀 문제가 안 됐다. 수용소를 지키는 친위대 소속 병사들은 그냥 넘어가도 될 일에도 트집을 잡아 폭력을 휘둘렀고, 자잘한 규제로 수감자들에게 모욕과 상실감을 안겼다.

프리모 레비 "점호는 수용소의 상징 그 자체"

아침저녁으로 하는 수용소 점호도 굴욕과 무력감을 안겼다. 나치 친위대는 숫자 다섯(5)이나 열(10)을 편리한 셈법으로 여겼다. 전체 수감자를 다섯 명 또는 열 명씩 줄 세웠다. 밤에 막사에서 죽은 사람이 있다면? 시신을 들고 와 땅바닥에 눕혀 숫자 다섯(열)을 채워야했다. 친위대 소속 경비대원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트집을 잡아 폭력을 휘둘렀다. 대열에서 살짝만 어긋나도 군홧발로 정강이를 차 쓰러뜨렸다.

비나 눈이 내려도 점호를 건너뛰는 일은 없었다. 비틀거리거나 기침이나 재채기를 해도 처벌을 받았다.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수감자들은 절망과 더불어 '죽음으로 이 상황을 끝내야겠다'는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점호 때 수감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진 않았다. 그들에게 분명히 이름은 있었지만, 문신으로 새겨진 대여섯 자리의 수감자 등록번호만 있을 뿐 익명의 인간들이었다.

아침 점호 때 숫자가 전날과 다르거나, 저녁 점호 때 아침 숫자와 다르다면 확인이 될 때까지 몇 시간이 걸리더라도 수감자들을 마당에 세워두었다. 점호가 길어지면 한여름의 뙤약볕 무더위도 힘들었지만, 겨울은 더 힘들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해 손을 호주머니에 넣으면 곧바로 폭력이 돌아왔다. 탈출자가 생긴 것으로 의심이 가면 몇 시간 동안이나 점호가 이어졌다. 한여름 무더위와 한겨울 강추위는 가뜩이나 허약해진 수감자들의 생명을 위협했다. 점호를 받다가 기절해 쓰러지고 숨이 끊어지는 이들이 날마다 생겼다.

나치의 입장에서는 인원을 파악하기 위한 필요절차였다고 말하겠지만, 수감자들에게 점호는 곧 고통이었다. 점호가 길어지면 노동 생산성을 떨어뜨리겠지만, 친위대원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점호가 자아내는 고통, '한여름이나 겨울이면 점호 때마다 몇몇은 쓰러져 죽게 만드는' 고통을 놓고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말한다.

[(수감자가 겪는) 그 모든 고통들은 열등한 민족을 노예로 만들거나 제거하겠다는 우월한 민족(독일 아리안족)의 추정적 권리라는 데서 나타난 것들이다. 점호도 바로 그런 것이다. (하루 종일 노예 노동으로 인한) 피로와 굶주림과 좌절감을 그 안에 압축해서 보여주었다. 훗날 우리(홀로코스트 생존자)의 꿈속에서 점호는 수용소의 상징 그 자체가 되었다.](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돌베개, 2014, 139쪽)

수용소 노동력이 남아돌아 수감자들에게 주는 식량을 아껴야겠다거나, 가스실에 더 많은 수감자를 보내 죽여야겠다고 수용소장이 판단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친위대는 전형적으로 아래와 같은 방법을 썼다. 미국인 작가 테렌스 데 프레의 글을 보자.

[나치 수용소에서는 병들거나 지쳐버린 수용자들을 솎아내는 전형적인 수법이 있었다. 수천 명의 병약자들을 겨울 날씨에 옷을 벗겨서 몇 시간이고 밖에 세워두는 게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되면 수감자들은 너무도 철저히 발가벗겨졌기 때문에 '극한 상황에서의 모든 것은 육체의 힘에 달려있다'는 무서운 결론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오로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부, 즉 맨몸뚱이로 부딪쳐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테렌스 데 프레, <생존자>, 서해문집, 2010, 317쪽)

▲ 아우슈비츠에 딸린 여러 하위 수용소 가운데 하나인 보브렉(Bobrek) 수용소에서 지멘스(Siemens)의 항공기 부품을 만드는 수감자들. ⓒU.S. Holocaust Memorial Museum

"저 사람 오래 못갈 것 같아. 다음 차례는 저 사람"

1945년 독일의 패망이 다가오면서 수용소들이 하나둘씩 해방됐다. 그 무렵을 담은 다큐를 보면, 수감자들은 그야말로 여윈 모습들이다. 옛 어른들은 일제 강점기 후반부나 6.25전쟁 무렵 제대로 먹질 못해 여윈 사람들을 가리켜 한문투의 말로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했다'는 말씀들을 하셨다. 나치 수용소에 갇혔던 사람들이 딱 그랬다.

