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수능시험이 있었다. 시험 후 늘 그렇듯이 분야별 출제 경향과 난이도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출제본부는 "교육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내용으로, 학문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거나 시사적으로 의미 있는 내용을 출제에 반영했다"다며 "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는 학습 내용이라도 최근 변화된 내용을 반영해 출제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한국사 시험문제 2번 지문에 문제를 푸는 단서로 논란을 초래할 수 있는 설명이 들어갔다. 고려 시대 지명인 철주에 대해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군 일대이다. 강동 6주의 한 곳으로 서북면 방어의 요충지였다'라고 기술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가? 고려 시대 문신 김구가 지은 시문을 소재로 출제하면서 시문의 구절에 대해 출제위원들이 문제가 있는 주석을 단 것이다. 시문에서 언급한 지역(철주)은 10세기 말 서희 장군이 고려에 쳐들어온 요나라(거란) 장수 소손녕과 담판하여 획득한 땅(강동 6주)의 일부로서 고려의 서북 국경을 결정하는 중요한 곳이다. 대일항쟁기에 일제는 우리 민족의 역사 강역을 축소하려는 의도에서 현재 요동반도(중국 요녕성 요하 동부지역)에 있어야 할 그 지역을 현재의 압록강 이남 평안북도에 있었다고 위치를 왜곡하였다.
이러한 왜곡은 일제 식민사학자이자 반도사관의 기초를 잡은 '쓰다 쏘우키치'라는 일본 학자가 1913년에 시작하여 조선총독부의 <조선사>에 반영되고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아무런 검증을 받지 않고 이어져 왔다. 그런데 2017년에 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고려사>, <요사>, <금사> 등 우리나라와 중국 사료들을 비교 분석하여 '쓰다 쏘우키치' 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고려사>에 따르면 서희 장군은 "거란의 동경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 수백 리"라고 하였는데 거란의 동경은 현재 요동반도 요양이므로 고려의 안북부는 현재 평안도 지역이 아니라 현재의 압록강 건너 요동반도 동부지역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주를 비롯한 강동 6주는 요나라의 동쪽 경계와 고려의 서북 경계 사이에 설치된 것이므로 당연히 지금의 평안북도가 아니라 요동반도 지역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사실 다른 근거를 댈 필요도 없이 서희 장군의 이 말만 갖고도 강동 6주, 나아가 강동 6주의 하나인 철주의 위치를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 학자는 당대의 인물인 서희 장군이 이웃 나라인 요나라와의 국경이 어디인지 모르고 거리를 잘못 말했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학계는 일차적으로 누구의 말에 더 무게를 두고 이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 맞는가?
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새로운 학설을 제시한 데 대해 한국의 주류학계는 아직 의미 있는 반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필자는 역사학 논쟁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현재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는 대부분 주류 학설을 싣고 있다. 그런데 수능본부의 설명대로 "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는 학습 내용이라도 최근 변화된 내용을 반영"한다면 출제위원들은 좀 더 신중하였어야 한다고 본다. 즉, 한국사 2번 문제에 논란이 될 설명은 넣지 말았어야 했다. 물론 출제위원들이 최근의 학술 논문이나 저술을 보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가 관리하는 시험이라면 적어도 새로운 학설은 없는지, 기존의 설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도 되는지 등 출제에 앞서 깊이 있는 점검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국민들은 대학에서 우리 역사를 전공하지 않는 한 고교를 졸업한 뒤 국사를 다시 배울 기회는 사실상 없다. 고교 때까지 배운 것이 평생의 지식이 된다. 국사 교육은 왜 중요한가? 우리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무슨 상관이 있는가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 교육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는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치며, 그러한 정체성은 우리나라의 미래 비전을 설정하는데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서 작용한다.
우리의 과거에 대해 맹목적으로 미화하거나 과장하는 것은 경계하여야 하지만 그간의 이해가 부정확하거나 잘못된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면 철저한 검증이 있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우리 학계는 그러한 노력은 게을리하면서도 주류 학설에 배치되는 주장이 제기되면 토론을 거부하고 소위 '국뽕'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하루바삐 시정되어야 할 태도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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