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영장 기각으로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서 탈출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전격 영수회담을 제안하면서 그 의도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이 대표는 29일 오전 "윤 대통령께 민생영수회담을 제안드린다"며 "최소한 12월 정기국회 때까지 정쟁을 멈추고 민생 해결에 몰두하자",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조건 없이 만나 민생과 국정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관련 기사 : 이재명, 尹대통령에 '민생영수회담' 제안)
메시지를 낸 내용이나 시점 모두 정부·여당에 대한 공세적 맥락이 읽힌다. 추석명절 당일 오전에 메시지를 낸 것은 최근 정치권 최대 화제의 주인공인 자신의 존재감을 이른바 '추석 밥상'에 올리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장보기가 겁나고 대출이자에 좌절하고 살인적 물가 속에 '먹고 살기 힘들다'는 호소가 추석밥상을 덮는다"는 대목이 이와 관련해 시선을 끈다.
내용적으로도 대통령에 1대1 회담을 제안함으로써, 제1야당의, 나아가 야권 전체의 리더이자 차기 대선주자로서의 확고한 위상을 과시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구속영장 기각이라는 승리를 거둔 후, 그간 "정치검찰의 조작 수사"라고 비난해온 검찰이나 한동훈 법무장관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고 "대통령의 전향적인 결단을 기대한다"며 윤 대통령에게 직접 역공을 편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영수회담 의제를 '민생'으로 구체화해 제안한 것도 눈에 띈다. 이 대표는 지난 27일 새벽 구속영장 기각 직후 낸 메시지에서도 "국민들의 삶, 경제·민생의 현황은 참으로 어렵기 그지없다"며 "정치는 언제나 국민의 삶을 챙기고 국가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정부·여야 모두 잊지 말고, 이제는 상대를 죽여 없애는 전쟁이 아니라 국민과 국가를 위해 누가 더 많은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 경쟁하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로 되돌아가자"고 한 바 있다.
추석연휴 첫날인 지난 28일 당원들에게 보낸 공개 명절 인사에서도 이 대표는 "한가위이지만 즐거움만 나누기엔 국민의 삶이 너무나 팍팍하다. 정부가 야당 탄압에 몰두한 채 민생을 팽개친 사이 전국 곳곳에서 먹고살기 힘들다는 호소가 넘쳐나고 있다"며 "장보기가 겁나는 고물가에, 늘어난 대출이자 탓에 우리 국민은 웃음보다 한숨이 앞서는 명절을 맞이하고 있다. 민주당이 무너지는 민생을 일으켜 세우겠다"고 했었다.
정치의 본령이 민생임을 강조한 원론적인 주장·제안이기도 하지만, 정치권의 중심 이슈를 '이재명 사법 리스크'에서 정기국회 등 민생 대책으로 전환하겠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 대표는 이날 영수회담 제안에서 기업부채, 가계부채, 에너지 등 분야별 지적을 하면서도 "심각한 가계부채로 국민이 신음하는 동안 정부는 재정 안정만 반복하고 초부자감세를 고집한다"거나 "세계 각국은 자국 이익을 위해 발빠르게 외교전쟁을 펼치고 있는데, 우리는 강대국 종속을 자처하며 한반도의 긴장을 높이고 경제 타격을 불러오고 있다. 국익 중심 실용외교로 실리를 챙겨야 할 때, 때아닌 이념 가치 논쟁으로 국민을 편가르고 국익손상을 자초한다"고 하는 등 여야 간, 보수-진보 간 근본적 이념과 가치관의 차이에 해당하는 논쟁에 불을 당기기도 했다.
이 대표의 영수회담 제안에 대해 정부·여당의 반응은 냉랭했다. 용산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나오지 않았고, 국민의힘은 강민국 수석대변인 논평을 통해 즉각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민주당과 이 대표에게 지금까지 여러 차례 '여야 대표 회담'을 제안했다"며 "여야 대표가 만나 민생에 대해 치열한 논의를 하자고 했던 국민의힘의 제안에 먼저 답하는 게 순서"라고 했다.
국민의힘은 "장관 탄핵, 총리 해임은 물론 정쟁으로 국회를 멈춰 세운 채 산적한 민생법안을 묶어 놓고선, 뜬금없는 떼쓰기식 영수회담 제안은 앞뒤도 맞지 않을뿐더러 진정성도 보이지 않는다"고 일축하며 이같이 역제안을 했다.
강 수석대변인은 특히 "대통령은 국민의 대표이지 여당 총재가 아니므로, 국회에서 논의할 민생현안은 여야 대표끼리 만나 협의하는 것이 의회민주주의의 당연한 기본"이라며 "격에도 맞지 않는 대통령과의 회담을 통해 형사 피고인으로서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신분세탁 회담에 매달리지 말라"고 했다. 이 대표는 윤 대통령과 회담을 하기에는 '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李, 당내 상황엔 침묵…비명계 포용이냐 숙청이냐 고민?
한편 이 대표는 지난 27일 새벽 구속영장 기각으로 풀려난 뒤 사흘째인 추석날까지 당 내분 상황 수습 관련 메시지는 내지 않고 있다. 친명계의 '가결표 색출·징계' 등 수위를 넘나드는 공세와 이에 대한 비명계의 반발로 당이 내홍 최고조를 달리면서 당 안팎에서 이 대표에게 '통합' 행보를 주문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였다.
언론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줄을 이었다. <한겨레> 28일자 사설은 '이재명 대표, 민주당 통합 최우선 삼아야'라는 제목으로 "이 대표가 가장 먼저 풀어야 할 숙제는 자신의 체포동의안 표결을 두고 격화한 당의 내분을 수습하고 통합과 협력의 시스템을 재건하는 일"이라며 "무엇보다 '가결파 색출과 응징' 등 당을 분열로 내몰고 있는 강경 친명 세력의 행태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영장 기각으로 방탄 프레임 자체가 깨진 상황에서 당내 책임 공방은 무의미한 논란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같은 날자 <경향신문> 사설은 민주당에 "당내 통합과 정치 복원에 집중해야 할 것"을 주문하며 "아직도 체포동의안 가결표 색출, 징계 운운하며 내부 권력투쟁에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라고 지적했고, <세계일보>도 같은날 사설에서 "이 대표에게는 체포동의안 가결 국면에서 극심해진 친명계와 비명계 간 갈등을 수습하는 것도 급선무"라며 "비명계에 정치적 숙청을 가하려 한다면 민주당의 갈등은 파국으로 치달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대표는 야권 지도자로서 선당후사의 큰길을 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이 대표는 전날 낸 약 400자 안팎의 당원 추석인사에서 이같은 당내 사정과 관련해서는 "우리는 하나된 그 힘으로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고 원론적인 한 마디만 내놨다.
같은날 조정식 당 사무총장 등 정무직 당직자들로부터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상황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도, 홍익표 신임 원내대표와 첫 회동을 갖는 자리에서도 "(보궐선거에) 우리나라 전체의 운명이 걸렸다고 생각하고 당 전체를 동원해 총력을 다하는 체제가 필요하다"(조 사무총장에게), "어려운 시기인 만큼 원내대표가 잘해달라"(홍 원내대표에게)라고 지시·당부했을 뿐, 당 내분 상황 관련 언급은 하지 않았다.
이를 놓고 보면, 이 대표는 자신의 체포동의안에 가결표를 던진 당내 반대세력에 대해 '포용·통합'과 '숙청·보복' 두 가지 선택지를 저울에 올려놓고 추석 연휴 기간 동안 장고를 거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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