전쟁 후반부에 수용소의 식량 배급은 더욱 형편없어졌다. 하루에 한두 번 묽은 수프와 작은 빵 하나가 주어졌을 뿐이다. 수감자는 하루 내내 주머니 속에 든 빵을 손톱만큼 떼먹으며 굶주림을 견뎌야 했다. 가끔 '특별배급'이란 이름으로 작은 크기의 소시지 또는 치즈 한 조각, 소량의 마가린 또는 잼 한 숟가락 분량이 주어졌다. 하루 종일 중노동을 강요당한 수감자들에게 필요한 칼로리를 보충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양이었다. 굶주림이 이어지면 사망자가 늘어나기 마련이다.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 출신의 아우슈비츠 생존자 빅터 프랭클(1905-1997)의 책(Man's Search for Meaning, 1946년 초판)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마지막 남아 있던 피하지방층이 사라지고, 몸이 해골에 가죽과 넝마를 씌어놓은 것 같이 되었을 때 우리의 몸이 자기 자신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장기관이 자체의 단백질을 소화시키고 몸에서 근육이 사라졌다. 그러자 저항력이 없어졌다. 같은 막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갔다. "저 사람은 오래 못갈 것 같아." "다음 차례는 저 사람이군." 우리는 이렇게 수군거렸다.](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2005, 67-68쪽)

생존확률이 더 높은 '특권자'와 기술자들

수용소에서 오래 버티며 살아남은 '홀코코스트 생존자' 가운데는 막사반장이나 카포(Kapo, 작업반장)를 비롯해 특권적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가혹한 노예노동을 강요당했던 일반 수감자에 견주어 배급 식량을 더 챙길 수 있었고, 게다가 중노동을 덜 했기에 건강을 이어갈 수 있었다. 프리모 레비의 말을 들어보자.

[1944년 아우슈비츠에 오래 수용돼 있던 유대인 수감자들 가운데 번호가 낮은 사람은 15만 명이 조금 안 됐는데, 그 가운데 수백 명만 생존했다. 그 생존자 가운데 일반 수감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의사, 재봉사, 구두수선공, 음악가, 요리사, 매력적인 젊은 동성애자, 수용소 권력자의 친구거나 동향 사람이었다. 또는 카포에 임명되었던, 특별히 잔인하고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사람들이었다.](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돌베개, 2014, 135쪽)

수용소에서 생존 가능성이 높은 이들 가운데 '일반 수감자는 단 한명도 없다'는 프리모 레비의 말은 예외가 있긴 하겠지만, 큰 틀에선 맞는 말이다. 기능공이나 기술자라면 모를까, 손재주가 없는 일반 수감자들은 수용소의 가혹한 노동조건을 견뎌내기 어려웠다(이탈리아 토리노대 화학과를 마친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와 연결된 IG 파르벤에서 합성고무를 만드는 화학기술자로 있었기에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아우슈비츠로 끌려온 지식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직업을 숨기려고 애썼다는 사실이다. <죽음의 수용소>를 쓴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도 아우슈비츠에서 몇 년 동안 토목공사장 인부로 일했다. 왜 그랬을까. 자신이 전문직업인(변호사나 교수 등)이었다고 밝히면, 성격이 포악한 친위대원이나 카포의 시기와 분노를 일으켜 두들겨 맞기 십상이었다.

장 아메리에 따르면, 대학 강단에 섰던 사람에게 직업이 뭐였느냐 물으면 창피하다는 듯이 작은 소리로 '교사'라 답하는 것이 더 안전했다. 변호사는 자신을 '서기'라고 낮춰 말하고, 기자는 '영업사원'이라 속였다. 이들 지식인들은 육체노동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기 때문에 주어진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 얻어맞기 일쑤였다. 끝내는 '노동 부적격'으로 판정 받아 가스실로 끌려갔다(장 아메리, <죄와 속죄의 저편>, 필로소픽, 2022, 30-31쪽).

기능공보다 지식인이 적응 더 힘들어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독일 본토로 진격해 들어간 연합군 병사들은 수용소에서 나치의 적나라한 전쟁범죄 현장을 볼 수 있었다. 미군 병사들의 발길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이 독일 중부의 부헨발트 수용소였다. 현장의 충격적인 참상을 본 미군은 수감자들로 하여금 보고서 초안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독일 정치범으로 1939년부터 수용소 생활을 해온 오이겐 코곤(뮌헨대, 정치학)이 나서서 보고서 작성을 거들었다.

