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 수괴' 윤석열에게 구속영장이 나온 날 밤 서부지법을 습격해 난장판으로 만든 1.19 사건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언론 매체들은 그 사건을 가리켜 '서부지법 폭동사태' 또는 '서부지법 난동' 등으로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폭동(난동)을 부린 사람들을 뭐라고 불러야 마땅할까. 서부지법 안으로 들어가 기물을 부순 자들은 서로를 '영웅'이라 치켜세웠다. 민주적 헌정 질서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그들을 '폭도'라 부르기 마련이다.
'영웅'이냐, 폭민(暴民)이냐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를 거쳐 1941년 어렵사리 미국으로 건너가 목숨을 건졌던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폭도'를 뭐라 불렀을까. 아렌트는 역작(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에서 'mob'라는 용어를 썼다. 우리말 번역본은 mob를 '폭민'(暴民)이라 옮겼다.
[폭민은 일차적으로 각 계급의 낙오자들을 대표하는 집단이다. 국민이 모든 혁명에서 진정한 대의제를 위해 투쟁했다면, 폭민은 항상 '강한 자', '위대한 지도자'를 소리 높여 외친다.폭민은 자신을 소외시킨 사회를 증오하며, 자신을 대변해주지 않는 의회 역시 증오하기 때문이다](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 한길사, 2006, 249쪽).
아렌트의 분석에 따르면, '폭민'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국민'과 다르다(아렌트의 원서에는 'people'로 돼 있으니, '국민'보다는 '인민' 또는 이즈음 용어로 '시민'이 더 적절한 번역이 아닐까 싶다). 각박한 경쟁사회에서 스스로를 낙오자라 여기는 '폭민'은 자신이 놓인 현실에 불만을 지니기 마련이다.
아렌트는 폭민을 '낙오자'라 불렀지만, 다 그렇진 않을 테고 (이를테면, 서부지법 난동자들 가운데는) 나름의 안정된 직업을 지닌 이른바 '확신범'도 섞여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강한 자'(이를테면 히틀러, 트럼프, 윤석열)가 그럴듯한 선동 발언으로 공격 목표를 가리키면, '폭민'은 앞뒤 가리지 않고 거친 행동에 나선다고 봤다.
역사상 그런 사례는 차고 넘친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도 그랬고, 19세기 말 프랑스에선 '독일 첩자'로 몰린 유대인 포병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1859-1935)가, 20세기 중반엔 (1938년 11월9일 밤 독일 곳곳에서 파괴와 약탈이 일어났던 '수정의 밤'처럼) 유대인들이, 21세기엔 미 국회의사당(2021년 1월6일)과 한국 법원(2025년 1월19일)이 폭도들의 공격 목표가 됐다.
선동을 주제로 한 지난 글(연재 101)에서 살펴봤듯이, 히틀러는 일찍이 '선전은 지적 수준이 낮은 이들의 감정에 맞춰져야 한다'고 말했다. 나치 선동가들은 거리의 군중에게 "유대인에게 죽음을!"이라 외치면, 그들은 거친 행동으로 화답하면서 '폭민'이 됐다. 대선에서 진 트럼프 후보는 흥분한 상태에서 이성적 판단 능력이 떨어진 극렬 지지자들에게 "내 표가 도둑맞았다"는 거짓말을 쏟아내면서 선동을 부추겼다. 안타깝게도 부정선거 음모론이 나도는 지금의 한국 상황이 딱 그렇다. '계엄이 아니라 계몽'이라는 궤변이 '아스팔트 지지자들' 사이에 힘을 얻는 모습을 훗날 역사가들은 어떻게 기록할까.
독일 기업의 아리안화
히틀러가 '폭민'들을 부추겨 유대인들을 탄압할 때 뒤에서 뒷짐을 지고 느긋이 바라본 독일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이들 가운데 기업가들을 빼놓을 수 없다. 나치 정권은 유대인의 기업 소유를 막는 이른바 '독일 기업의 아리안화(Arisierung)'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는 독일의 오랜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Rothschild, 독일 발음으론 '로트쉴트')를 비롯한 유대인 자본가들의 파산을 뜻했다.
