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도 주목한 삼성 앞 '철탑 농성' 김용희의 투쟁

'무노조 삼성' 포기한 삼성, 왜 아직도 가혹한가?

코로나19 사태로 '사회적 거리두기'는 생활방역의 바람직한 지침이 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최대 재벌그룹 삼성에서 노조 활동은 바이러스 취급을 받으며 시대착오적인 거리두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미 삼성이 '선친의 유훈'으로 받들어온 무노조 경영이 한국에서도 사법처리 대상이 되었고, 지난해 11월 삼성전자를 시작으로, 삼성화재, 삼성SDI, 삼성생명, 삼성증권, 에버랜드, 에스원, 삼성디스플레이 등 여러 삼성계열사에 노조가 설립됐다. 삼성전자, 삼성화재, 삼성디스플레이 삼성SDI, 삼성웰스토리, 삼성애니카손해보험 등 6개 계열사는 한국노총 산하 노조이기도 하다.

지난해 12월 18일 삼성은 무노조경영을 폐기한다고 발표했다. 지난 2월 4일 출범한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역시 삼성 노조 문제에 “전향적인 자세로 임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노조 측은 사측이 협상 대상으로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등 노조 활동에 거리를 두는 태도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삼성준법감시위원회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삼성 최고 경영진에게 재발방지 대책 마련 등을 촉구하며 권고한 △ 경영권 승계 관련 △ 무노조 경영 방침 등 노동 관련 △ 시민사회 소통 관련 등 3가지 최우선 준법 의제에 대한 대국민 사과 이행 기한이 4월 10일에서 5월 11일로 한 달 늦춰졌다.

현재 삼성의 노조 활동 탄압의 상징적 희생자가 되고 있는 노동자는 김용희 씨다. 삼성에서 노조를 만들다 해고된 김 씨가 23년간 투쟁하다가 지난해 6월10일 서울 강남역 삼성생명 빌딩 앞 25미터 CCTV 철탑 농성을 이어간 지 20일로 316일째를 맞았다.

삼성피해자공동투쟁에 따르면, 김씨는 사방 1미터도 안되는 철탑에서 단식 투쟁을 하다 지난 18일 급격하게 기력이 떨어져 13일째 이어오던 단식을 중단했다.

삼성피해자공동투쟁은 "삼성의 노조 탄압 등 각종 인권유린도 코로나19 못지않은 사회적 재난"이라면서 정부와 우리 사회가 삼성 문제를 외면하지 말 것을 호소하고 있다.

김용희 씨는 1982년 삼성항공 창원1공장에 입사한 이후 1991년 노조 설립을 시도하다 해고된 뒤 1994년 삼성물산으로 복직했다. 하지만 경남지역 삼성노조 설립위원장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1년만에 해고됐다. 해고된 후 24년간 복직투쟁을 하다 정년을 한 달 앞둔 지난해 6월 10일 ▲삼성재벌의 진정성 있는 사과 ▲삼성계열사 명예복직 ▲해고기간 25년 임금배상 등을 요구하며 본사가 보이는 철탑 위로 올라가 농성을 시작했다.

단식 투쟁 전부터 김 씨의 건강상태는 크레인을 타고 진단을 한 의사가 "의학적으로는 살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할 정도였다. 생사기로에 서있는 김용희 씨 문제에 대해 <뉴욕타임스(NYT)>도 현장을 찾아 19일(현지시간) 르포 기사로 국제적인 관심을 촉구했다. 다음은 <뉴욕타임스>의 기사 ‘나의 마지막 투쟁: 삼성과 외로운 투쟁하는 한국의 한 시위자(My Last Stand’: In South Korea, a Protester’s Lone Fight Against Samsung)'의 주요 내용(원문보기)이다. 편집자

▲ 강남역 CCTV 철탑 위에서 생활 중인 김용희 씨. ⓒ프레시안(최형락)
▲뉴욕타임스에 소개된 김용희 씨 ⓒ뉴욕타임스 화면 갈무리

"삼성에 노조 만들다 인생 망쳤습니다"

김용희 씨는 315일째 서울에서 가장 혼잡한 교차로가 내려다보이는 82피트 교통감시 카메라 철탑 위에 있다. 침낭과 플라스틱 깔개에 의지한 채 한국 최대 재벌 삼성을 성토하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60세 남자 김 씨가 투쟁을 이어왔다.

김 씨는 공중에 떠있는 철탑에서 이뤄진 <뉴욕타임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상황이 더 나빠질 것도 없지만, 더 나빠진 조건에서라도 삼성과 싸울 것"이라면서 "지금 나는 거대한 악과 최후의 투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씨에 따르면, 삼성은 독립적인 노조를 조직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1995년 그를 해고했다. 당시 이전과 이후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시도했던 일이다. 김 씨는 지난 25년 동안 복직과 함께 보상과 사과를, 한국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으로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온 삼성 측에 요구했다.

스마트폰 제조사로 세계에 알려진 삼성은 한국 경제를 지배하는 재벌 중에서도 가장 큰 대기업집단이다. 삼성이 유별난 이유는 또 있다. 조선업과 자동차제조업으로 알려진 현대 같은 재벌은 대규모 노조 파업으로 작업이 파행을 겪는 일이 반복됐다. 하지만 삼성은 심각한 노조 파업을 겪은 적이 없다.