코곤은 유대인 어머니의 혼외자로 태어난 이른바 '절반의 유대인'이다. 뮌헨과 빈의 대학에서 정치경제학과 사회학을 공부했다. 오스트리아에서 10년 동안 가톨릭 계열의 잡지 편집장을 지내면서 나치 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일찍이 '위험인물'로 찍혔다. 전쟁이 터지던 해인 1939년 비밀경찰(게슈타포)에게 붙잡혀 부헨발트 수용소에 갇혔고, 힘들게 6년 동안을 버티다 살아남았다.

코곤은 그런 자신의 수용소 체험을 바탕으로 <The Theory and Practice of Hell>(초판 1950)을 냈다. 여기엔 나치 수용소에서 친위대 병사들이 어떻게 필요 이상으로 수감자들을 닦달하며 자존감을 짓밟았는가를 보여주는, 그야말로 '고전적인' 이야기들이 담겼다. 막사 안 침상을 반듯하게 다듬는 규칙도 그 가운데 하나다.

[침상 정리는 나치 친위대가 부리는 여러 술책 가운데 하나였다. 짚으로 만들어 형체가 안 잡히고 울퉁불퉁한 요를 마치 반듯한 상자 모양처럼 보이도록 정리하도록 강요했고, 이불 무늬는 침대 모서리와 평행을 이루고 베개도 반듯하게 각을 잡아야 했다.](Eugen Kogon, <The Theory and Practice of Hell>, Farrar, Straus and Giroux, 2006, 68쪽)

기능공처럼 손재주가 있지 못한 지식인들이 '반듯한 침상'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그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받았다. 같은 수감자인 막사반장 눈에 침상 정리를 제대로 못 했다거나 마음에 안 들면 욕설에 이어 주먹이 날아들었다. 오스트리아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던 장 아메리의 증언을 들어보자.

[지적인 직업을 가졌던 사람들은 이른바 '침대 쌓기'에도 대체로 허술하고 빈틈을 보였다. 그들은 아침마다 진땀을 흘리면서 짚단이나 이불과 씨름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나중에 작업장에서 돌아올 때 매를 맞거나 급식을 못 받는 처벌을 받지 않을까 강박적인 두려움에 시달렸다.](장 아메리, <죄와 속죄의 저편>, 필로소픽, 2022, 32쪽)

친위대원들은 수감자의 옷매무새가 불량하다고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줄무늬 작업복에서 단추가 없어지면 큰일이었다. 밖에서 일을 하다보면 단추가 떨어져나가는 경우가 흔했다. 수감자가 알아차렸을 때 단추를 되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남의 옷에서 단추를 몰래 떼어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작은 일들로 수감자들의 정신은 육체와 더불어 조금씩 허물어져 갔다. 자신의 불운을 탓하며 삶의 의지를 버리게 되고, 끝내는 '무슬림'이 됐다.

삶을 포기하고 좀비가 된 '무슬림들'

수용소의 명령에 따라 죽어라고 일하고 배급량만을 받아먹는다면, 배고픔과 과로로 3개월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 어느 날 쓰러지고 가스실로 보내졌다. 수용소에선 육체적으로 기력이 다해 죽어가면서도 회생 노력을 포기한 이들을 가리켜 '무슬림'(독일어로는 '무젤만' Muselmann)이라 불렀다. 삶의 희망을 버린 채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이들의 동작은 좀비처럼 굼떴고, 무릎을 제대로 굽히지도 못했다. 저체온으로 몸을 와들와들 떨기도 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아랍인이 기도하는 것 같았기에 '무슬림'이란 별명이 생겼다고 한다.

프리모 레비는 이들 '무슬림'을 가리켜 수용소라는 악마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 죽는 '익사자'(溺死者)라 했다. 수용소에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곧잘 '무슬림'이 됐다. 이들은 좀비 또는 산송장에 가까웠다. 죽음 가까이로 다가가는 '무슬림'을 장 아메리는 이렇게 그렸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동료들에게조차 포기 당한 수감자를 칭하는 수용소 은어인 '무슬림'은 선과 악, 고상한 것과 비천한 것,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이 마주할 수 있는 의식의 공간을 더 이상 갖지 못했다. 그는 아직 움직이는 시체였고, 마지막으로 꿈틀거리는 물리적 기능의 다발이었다.](장 아메리, 41쪽)