히틀러의 전쟁으로 재산상의 이득을 챙긴 자들은 한둘 아니다. 초점은 누가 얼마나 많은 이득을 봤느냐다. 유대인들이 트렁크 하나만 든 채 게토나 수용소로 떠나자 그들이 비운 집과 가구들을 차지하고 기뻐한 독일의 보통사람들도 있고, 유대인들에게서 빼앗은 모피 코트나 보석이 경매로 나올 때 "싸게 건졌다"고 좋아했던 숙녀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보다 훨씬 큰 이득을 챙긴 자들은 독일 기업인들과 은행가들이었다.
유대계 자본가들은 자신의 기업들을 매각하도록 강요받았다. 이에 맞서 노골적으로 불평을 하면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마지못해 '시장'에 나온 유대계 기업들을 독일인 자본가들은 헐값에 사들여 큰 이득을 챙겼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라울 힐베르크가 그의 역작(The Destruction of European Jews, 초판 1961, 개정판 2003)에서 정리한 글을 보자.
[아리안화 과정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독일 경제계가 수많은 유대기업들을 삼켰을 뿐 아니라 유대기업의 강제퇴출에서도 이득을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거둔 이득의 규모를 보여주는 전체적인 통계 자료는 없다. 우리는 다만 유대기업의 인수자가 기업 가치의 75% 이상을 지불하는 경우는 드물었으며, 50% 이하를 지불하는 인수자는 꽤 많았다는 사실만을 안다. 우리는 또한 유대기업의 퇴출에서 이득을 본 독일 기업이 (신규)투자를 거의 혹은 아예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안다. 따라서 독일 경제계의 이득은 수십 억 마르크에 이르렀을 것이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1>, 개마고원, 2008, 195-196쪽).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점령지역이 넓어지자, 나치와의 '더러운 거래'를 통해 떼돈을 벌었다. 강제수용소 가까이에 공장을 세워, 수감자들을 노예노동으로 부려먹었다. 캐나다 출신의 역사학자 자크 파월은 독일 대기업․은행과 나치 정권의 유착을 비판적으로 따져본 연구자다. 우리말로 번역된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The Myth of Good War, 2002)의 필자이기도 하다. 파월의 문제작(Big Business and Hitler, 2017)에서 노예노동의 통계를 보자.
[독일 안에서만 1,200만에서 1,300만, 많게는 1,400만 명쯤의 (독일 점령지에서 데려온) 강제노동자가 전쟁 기간 동안 나치 정권에 착취당한 것으로 추산된다. 점령국까지 모두 합치면 적어도 3,600만 명이 어떠한 형태로든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자크 파월,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 오월의봄, 2019, 127쪽).
히틀러 돈줄이 된 거액의 '기부금'
나치 히틀러의 제3제국은 출발부터 정경유착이 뿌리를 내렸다.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말자 돈벼락을 맞았다. 독일의 주요기업들과 은행이 모여 만든 독일제국산업협회, 독일기업가협회 회원 기업들은 기꺼이 돈을 모아 히틀러와 나치당에 바쳤다. '기부'를 받은 히틀러는 반대급부로 이런저런 특혜를 주었다. 독일 언론인 귀도 크놉이 히틀러의 충견(忠犬)들을 다룬 책(Hitlers Helfer, 1998)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글 아래에서 살펴보듯이, 독일 패전 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기소되었으나 몸이 아파 풀려난 뒤 사망한) 구스타프 크루프의 발의로 '독일경제 아돌프 히틀러 기부금'이 조성되었고, 히틀러는 용도를 밝힐 필요가 없이 단번에 1억 라이히마르크의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독일제국산업협회는 이런 거액의 선물을 제공함으로써 신임 제국수상에게 계속해서 기부금을 받고자 한다면, 경제단체에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는 암시를 주려 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히틀러의 예금 계좌로 적어도 3억 500만 라이히르크가 흘러들어갔다. 권력을 탈취한 뒤 히틀러는 부유한 사람이 됐다](귀도 크놉,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 히틀러의 조력자들>, 울력, 2011, 226-227쪽).
예나 지금이나 비자금 관리자는 권력자의 최측근이 맡기 마련이다. '히틀러 비자금 관리인'은 그의 충직한 비서실장 마르틴 보어만이었다(1945년 패전 뒤 도망치다 사망 추정.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엔 사망 사실이 확인 안 돼 궐석으로 교수형 선고). 보어만 말고 어느 누구도 '기부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 수 없었다. 히틀러가 어떤 일로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보어만은 곧바로 돈을 건넸다. 그 가운데 일부는 히틀러의 애인 에바 브라운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는 데 쓰였다.