지난해 12월 법원에서 나온 두 가지 판결을 보면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삼성의 전현직 고위 임원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39명이 계열사 두 곳과 하청업체들에 독립적 노조 조직을 방해하고, 노조 활동을 원천봉쇄하려고 획책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18년 삼성의 임원들을 기소한 검찰은 "이들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지만 확인할 수 없었던 진실을 드러냈다"고 밝혔다. 그 진실은 삼성이 노조 활동가에 대한 해고와 임금 삭감, 이들에게 접근해 정보를 캐내 사측에 전달하도록 경찰을 매수하는 등 백화점식 노조 파괴 전략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판결을 내린 한 판사는 기소된 삼성의 임원들을 찰스 디킨스의 소설 <어려운 시절>에서 직원들이 너무 많은 것을 원한다고 조롱한 냉담한 공장주 조사이어 바운더비에 비유했다.

삼성의 2인자로 널리 알려진 삼성전자 이사회의 이상훈 의장을 포함한 삼성의 최고위급 인사들도 감옥에 보내졌다.

당시 삼성은 "과거 회사 내에서 노조를 바라보는 시각과 인식이 국민의 눈높이와 사회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음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사과했다.

검찰이 삼성을 상대로 유죄판결이라는 보기 드문 승리를 얻어내기까지 조사와 기소에만 6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삼성피해자공동투쟁 하성애 대표는 "삼성이라고 하면 우선 스마트폰이라는 현대적 이미지를 떠올리겠지만, 김용희 씨 사건만큼 삼성의 추악한 이면에 도전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보여주는 사건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김 씨는 1982년 삼성항공 창원공장에 입사한 직후 노조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김 씨에 따르면, 그는 괴한에게 칼침을 맞고 삼성 간부들에게 납치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고 난 뒤 오히려 그의 의지는 더욱 굳어졌다고 한다.

김 씨는 "아는 것이 힘"이라고 손글씨를 쓴 팸플릿을 동료 노동자들에게 나눠주고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결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일어설 것을 촉구했다.

김 씨에 따르면, 그 해 한 20세 삼성 노동자가 상사에게 성폭행을 당해왔으며, 이런 사실이 폭로되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법원 소송 기록에 따르면, 삼성은 오히려 김 씨가 이 여성에게 성폭력을 했다는 이유로 김 씨를 해고했다.

이 여성은 공증진술서를 통해 김 씨가 자신에게 성폭력을 한 적이 없다고 밝혔고, 김 씨는 삼성을 상대로 복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삼성은 소송을 취하하고 러시아의 삼성 건설 현장에 1년간 일하라는 조건으로 결국 김 씨를 복직시켰다.

"지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철탑 농성 결심하게 만든 사건

러시아에서 한국에 보낸 한 편지에서 김 씨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썼다. 이 편지의 사본은 삼성을 상대로 한 투쟁의 일환으로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에 지난해 제출됐다.

편지에 따르면, 삼성 직원들은 김 씨를 끈으로 결박한 채, 활동을 중단하라고 압박하고, 한국대사관에 김 씨를 북한의 간첩이라고 고발했다.

삼성은 김 씨의 주장들에 대해 언급을 거부하고, 단지 러시아 현지업체들은 더 이상 삼성과 관계가 없다고 밝혔다. 1995년 김 씨가 한국으로 돌아오자 삼성은 김 씨가 노조 활동을 포기하지 않는 한 복직할 수 없다고 압박했다. 김 씨는 거부했다.

이후 그의 삶은 삼성 본사 근처에서 끝없는 농성과 단식 투쟁으로 이어졌다. 삼성 간부들은 김 씨를 명예훼손,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김 씨는 두 번이나 체포되기도 했다.

그 사이 김 씨의 가족에게 비극이 닥쳤다. 김 씨의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됐다. 김 씨의 어머니는 김 씨가 감옥에 있을 때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1992년 김 씨의 아내는 성폭력을 당했다. 가해자는 삼성과 관계가 있다는 추측성 보도도 있었다.

김 씨는 가족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삼성이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 씨가 농성을 벌이고 있는 철탑 밑에는 "삼성에 노조 만들다 인생 망쳤습니다"라는 슬로건이 적혀 있다.

김 씨처럼 철야농성은 한국 노동활동사에서 전통적인 상징이 되고 있다. 노조 활동가들에 대한 책을 쓴 임미리 고려대학교 교수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다른 모든 방법이 실패한 뒤 비록 언론에 몇 줄 되지 않는 기사로 다뤄질 뿐이라고 해도, 사회의 관심을 끌어내려는 마지막 시도로 그들은 이른바 공중 시위에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씨의 희망은 지난 2016년말 당시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과 삼성 등 재벌의 정경유착에 항의하기 위해 서울 도심을 가득 채운 대중집회에 참여하면서 힘을 얻었다. 삼성의 사실상 총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박 전 대통령에게 700만 달러의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탄핵을 받고 감옥에 수감됐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2018년 2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항소심 재판부가 1심에서 선고된 징역 5년형을 절반으로 깎아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이다. 김 씨는 삼성이 성역이라는 것을 보여준 이 판결에 크게 실망했다.

지난해 6월10일 김 씨는 철탑으로 올라갔다. 그의 동료들은 음식과 책, 스마트폰 배터리 등을 로프를 이용해 올려보내주고 있다. 김 씨의 아내도 로프를 이용해 1주일에 한 번 김 씨 주변의 쓰레기를 처리해 주고 있다. 김 씨는 때때로 철탑에서 몸을 일으켜 확성기를 통해 삼성을 성토해왔다.

김 씨는 한 인터뷰에서 "내 아들뻘 나이의 삼성의 한 보안업체 직원은 내가 철탑 위에 오르기 일주일 전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면서 "그 순간 내가 지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고공 시위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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