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한편으로 진보의 기회다. 2021년 마지막 논평에서 언급하였듯이, 코로나19는 오랜 과제였던 상병수당 도입의 기회가 됐다.(☞ 관련 기사 : 2021년 코로나 체제, 불평등이 더 심해졌다) 누군가는 상병수당 도입이 한국 사회보장체계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는 것이라 했다. 우리는 새로 도입되는 이 제도가 '뉴노멀' 건강보장 체계의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
상병수당이 뉴노멀이 되려면 일단 시작하고 보자는 현실정치를 넘어서야 한다. 언제까지 기존 제도와 정합성을 따지고, 한정된 재원이니, 관리의 효율성이니 핑계를 찾을 것인가. 변화를 두려워하는 정치와 제도의 경로의존성이 결합하면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크니, 드디어 맞이한 기회를 허투루 날려서는 안 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상병수당 도입 그 자체라기보다, 상병수당이 본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지다. 그 가치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소득 걱정 없이 아프면 쉴 수 있는 권리"와 이를 "일하는 국민이라면 성별, 나이, 고용 조건을 따지지 않고 모두에게 보장하는" 것.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과 걱정도 작지 않다. '한국형' 상병수당이 보편적 건강보장을 목표로 삼은 것은 진일보라 평가할 만하지만, 이를 구체화한 시범사업 모형이 정말 "모든 국민의 노동 소득 보전을 통한 보편적 건강보장"에 부합하는지 걱정스럽다.(☞관련 기사 : <라포르시안> 2021년 12월 22일 자 ''아프면 쉴 권리' 상병수당 시범사업 추진계획 나왔다')
첫째, 정규 노동만을 위한 제도인가?
무엇보다 고용 관계가 유일한 자격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변화한 노동체계를 외면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다. 예컨대,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저소득 불안정 노동자도 상병수당을 이용할 수 있을까? 하루 일하지 않으면 생계가 어려운 이들까지 강제하는 최소 3일의 대기 기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금 우리 사회에는 비정규직, 특수고용, 간접고용, 플랫폼 노동 등 불안정하고, 비전형적이며, 위장된 고용 관계가 차고 넘친다. 불완전한 고용은 말 그대로 완전한 고용 관계가 아니기에 국가의 보호와 자본의 책임을 물을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노동 내 불평등은 날로 갈수록 커지고, 여기에 고용 관계에 기반한 사회보장 제도는 불평등을 강화해 왔다.
돌아보면 바로 여기서 한국형 상병수당 논의가 시작되지 않았던가. 코로나19 방역 수칙 가운데 하나로 "아프면 쉬라"고 했지만, 쉴 권리가 모든 노동자에 똑같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비정규직, 특수고용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영세 자영자 등 고용 불안정성이 큰 취약 노동 계층을 대상자로 포함하는 것은 논의 시작부터 주요 의제였다.
둘째, 고용과 노동의 경계를 다시 정할 것.
또한, 정규와 비정규의 구분을 넘어 노동의 경계를 넓혀야 한다. 폐지 줍는 노인은 노동자인가 아닌가? 가족을 간병하고 돌보는 여성은 노동자인가 그렇지 않은가? 무급으로 자활근로 사업에 참여하는 수급자는 어떤가? 직업 재활에 참여하는 장애인은 노동자라 할 수 없는가?
더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일하지만 '공식' 소득으로 잡히지 않아 대상자가 될 수 없는 여성 무급가족종사자. 소득 파악이 어렵다고 처음부터 이들을 빼놓으면, 그리고 이들을 배제하는 것이 제도를 정당화하고 굳어질 때 이들은 다시 한번 “존재하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이다.
결국, 새로 시작할 상병수당은 '사회적 노동'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우리는 임금 노동과 비임금 노동, 공식 노동과 비공식 노동, 유급 노동과 무급 노동 등 어떤 형태로든 노동을 경계 짓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젠더, 나이, 장애 등 노동 외의 조건이 상병수당의 자격을 결정지어서는 안 되는 것도 물론이다.
셋째, 보장 수준이 충분해야 한다.
재원 부족, 도덕적 해이 방지, 그 어느 명분도 낮은 급여(최저임금 60% 수준), 짧은 보장 기간(3~4개월), 긴 대기 기간(3~14일)이라는 낮은 보장 수준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이미 시민사회가 비판한 바 있지만, 보장 수준은 재분배를 넘어 상병수당의 일차 목표, 건강에 직결된다.(☞ 바로 가기 : 참여연대 2021년 12월 23일 자 '[논평] 효과 증명 어렵고 부실한 상병수당 시범사업 계획', <매일노동뉴스> 1월 6일 자 '"아프면 쉴 권리, 제대로 보장하라"')
상병수당의 중요한 목적 한 가지는 아픈 노동자가 건강을 회복해서 다시 노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건강한 노동자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임금이 최저임금이라고 전제하면(물론 현실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상병' 상태의 노동자가 건강을 회복하는 데는 당연히 그 이상의 비용이 필요하다.
넷째, 젠더 관점을 포함해야 한다.
여성과 남성은 건강 필요가 다르고, 상병수당의 필요 또한 다르다. 코로나19 백신의 생리 불순 부작용 사례에서 보듯이, 상병수당과 관련이 있는 지식의 젠더 편향도 무시할 수 없다. 상병수당은 지금 시작하는 셈이니, 예컨대 근로활동 불가를 판단하는 단계에서부터 이를 고려해야 한다.
이상과 같이 하나하나 상병수당 문제를 지적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뉴노멀 건강보장 체계는 차별과 배제 없이 일하는 모든 사람이 상병수당 제도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상병수당은 “우리도 그런 제도가 있다”라는 면피용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의 삶에 이바지해야 한다.
굳이 '한국형' 상병수당이라 이름 붙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코로나19 유행 와중에 상병수당을 출발하려고 하는 데는 지금 여기 한국 땅에서 어떤 형태로든 일하며 살아가는 모든 시민의 삶을 좀 더 낫게 하려는 것 아닌가.
상병수당의 목적이 건강과 소득의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데 있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상병수당의 틀을 재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할 때다. 원리의 방향은 한 가지, 제도, 정책, 관리가 아닌 '사람' 중심 관점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시범사업은 6개월 후로 계획되어 있으니 아직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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