정경유착은 여러 경로로 이뤄졌다. 독일 기업인들은 나치당과의 관계를 두텁게 하려고 만든 '경제의 친교모임'(Freundeskreis der Wirtschaft)의 주요 회원들이었다. 히틀러의 경제 고문인 빌헬름 케플러가 모임을 이끌어나갔기에 '케플러 서클'(Keppler Circle)'이라고도 불렸다. 모임의 다른 이름이 '친위대 국가지도자 친교모임'이라고도 알려졌듯이, 나치 당과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의 돈줄이 됐다.
[쾰른에 근거를 둔 은행가 폰 슈뢰더는 자신의 은행에 '특별계좌 S'라 불린 계좌를 관리했는데, 이 계좌로 친교모임 회원들이 각각 해마다 100만 라이히마르크를 예치했다. 힘러는 이 기금을 자신과 친위대, 그리고 나치당이 관심을 갖는 사업을 진행하는 데 사용했다. 몇몇 추산에 따르면, 1933년에서 1945년 사이 독일 재계가 나치당에 후원한 금액은 7억 라이히마르크에 이른다](자크 파월, 104쪽).
히틀러와 힘러를 비롯한 나치 지도자들은 '기부금'을 비자금으로 관리하면서 필요에 따라 나치 정당, 돌격대, 친위대 등에게 나눠줬다. 독일 기업인들의 통 큰 후원 덕에 재정문제에 대해 히틀러가 품었던 초기의 우려는 말 그대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진정한 전범은 나치가 아니라 독일 기업들"
우리가 흔히 '나치'라 부르는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약칭 NSDAP) 이름 안에는 민족, 사회주의, 노동자가 섞여 있지만 그야말로 겉치레였다. 히틀러가 말하는 '사회주의'는 정치학 교과서에서 말하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반(反)사회주의적이고 반노동자 쪽이다. 히틀러는 권력을 잡은 3개월 뒤인 1933년 5월2일, 노동조합들을 강제 해산하고 많은 노동운동가들을 감옥에 잡아넣었다. 그리곤 어용 단체로 '독일노동전선'을 만들어 '파업 없는 독일'을 선언했다. 독일 대기업인과 은행가들이 히틀러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다.
"어디선가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고, 한번 터진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길 해달라"고 기도하는 목사가 바로 '전쟁상인'들이다. 이른바 '전쟁 특수(特需)'는 어느 나라에서든 탐욕스런 기업인들이 바라는 바다. 나치 독일의 경우도 그랬다. 자크 파월에 따르면, 독일 기업인들이 히틀러를 지지한 또 다른 이유는 '히틀러가 주전론자(主戰論者)여서 언젠가는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라 했다. 파월은 자본의 잣대로 독일의 침략전쟁을 바라본다.
[독일 기업인들은 히틀러가 전쟁을 준비하고 일으키도록 도왔고, 그렇게 함으로써 상당한 이득을 보았다. 히틀러의 전쟁은 그들의 전쟁이기도 했다. 그의 승리와 정복은 그들의 승리와 정복이기도 했다](자크 파월, 124-125쪽).
파월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미국인 검사 텔퍼드 테일러가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진정한 전범은 미치광이 집단 나치가 아니라 기업들'이라고 주장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도 했다(자크 파월, 136쪽). 다른 나치 독일 연구자들도 같은 맥락의 분석을 내놓았다.
[독일 역사학자 울리케 히르스터-필립스도 거의 비슷한 주장을 펼친다. "나치의 전쟁이 목표로 했던 것은 독일 대자본가들의 이익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제3제국 전시경제 분야의 전문가인 디트리히 아이이홀츠도 같은 견해를 드러냈다. "히틀러의 전쟁계획에는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이미 수십 년 동안 알려져 있던 독일 거대자본의 목표와 꿈이 반영되었다"](자크 파월, 126쪽).