무슬림이 아닌 '나'는, 장 아메리에 따르면 굶고 있지만 굶어죽지는 않는, 죽도록 두들겨 맞았지만 완전히 뻗어버린 것은 아닌, 상처를 입었지만 목숨을 잃을 정도는 아닌, 아직 정신이 남아있는 수감자다. '나'는 '무슬림'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누군가가 극한의 고통을 받거나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무거워지기 마련이다. 나치 수용소에선 고통이나 죽음이 너무나 일상적이다. 모두가 힘든 상황이어서, 삶을 포기한 듯한 '무슬림'의 모습을 덤덤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수용소 당국의 눈길로 보면, '무슬림'들은 끊임없이 열차로 실려와 앞서 죽은 이들의 자리를 채우고, 두세 달 동안 힘들게 노동을 하다가 어느 날 쓰러지는 '익명의 인간'들이었다. '무슬림'은 수용소를 잠간 들른 것뿐이었다. 길어야 서너 달 뒤 한줌의 재로 바뀌고 수용소의 기록부의 수감자 번호 옆에 X표가 적히고 잊혀졌다.

이렇듯 수감자들은 나치가 만들어 놓은 '죽음의 동물원' 안에 갇혀 노예노동을 하는 '하찮은 동물'이 됐다가 기력이 다해 죽었다. 많이 배웠건 덜 배웠든, 돈이 많든 적든, 사회적 신분이나 교양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수용소라는 거대한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간 수감자들은 하나둘씩 희생됐다. 나치는 강도 높은 노동과 되풀이되는 폭력으로 수감자들이 저마다 지녔을 삶의 의지와 자존감을 파괴해버리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야만과 광기가 지배하면서 수용소는 '죽음의 땅'으로 바뀌어 갔다.

▲ 1936년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에 동원된 수감자들. ⓒ위키미디어

폴란드 여성이 간파한 나치의 속셈

아우슈비츠에선 수감자가 삶을 포기한 '무슬림'과는 달리 자신의 건강을 지키려 해도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물을 마시기 어려웠고 깨끗하지도 않았다. 더러운 물을 마시고 수감자들은 늘 설사에 시달렸다. 화장실은 그래서 늘 지저분했고 오물이 넘쳤다. 알고 보면 이런 불결한 환경에는 나치의 의도적인 계산이 숨어 있었다. 수감자를 동물처럼 비인간화시켜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끝내는 건강을 잃게 만들어 죽음으로 몰고 가는 가혹행위였다. 아우슈비츠에서 20개월을 보낸 한 폴란드 여성 유대인 수감자의 비판을 읽어보자.

[숙소, 도랑, 진흙탕, 막사 뒤의 배설물 더미 등 끔찍한 오물들은 (신입자인)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러다 곧 왜 그런가 알게 됐다. 그것은 혼란이나 무질서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는 매우 철저하게 계산된 고의가 깔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치는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오물과 배설물에 빠져 죽게 만들려 했다. 그들은 우리를 비하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인간성의 모든 흔적을 없애고, 짐승 수준으로 되돌려 놓으려 했다.](Pelagia Lewinska, <Twenty Months at Auschwitz>, Lyle Stuart, 1968, 41-42쪽)

이 글을 쓴 펠라기아 르윈스카(1907-2004)는 폴란드 노동자당(PPR) 간부로, 전쟁 뒤 국회의원을 지낸 여성 정치인이다.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에 많은 수감자들이 절망하기 마련이었지만, 강철 의지를 지닌 르윈스카는 달랐다. '여기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명령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만약에 아우슈비츠에서 죽는다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며 죽으리라 마음을 다졌다. 나치가 바라는 '경멸스럽고 역겨운 짐승(contemptible, disgusting brute)'이 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고, 끝내 살아남았다. 그렇지 못했다면? 르윈스카는 '무슬림'으로 숨졌을 것이다.

오늘 글에선 수용소에서 지식인들이 다른 수감자들보다 적응이 훨씬 어려웠다는 점을 살펴봤다. 아울러, 작업반장(Kapo)과 같은 특권적 지위를 누린 자가 아니라면, 삶의 의지를 굳게 지니지 못한 이들이 결국은 홀로코스트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짚었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 아니지만, 나치 독일은 20세기 전반기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위안소(Bordell)'를 운영했다. 수용소에 갇힌 여성들을 '성노예'로 삼고 그들의 인권을 침해했다. 다음 주에는 성 착취 문제를 비롯해 수용소 여성들이 겪은 고난을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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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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