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와 미스터리의 융합, 미쓰다 신조가 풀어놓는 '전후 일본의 공포'

[프레시안 books] <하얀 마물의 탑>

일제가 패망했다. 만주국에서 청운의 뜻을 품었던 모토로이 하야타는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의 폐해를 몸소 겪은 후 환멸에 휩싸여 고국으로 돌아온다. 일제의 거짓 선전에 회의를 품은 그는 폐허가 된 조국의 가장 밑바닥에서 근대화의 최전선을 살기로 다짐한다.

일본 호러 미스터리의 거장 미쓰다 신조(三津田 信三)의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하얀 마물의 탑>(민경욱 옮김, 비채)이 국내에 정식 발표됐다.

전작이자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검은 얼굴의 여우>(현정수 옮김, 비채)에서 탄광 노동자로 일하며 불가사의한 일을 겪은 모토로이는 이번 작품에서 등대지기가 된다. 작품에 다이쇼 시기(1912~1926)를 '40년 전'으로 언급한 것으로 미뤄 짐작 가능하듯, 모토로이 시리즈의 배경은 1950~60년대 전후 급성장하는 시기 일본이다. 아직 시골 일본에서는 전근대의 풍습이 남아 있는 시대, 전국을 돌아다닐 모토로이는 이번에는 '등대'가 상징하는 근대와 생령(生靈)이 상징하는 전근대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괴상한 일에 휘말린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모토로이는 등대지기가 되어 두 번째 부임지인 고가사키 등대로 향한다. 등대를 향해 가는 중 그는 괴이한 일에 시달리며 길을 잃고 방황하다 하얀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그곳의 무녀의 도움으로 등대를 겨우 찾아낸 그는, 등대장인 이사카 고조로부터 20년 전 그가 자신과 똑같은 경험을 했음을 알게 된다. 이 불가사의의 정체를 설명할 수 있을까?

대개의 호러 소설은 동일한 약점을 가진다. 무섭지 않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우리는 오감으로부터 공포를 체험한다. 신경을 자극하는 소리, 뭔가 썩은 듯한 냄새, 피의 맛, 눈으로 보이는 불가해한 현상, 피부에 축축하게 닿는 불쾌한 습기... 이런 감각은 즉각적이다. 호러 소설은 이 감각을 읽는 이의 눈과 뇌를 거쳐, 상상의 공간에서 만들어내야 한다. 즉각성이 떨어지니 공포감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위대한 작가들은 호러에 자신만의 이야기 한 스푼을 더한다. 이제는 장르의 그림자를 벗겨내고, 그저 '대가'로 칭해야 할 스티븐 킹은 간략한 뼈대 이야기에 촘촘한 사람 각자의 이야기를 덧씌워 독자를 홀린다. 청소년의 불안감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그것>을 무려 책 세 편짜리 장편으로 완성했다. '마을에 뱀파이어가 들어와 사람들을 학살한다. 이를 알아챈 주인공들은 뱀파이어를 퇴치한다'는 간단한 줄거리를, <살렘스 롯>은 세밀하게 묘사된 각 인물의 성격, 그로부터 '스스로 살아 숨쉬는' 각 인물간 갈등과 융합의 이야기를 덧씌워 풀어낸다.

1980년대 영화 <헬레이저> 시리즈로 더 잘 알려진 모던 호러의 대가 클라이브 바커는 <피의 책>을 고딕적이고 우아한 이야기들-현대 도시 문명이 낳는 공포-로 묵직하게 풀어냈다. 고어(Gore)는 공포감을 야기하기 위해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장치다. 오츠이치가 단편집 <Zoo>나 <고스>에서, 히라야마 유메아키는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에서 광기 어린 하드고어와 유머를 뒤섞었다.

미쓰다 신조는 호러와 미스터리를 엮었다. 작가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메타 소설 3부작인 초기 '작가 시리즈' 작품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작자미상>-<사관장>/<백사당>은 상대적으로 호러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가 본격적으로 일본 장르 문학계에서 이른바 수상자로 떠오르게끔 한 '도조 겐야 시리즈'는 미스터리에 더 초점이 맞춰졌다. 이 시리즈를 이끄는 주인공 도조 겐야는 괴담을 열정적으로 수집하는 민속학자다. 그는 일본 곳곳을 돌며 구습이 현대 문명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괴이한 사건을 맞닥뜨리고, 이를 논리적으로 풀어낸다.

도조 겐야 시리즈에서도 강조되듯, 미쓰다 신조가 즐겨 풀어놓는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전후 고도성장기 일본이다. 익숙지 않은 독자라면 <소년탐정 김전일> 시리즈나 <이누가미 일족>, <팔묘촌> 등 요코미조 세이시 작품을 떠올리면 된다. 첩첩산중 어느 마을에 아직 귀신을 섬기는 풍습이 남아 있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구습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한편, 점차 현대로 질주하는 시대 변화에 불안감을 갖는다. 이 같은 긴장 관계에서 사건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기존 신앙에 따라 사건을 해석하지만, 우리의 주인공(도조 겐야, 모토로이 하야타)은 논리의 힘으로 불가사의를 돌파한다.

작가는 왜 굳이 도조 겐야를 두고 새로운 인물 시리즈를 또 만들어냈을까. 일제 침략에 대한 반성이 둘 간의 중요한 차이점으로 부각된다. 모토로이 시리즈의 첫 작품 <검은 얼굴의 여우>는 탄광 노동자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조선인 강제 동원 역사를 거론한다. 주인공인 모토로이는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에서 이른바 '오족 협화' 사상에 감화됐다, 전쟁을 겪고 나서야 조국의 침략 전쟁이 낳은 부조리를 깨닫는다. 그렇기에 여유롭게 민속 괴담을 찾아다니는 도조 겐야의 방랑과 달리, 모토로이 하야타의 방랑에는 반성과 성찰이 동반된다.

어느 작가나 전성기가 있다. (스티븐 킹과 같은 예외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작가의 전성기가 보이기 마련이다. 미쓰다 신조의 경우, 최근 작은 대체로 미스터리에 더 초점이 맞춰진 만큼 호러의 기운은 젊은 시절만 못하다. 하지만 <하얀 마물의 탑>이 증명하듯, 작가는 이야기에 끊임없는 고민을 붙여 독자를 설득한다. 이는 당연히 성공적이다. <하얀 마물의 탑>은 미스터리로서는 드물게 좀처럼 책 전반부에 사망하는 이가 나오지 않지만, 역시나 얼얼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벌써부터 찾아온 듯한 여름 더위를 잊기 좋은 소설이다. 

▲<하얀 마물의 탑>(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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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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