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야!" 왕할망이 자다말고 또 소리를 질렀다. 자지러지게 울면서 숨넘어갈 듯 어멍을 불러댔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왕할망에게도 엄마가 있었다는 걸 매번 뒤늦게 깨닫는다. "몰라요 순사님.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난 빨갱이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왕할망이 겁에 질려 애쓰는 소리가 온 집 안에 퍼진다. 순사님? 빨갱이? 그게 뭘까?"
동화책 <동백꽃, 울다>(윤소희 글, 배중열 그림. 풀빛 펴냄)는 제주에 사는 12세 소녀 지서현의 시점에서 쓰여진, '어린이 독자의 눈높이를 고려하고 난도를 조절해서 담아낸 역사 동화'다. 동화는 어느덧 구순 노인이 된 왕할망이 겪는 고통과, 그가 10대 소녀로서 겪었던 4.3의 경험을 교차로 직조한다.
주인공 소녀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즉 외외조모), '왕할망' 고길녕은 4.3 생존자다. 왕할망은 밤마다 악몽을 꾸며 고통스러워하지만, 증손녀의 권유로 그림 교실에 다니며 마음의 응어리를 점차 풀게 된다. 할머니는 그리운 부모의 모습, 마음 속에 아직 생생한 소녀 시절의 기억들을 그림으로 옮겨내고, 그 과정에서 증손녀에게 자신이 겪은 4.3을 이야기로 들려준다. 그 결과 왕할망은 더 이상 자다가 비명을 지르게 되지 않게 된다.
4.3 등의 참담한 사건을 대할 때, 물론 중요한 것은 '올바름' 곧 정의(正義)이지만 동시에 '치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치유는 정의로운 접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때문에 한국사회 일각의 역사 왜곡 시도에 대응하는 일과, 피해자들의 상처를 보듬는 일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일본의 배상금'이 아닌 한국 정부·기업의 돈을 건네면서 치유를 논할 수 없는 이유다.
동화 작가는 '왕어멍의 어멍'의 입을 빌려 "잘못한 사람은 경찰들밖에 없다"고, 또다른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더는 미군정한테 당하고만 살 수 없다! 제주사람 전체를 다 빨갱이라고 하면서 잡아가고 못살게 구는데 도리가 없잖아"라고 4.3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면서도, 그 이후의 전개 과정에서 "무장대니 토벌대니 기릴 것 없이 들이닥쳐 사람들을 잡아가고 죽이고 마을마다 새카맣게 불까지지를 줄은 몰랐다", "제주 사람들한테는 토벌대 순사들이나 무장대나 전부 다 똑같은 살인자들"이라는 점도 솔직히 지적한다.
지난 3일 4.3문학회가 펴낸 <골아보카> 창간호(4.3문학회, 아마존의나비 펴냄. '골아보카'는 '말해볼까'의 제주방언)에 재게재된, 4.3 생존자 고(故) 장동석 선생의 1993년 <신동아> 논픽션 공모수상작 '수난의 족청 시절'에도 이런 증언이 나온다.
"양쪽 세력이 대등해, 여기도 무섭고 저기도 무서운 세상이었다. 흙 파먹고 사는 농촌에 그 무슨 사상이 필요 있고 적이 필요하랴. (그런데도) 낮에는 군경에게, 밤에는 산의 공비들에게 시달려야 하는 것이 그즈음 농촌의 참상이었다."
4.3문학회는 젊은 문인들을 포함한 회원들이 직간접적으로 경함한 4.3의 역사를 문집의 '4.3과 나'라는 장(章)에 모았다. 한경희 4.3문학회 총무는 창간호 게재글에서 "몇 년 전부터 미술심리상담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며 "이 과정을 공부하면서 구술채록을 위해 만난 여러 유족 어르신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고 했다. 동화책의 '왕할망'은 픽션이지만 픽션이 아닌 것이다.
골목마다 온통 눈이 하얗게 쌀이고 휘영청 보름달이 환하던 무자년 겨울밤, 불에 타는 마을을 뒤로하고 누나 손잡고 막냇동생을 업은 어머니를 뒤따라가다 결국 어머니와 헤어지게 됐는대 다음날 아침 어머니와 갓난아기였던 막냇동생이 흰 눈 위에 선명한 핏자국을 남기고 죽은 채 누워 있었다고 말하며 눈시울이 붉어지던 팔십 넘은 어르신은 무자년 겨율 여섯 살 아이로 돌아가 있었다. (한경희)
피는 꽃이 무엇이든 다 나의 꽃인 줄 안다 / 봄꽃처럼 피던 겨울날 붉은 동백꽃들이 / 느닷없이 빨갱이 이름 붙여져 목 떨어지고 / 영문 모르고 혼자 살아남은 어린아이가 / 백발이 되어 맞이하는 봄이 / 우리가 만나는 봄과 같은 줄 알았던가 (이광용. 문집 개제 시 '동백이 찾아가다 잃어버린 봄')
학살은 오래 상처로 남았다. 4.3문학회 회원 양영심은 어렸을 적 어머니가 "오라리 쪽 하늘이 막 벌겅하게 큰불이 난거라. 집집마다 불을 질렀젠. 굉장허였주"라고 말했던 기억을 되새기는 한편 "어릴적 아이들 놀이 중에 '폭도 순경'이라는 놀이가 있었다. (…)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놀이는 아마 제주도에나 있음직한 놀이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양영심의 설명을 들어보면, 이 놀이의 규칙은 타지에서는 '숨바꼭질'이라고 부르는 놀이와 닮았다.