위 옮긴 글 끝에 나오는 '독일 거대자본의 목표와 꿈'은 유럽 전역을 아우르는 대경제권을 가리킨다. 독일이 이끄는 유럽 대경제권에서 독일 기업과 은행들은 나치의 특혜 지원을 받아 경쟁자들을 없애고 높은 수익성을 올릴 수 있게 되길 바랐다(실제로 전쟁 초기 독일이 잇단 승리를 거둘 때 독일 기업들은 오스트리아나 체코 등지에서 광산, 제철소, 은행 등을 재빨리 가로챘다). 그 목표를 이루려면 침략전쟁과 약탈, 그리고 노예노동이 받쳐줘야 했다.
노예노동자 착취한 나치 기업인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12개 후속재판 가운데 침략전쟁에 관련된 기업인 재판은 3개였다. △프리드리히 플리크와 그의 기업 임원 5인을 단죄한 '플리크 재판'(후속재판 5), △유대인과 포로 등 수감자들을 집단 학살했던 독가스 치클론 B를 생산한 화공 복합기업 IG 파르벤 이사진을 단죄한 'IG 파르벤 재판'(후속재판 6), △크루프 사주와 이사진 12인을 단죄한 '크루프 재판'(후속재판 10) 등이다.
이들 3개의 후속재판에서 피고인들은 △군수산업을 운영하면서 독일군을 재무장시켰고, △나치의 침략전쟁을 거들었을 뿐만 아니라,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소련군 포로, 정치범, 유대인)을 노예노동으로 혹사시켜 이득을 챙겼다는 혐의를 받았다. 법정에 선 피고인들은 한결같이 '무죄'를 주장했다. 한밤중에 감방에 누워 지난날 자신들이 저질렀던 반인도적 범죄를 떠올린다면, 스스로도 민망해서 얼굴이나 귓불이 붉어졌을 법하다. 이들 나치 기업인들에겐 교수형이나 종신형은 내려지지 않았다. 죗값에 견주어 싸다는 지적을 받았는데도, 이들 나치 기업인들은 모두 얼마 안가 풀려났다.
흔히 '플리크 재판'으로 알려진 '후속재판 5'는 '플리크 KG'의 고위직 이사 5명을 피고인으로 세운 재판이다. 프리드리히 플리크(1883–1972)는 히틀러는 물론 친위대사령관 힘러에게 '기부'를 하고 그 대가로 배를 불린 전형적인 정경유착 기업인이다. 플리크 KG의 주력 업종은 탄광, 제철소, 군수 공장이었다. 나치 독일의 재무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군수 부문에서 히틀러의 침략전쟁을 받쳐줬다. 이 과정에서 플리크 KG는 광산과 군수공장에서 48,000명의 노예 노동자를 부려먹었다. 그들은 점령지 민간인(유대인 포함)과 소련군 전쟁포로였다. 힘든 노동에 부실한 식사와 비위생적 환경은 80% 넘는 높은 사망률을 낳았다고 알려진다.
1947년 4월부터 12월 말까지 이어졌던 재판에서 플리크 KG의 소유주 프리드리히 플리크에겐 7년 징역형이 내려졌다. 고위직 이사인 오토 슈타인브린크는 징역 5년(수감 중이던 1949년 8월 병으로 사망), 베른하르트 바이스는 징역 2년 6개월, 나머지 3명은 무죄로 풀려났다. 플리크를 비롯해 유기징역형을 받은 이들은 1950년 8월까지 모두 풀려났다. 죄는 무거웠지만 처벌은 가벼웠다. 풀려난 플리크는 그의 산업제국을 빠르게 넓혀 나갔다. 1950년대의 서독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재산가로 꼽혔다. 1972년 그가 숨질 무렵 플리크 KG는 330개의 회사와 30만 명의 직원을 거느렸다(1985년 자본 분산과 매각으로 해체).
죽음의 독가스 치클론 B 공급
독가스 치클론 B(Zyklon B)가 나치의 대량학살 수단으로 쓰인 것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시안화수소를 주성분으로 한 치클론 B는 작은 알갱이 분말 형태로 깡통에 밀폐 보관돼 있다가 뚜껑을 열면 곧 공기 속으로 퍼지는 화학제품이다. 체중 60kg인 인간이 60mg(1kg에 1mg)을 들이키면 숨지는 강력한 독성을 지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에 치클론 B를 대량 공급한 독일 대기업 IG 파르벤(연합화학) 경영자들을 단죄한 것이 뉘른베르크 후속재판 가운데 6번째 재판이다. IG 파르벤이 나치에 제공한 치클론 B 독가스 때문에 수백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을 포함한 민간인, 소련군 포로, 사회주의자, 집시(로마족, 샨티족), 동성애자, 반나치 저항운동가가 치클론 B 가스를 들이키고 고통스레 죽어갔다.
