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시작한 지 아직 10개월밖에 안 된 '막내 작가'다. 부모님의 가르침대로 부당한 것에 부당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 자체를 인정하기 무섭다. 일은 뿌듯한데, 이 직업을 바라보는 불안한 시선이 있고 그것 때문에 뿌듯함이 묻히는 것 같다."
자신을 입사 10개월 차의 '막내 작가'로 소개한 여성의 떨리는 목소리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20년 차 방송작가인 권지현 씨가 지은 <제법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중입니다>(책과이음) 북토크의 현장에서다.
<프레시안>은 지난 17일 서울 합정동 디어 라이프에서 <제법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오프라인 북토크를 개최했다. 북토크에 참석한 권 작가는 방송작가로서 겪은 설움과 고민을 청중과 나누면서 일에 대한 애정, 그리고 연대의 가치를 이야기 했다.
'막내 작가'의 질문에 권 작가는 "그 부당한 대우를 인정하기까지가 힘들다. 저도 그랬다"고 운을 뗐다. "일을 할 땐 가족이라면서, 같은 팀인데 이런 일로 지적하면 왕따 당할 수도 있다고 했다"며 "의전을 할 수도 있고, 커피를 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내 의지에 의한 것이어야지,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 나에게 일을 시키는 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지 않나"라고 말했다.
권 작가는 "권리를 지키는 게 참 어렵다"며 "방송작가는 혼자 일하는 사람이라 어려움을 어디 이야기 할 데도 없다"고 직업적 고충을 토로하고, 자신의 청중이 된 어린 후배 작가의 이야기에 공감했다. 그러면서 "당장 고통받는 요소를 없앨 순 없지만, 이야기를 나누고 경험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기댈 구석이 있다는 게 위로가 될 것"이라면서 '방송작가유니온'을 소개했다.
권 작가의 말이 끝난 뒤 북토크에 참석했던 권 작가의 동료이자 '방송작가유니온' 소속의 방송 작가들이 떨린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했던 '막내 작가'의 주변으로 가서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권 작가가 책에서 말한 '연대'의 순간이었다.
방송작가는 3無 직업... '계약서, 원고료인상, 산재보험'
권 작가는 '방송 작가'란 직업의 명암을 이야기 했다. 유명 연예인을 만나고, 방송 원고를 쓰고, 그 원고는 전국의 모든 이에게 다가간다. 누구나 꿈꿀 만한 일이다. 그러나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모습의 이면에는 비정규직, 그 중에서도 언제든 해고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프리랜서'라는 차별적 처지의 현실이 존재한다.
권 작가는 "일할 때 방송사 정규직들은 '가족이니까, 같은 팀이니까'를 말한다. 하지만 노동의 대가를 계산할 때 '너는 프리랜서니까'가 된다"며 "왜 정규직인 그들만 추가 노동 수당을 받고, 명절 선물을 가져가는 것일까"라며 일을 하며 느낀 차별에 대해 이야기 했다.
이어 "처음에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런 조건에 서운함을 느끼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같다. 그런 차별을 생각하면 일을 못할 것 같으니 살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 같다"고 과거를 고백했다.
권 작가는 2000년대에 시사·논술 시험을 치르고 방송국에 입사했다. 험난한 채용 과정을 거쳐 처음 들은 소리는 귀를 의심케 했다. "시사 논술 시험을 치르고 임원면접까지 통과한 4명이 한달 간 교육을 받았다. 교육 첫날, 제작팀장이 '우리는 너희를 책임지지 못한다'고 말했다. 2000년대에는 프리랜서라는 개념도 희미했던 데다, 당시 나는 사회 초년생이었으니 그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그는 "방송 작가는 '3無 직업'"이라며 "원고료 인상, 근로계약서, 산재보험 이렇게 세가지가 없다"고 우스개 아닌 우스개를 했다. 이어 "대부분 구두계약이니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정규직들과 함께 방송국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다치게 되면 PD는 산재 적용이 되지만 우리는 산재 적용이 안 된다"고 엄혹한 현실을 설명했다.