양영심은 그러면서 "4.3 특별법이 만들어졌지만 치유와 화해라는 과제는 여전히 무겁고 먼 일인것 같다. 세상이 발전한다길래 평화를 기대했더니 오히려 대립과 불화를 부추기는 사회가 돼가는것만 같다"고 탄식하며 "근래에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와 이승만 동상 건립 움직임 등 정권이 역사를 바꿔놓으려 하고 있다. 심지어 제주에서조차 서북청년단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이들이 출몰한다 하니 참으로 우려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우연일까. T.S.엘리엇이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한 것은 아니겠지만, 4.3이 지나고 2주일도 지나지 않아 4.16 세월호 참사 주기가 다가온다. 이들도 제주로 가던 배 안에서 스러졌다.
작가 김경희는 지난 1일 출간된 세월호참사 10주기 기억 에세이 <월간 십육일>(4.16재단 엮음, 사계절 펴냄)에 실린 글에서 4.3과 4.16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김경희는 "다른 듯 닮아있는 아픔의 역사를 다시 마주해야 한다"며 "유족들과 함께, 안타깝게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절절한 이름들을 불러주고, 가슴저미던 사연들을 오래오래 듣고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라고 지적했다.
또 4.3 생존자 '왕할망'이 평생 악몽을 꿔왔듯, "세월호 가족들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자식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꾼다. 아직도 매일 사랑한다."(정혜윤 PD의 에세이)
<월간 십육일>은 4.16재단이 엮어낸 에세이집으로, 2020년 6월 16일부터 매월 16일 4.16 재단 홈페이지에 연재해온 '월간 십육일' 에세이 중 50편을 추려 담았다. 다만 앞서 인용한 정혜윤 PD의 글은 아직 홈페이지에 올라오지 않은 미게재분(2024.8.16 게재예정)이다. 정PD의 글뿐 아니라 올해 10월 연재 예정분까지 미리 실렸다.
지난 2021년 4월 16일분 연재 에세이에서, 소설가 김애란은 스러진 이들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며 이들이 겪지 못한 세월을 상상한다. "만약 살아 있다면 올해 스물 네 살이 됐을 아이들"인 단원고 학생들을 떠올리며 김애란은 "스물 네 살 나는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잠 못 이뤘다. 버스정류소에서 연인과 헤어질 때마다 항상 그가 다음 버스를 타기 바랐다. (…)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립스틱을 선물받았다. 여름에는 친구들과 팥빙수를 먹고, 비오는 날에는 부대찌개를 사먹었다. 취업 생각에 가끔 가슴이 어둑해졌지만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맡는 비 냄새, 교정의 풀냄새가 가끔 더 큰 실감으로 다가왔다"는 자신의 스물 네 살을 떠올린다.
세월호 승무원 고 박지영 씨는 2021년이면 스물아홉이 됐을 터였다. 2016년 떠난 잠수사 고 김관홍 씨는 48세가 됐을 터였다. 김애란은 "스물아홉에 나는 은행에서 처음 대출상담을 받았다", "자매의 신혼집에 화분을 사 들고 놀러갔다. 가욋돈이 생기면 부모님께 용돈을 보냈고, 후배들에게 밥을 사는 식으로 가끔 삶에 자부를 느꼈다"는 경험과, "옷값을 줄이고 의료비를 늘렸다. 소설이나 영화로 익힌 그 모든 예습에도 삶의 많은 것이 예상과 달라 당황했고, 그런 내 몸과 화해하느라 바빴다. 그럼에도 그런 마음마저 다스리며 적응하고, 함께 늙어가는 친구들을 만나 종종 서로의 고독에 시치미를 떼며 웃다 헤어졌다"는 상상을 통해 그들의 부재를 추모한다.
"봄이 와도 봄이 아니던 봄날", "동백이 보이지 않아 서러워도 / 피는 꽃이 무엇이든 다 나의 꽃인 줄 안다"는 4.3 추모시(이광용)에 담긴 마음은 김애란의 에세이와 같은 결이다. 남겨진 이들의 일은 이와 같다. 추모, 기억,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소설가 정세랑은 2020년 11월 16일분 연재 에세이에서 세월호 참사와 관련 "공적인 발화자가 명명백백히 밝혀진 진실을 말하고 기록해야 한다. 이 공공의 기억을 확립하지 못하고서는 우리 사회는 앞으로 나갈 수 없다"며 "한 사람이 말하면 다음 사람이 이어 말하고 어깨와 어깨가 촘촘히 맞닿았으면 하고 바라본다"는 기대를 전한다.
2021년 10월 정의당 국회의원 장혜영이 쓴 글은 다음과 같다. 이번 4.10 총선은 아니고, 당시 약 5개월 남았던 2022년 3.9 대선에 대한 얘기였다. "'누가 더 나쁜 놈이냐'를 가리는 선거가 아니라 누가 세월호를 잊지 않았는지, 누가 세월호가 남긴 질문을 여전히 끈질기게 성찰하고 있는지를 가리는 선거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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