지난 글에서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기동학살부대)가 유대인 130만을 포함한 200만 명을 집단학살했다는 사실을 짚어봤다(연재 94). 살아 숨 쉬는 사람을 마주보고 총을 쏜다는 것은 제아무리 살인에 익숙해진 대원이라 하더라도 정신적 피로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치클론 B는 깡통을 따서 분말을 가스관에 쏟아 부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학살자들에게 치클론 B는 손쉬운 대안이었다. 하지만 죽은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르다. 차라리 총을 한방 맞고 죽는 게 덜 고통스러웠다. 치클론 B 가스를 마신 사람이 곧바로 죽지 않았다. 15분 정도 걸렸다. 그동안 희생자들은 엄청난 고통을 느껴야 했다. 벽을 손톱에서 피가 나도록 긁은 흔적들이 고통의 정도를 말해준다.
집단학살의 지휘한 나치 친위대(SS)는 치클론을 자체적으로 생산하지 않았다. '해충 박멸'에 쓰이는 독극물 생산으로 특화된 독일 IG 파르벤(연합화학)과 데구사(Degussa), 골트슈미트 3개 회사가 카르텔을 이룬 데게슈(이사회 의장은 IG 파르벤 소속인 빌헬름 만)를 거쳐 치클론을 구입했다.
IG 파르벤(연합화학)의 전쟁범죄 목록을 길다.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서의 패배(1943년 2월) 뒤 전쟁 후반기에 독일이 석유를 비롯한 에너지원이 부족해지자, 석탄에서 가솔린과 고무를 합성해 빼내는 공정을 개발해 히틀러의 침략전쟁을 도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옆에 부나베르크라는 이름의 거대한 공장을 세운 뒤 수용소 수감자들에게 '합성고무를 만들어내라'며 노예노동을 강요하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다.
1947년 8월부터 1948년 7월까지 이어진 IG 파르벤 재판은 24명의 피고 가운데 13명이 8년에서 1년 6개월 사이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10명은 무죄, IG 파르벤의 수석 법률고문은 병으로 재판 중 풀려남). 이들이 지은 무거운 죄에 견주어 가벼운 유기징역을 받았고 그마저도 형기를 다 채우지 않았다. '악마의 화학기술자'로 징역 8년형을 받은 IG 파르벤 중역 오토 암브로스(1901-1990)마저 1951년에 풀려났다. 그는 미 육군 화학단, 다우케미칼과 같은 화학 관련 조직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90세까지 살았다.
'유대인은 기생충'이라 한 히틀러, 살충제로 죽였다
치클론 B는 애당초 살충제로 개발됐으나 나치는 사람을 죽이는 '악마의 무기'로 바꾸었다. 집단학살의 주역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나 연설문에서 걸핏하면 유대인을 '해충' 또는 숙주(宿主)인 독일인에 기대어 사는 '기생충'으로 낙인찍곤 했다.
[유대인은 언제나 다른 민족의 체내에 사는 기생충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자기번식은 모든 기생충의 전형적인 현상이며, 그들은 언제나 자기 인종을 위해서 새로운 숙주를 찾고 있다. 그들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머잖아 숙주 민족은 없어져 버린다](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동서문화사, 2014, 436-437쪽).
히틀러의 비뚤어진 인종주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위 옮긴 글에서 '머잖아 숙주 민족은 없어져 버린다'는 히틀러의 지적만큼은 틀리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20세기 초만 해도 소수자였던 유대인들이 20세기 중반 아랍 원주민들을 몰아내 난민으로 만든 것을 보면 그렇다. 이 글의 초점은 나치가 유대인 학살에 살충제인 치클론을 이용함으로써 그들의 인종차별적 망상을 이뤘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라울 힐베르크의 글을 보자.