이어 "작가는 '잡가'다. 작가라는 직함을 쓰지만 원고 구성을 하고, 장소와 인물 섭외를 맡는다"며 "심지어 저는 분장팀이 오질 않아서 제 화장품을 꺼내서 직접 분장까지 맡아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권 작가는 자신의 일을 사랑해 마지 않았다. 자신의 일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방송 일을 7년 했을 때, 뒤도 안 돌아보고 나온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힘들었던 순간보다 딱 한 순간이 생각났다. 생방송이 끝나고 원고를 정리하면서 뿌듯한 그 순간이 마약처럼 생각 났다"고 말했다.
권 작가는 "수많은 방송작가들이 소신과 신념으로 일하고 있다"며 "자신이 처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방송 작가로서의 나는 세상에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어떤 이야기를 전할까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저도 좀 더 낮고 보이지 않은 곳의 이야기를 전하며 스스로의 책임을 쌓아갔다"고 했다.
"화장실에서 혼자 울지 말고 노조 안에서 웃자"
권 작가는 자신의 현실을 마주하고, 차별에 맞설 용기를 낸다. 그는 "처우를 까면 '내 얼굴에 침뱉기'라고 부끄럽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생각을 고쳐 먹었다"며 "알려야지 바뀌지, 아니면 골만 깊어질 뿐이라고 생각을 바꿨다"고 말했다.
권 작가는 "너무 서러운 게 많은데 얘기할 곳이 없었다. 선배들한테 어려움을 이야기 해도 여기서 이런 것 못 견디면, 어디서도 일하지 못한다고 했다"고 했다.
그러던 중 권 작가는 '방송작가유니온'을 만난다. 그는 "그러다 방송작가들이 모여 노조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알게 됐다. 그들과 만나서 나도 힘들고, 너도 힘들고, 어떤 피디가 악독한 지 그런 이야기들을 함께했다"며 "서럽게 펑펑 울고 난 뒤, '그럼 우린 이제 뭘 해야 하는 거지?' 라는 공감대가 생겼다"고 말했다.
지난 7월 14일, 방송작가를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하는 첫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은 2020년 6월 MBC가 '뉴스투데이'에서 10여 년간 일해왔던 방송작가 2명을 해고한 것이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프리랜서 계약을 맺고 MBC의 지휘와 감독 아래 근무한 점에 비춰 노동자로 봐야 한다는 중앙노동위원회의 판단을 인정해준 것이다.
MBC는 '부당해고' 판결을 받고 복직한 방송작가 2명을 올해 신설한 '방송지원직'으로 채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기존 일반직에 비해 열악한 직군으로 여전히 과제는 남았지만, 방송국 비정규직을 대표해 프리랜서라는 이름에서 '노동자'로의 지위를 확인한 유의미한 소송이었다.
이 뒤에는 방송작가유니온이 있었다. 2017년 11월 11일 방송작가의 노동권 보장과 처우개선을 목표로 방송작가유니온이 출범했다. 방송작가유니온은 출범선언문에서 "방송사상 최초로 마산MBC 작가 선배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하려고 했던 때로부터 무려 16년 만이다. 16년 전에 비해, 프리랜서라는 미명 아래 불공정한 노동환경은 한 치도 나아지지 않았다"며 "개별화, 파편화된 방송작가들의 힘을 모아 우리의 절절한 목소리를 노동조합이라는 우산 아래 한 목소리로 외쳐보려 한다"고 출범의 취지를 밝혔다.
권 작가는 "나는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와 비슷한 이들이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만으로도 힘이 됐다.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으로 버틸 수 있었다"며 "결론적으로는 공감을 하며 그 힘이 합해져서 우리가 함께 움직였고, 저도 움직일 힘을 얻어서 조금씩 나아가는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공감과 연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어려움을 함께 이야기 하며 서로를 돕기 위해 힘을 쏟는 일은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귀중한 마음"이라며 "같은 일을 하고,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모이면 인간은 그 안에서 위로를 받고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했다. 권 작가는 "더이상 방송작가를 하는 게 우울하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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