[그들(IG 파르벤)이 수십만 명의 유대인을 죽이는 작전에 연루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독일에서 만든 선전물에서 유대인은 빈번히 해충으로 묘사되었다. 한스 프랑크(독일점령지인 폴란드 총독)와 하인리히 힘러(친위대사령관)는 '유대인이 해충처럼 박멸되어야 하는 기생충'이라고 거듭해서 강조했다. 아우슈비츠에 치클론이 투입됨으로써 그런 발상이 현실이 됐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2>, 개마고원, 2008, 1246쪽).
크루프(Krupp) 재판, "나는 기업인일뿐 정치는 몰라"
크루프(Krupp)는 19세기 중반 세계 최초로 강철제 대포를 만든 독일의 주요 군수업체였다. 영국 런던에서 열린 제1회 만국박람회(엑스포, 1851)에 대포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1930년대 히틀러가 독일군의 재무장과 침략전쟁을 준비하면서 크루프는 매출을 크게 올렸다. 전쟁 중에도 각종 탱크와 대공포, 열차포, 유보트 등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2만 3,000명의 전쟁 포로를 포함한 10만 명 이상을 노예 노동으로 부려먹었다.
히틀러 시대의 크루프는 전형적인 정경유착의 모습을 보였다. 그 기업의 소유주 구스타프 크루프는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독일기업가협회장 자격으로 편지를 보냈다. "독일 기업인들은 제국 정부의 어려운 임무를 돕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뒤 거액의 정치헌금으로 내놓았다. 크루프를 비롯한 독일 기업들은 반대급부로 나치의 주요 국책사업에서 특혜를 누렸다.
패전 뒤 구스타프 크루프는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주요전범들을 단죄한 1945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기소되었다. 하지만 몸이 좋이 않아 풀려난 뒤 곧 죽었다. 1947년 12월부터 1948년 7월까지 이어진 나치 기업인 재판(후속재판 10)에선 구스타프의 아들 알프리드 크루프가 피고석에 섰다. 알프리드는 "나는 기업인일뿐 정치는 모른다"며 무죄를 주장했지만, 징역 12년형에 재산 몰수형이 매겨졌다. 함께 기소된 크루프 이사진 10명도 3년에서 12년 사이의 징역형을 받았다. 하지만 실제로 감옥에서 보낸 기간은 짧았다. 3년 뒤인 1951년 사면령이 내려져 풀려났고, 압류됐던 크루프 기업마저 알프리드에게 되돌아갔다. 이렇듯 나치 기업인 처벌은 솜방망이로 마무리됐다.
"한국 문제로 바빠서 훨씬 친절해졌다"
전쟁연구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가리켜 '히틀러의 전쟁'이라 일컫는다. 전쟁을 일으킨 것도 히틀러가 맞다. 많은 사람들을 죽고 다치게 만든 장본인도 히틀러였다. 하지만 여기엔 묘한 논리가 스며있다. 히틀러와 그의 악당들이 전쟁의 책임을 지고 죽었으니 그걸로 끝이라는 논리다. 나머지 독일인들은 히틀러 때문에 전쟁에 마지못해 끼어들었으니 면죄부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이 패망한 뒤 염치없는 독일 기업인들도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에 미국이 거들었다. 든든한 동맹국 서독의 경제를 부흥시키고 독일군을 재조직해서 소련을 견제하려 했던 미국은 나치 기업인들에겐 '자유'라는 선물을 안겼다. 동서 대결구도 아래 터진 1950년 한국전쟁도 영향을 끼쳤다. 7년형을 선고받았던 프리츠 메어(IG 파르벤 임원)은 1950년 여름 감옥을 나서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국인들이 요즘 한국 문제로 바빠서 훨씬 친절한 거야'(라울 힐베르크, 1513쪽).
글을 매듭짓자면, 나치 기업들이 저질렀던 죄의 무게에 견주어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전쟁이 히틀러의 패배로 끝나자, 독일 기업인들은 그 패배가 자신들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것을 피해갔다. 처벌을 받은 것은 극히 일부 기업인들뿐이었다. 그나마 솜방망이였다. 동서 냉전의 흐름을 타고 전범 기업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돈벌이에 나섰다. 히틀러와 힘러를 비롯한 '골수 나치'들은 죽었지만, '히틀러의 자본가들'은 살아남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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