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이 한미 군사훈련 중단을 선언한 것은 26년 만의 일이다. 1992년 '아버지 부시'인 조지 H. W. 부시 당시 대통령은 노태우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이었던 팀스피릿 중단을 선언했다.
선언에 앞서 이를 북한에 통보했고 이는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밑거름이 되었다. 북한은 또한 국제원자력기구 안전조치협정에도 서명했다. 이로써 북핵 문제는 ‘호미’로도 막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9개월 만에 한미 국방장관들이 두 정상의 선언을 뒤집어 버렸다. 이에 북한은 1993년에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맞섰다. 25년간의 북핵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26년 만에 나온 미국 대통령의 "도발"이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26년 전에 한미 군당국이 노태우-부시의 발표를 뒤집은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하나는 두 나라의 대선이었다. 노태우는 레임덕에 빠졌고 부시는 재선 캠페인에 여념이 없었다. 이를 틈타 한미 양국의 강경파들은 정부 내 숙의 과정도 없이 팀스피릿 재개를 밀어붙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정은 다르다. 트럼프의 탄핵이라는 미국발 정치적 급변사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는 최소한 2020년까지, 재선에 성공하면 2024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도 2022년 5월 초까지이다. 국내 정치적 이유로 한미연합훈련 중단이 뒤집힐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아진 셈이다.
26년 전에는 더 본질적인 요인도 있었다. 당시 미국에선 주한미군 감축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세는 주한미군 3단계 감축이었다. 하지만 네오콘의 원조격인 딕 체니 국방부 장관과 폴 월포위츠 차관은 대규모의 주한미군 주둔을 희망했다. 중국을 의식한 탓이었다. 그런데 이들에겐 회심의 카드가 있었다. 북핵 위협을 부풀리면서 이를 빌미로 팀스피릿 재개를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농간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어떨까? 미국의 전통적인 군사전략으로 본다면, 대규모의 주한미군을 주둔시키고 전략자산을 투입해 한미군사훈련을 실시해야 할 필요는 오히려 커졌다. 북한도 북한이지만 중국이 만만치 않게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 지명자 등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상관은 바로 트럼프다. 만약 이들이 군사전략적인 이유를 들어 한미연합훈련 중단에 반대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트럼프는 "당신 해고야!(You’re fired)"라고 트위터를 날릴 것이다. 역설적으로 트럼프의 독불장군식 리더십이 한반도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트럼프의 동맹관은 '동맹이 밥먹여주냐?'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반면 트럼프의 비교적 높은 지지율은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받쳐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0% 중반에 이르는 지지율의 바탕에는 북미정상회담 효과가 톡톡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26년 만에 나온 미국 대통령의 유쾌한 "도발"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본질적인 이유는 또 있다. 그건 바로 트럼프가 북핵 문제는 적대관계의 산물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적대관계를 평화관계로 전화하는 것이 비핵화로 가는 첩경이라는 점을 깨달았다는 데에 있다.
북미공동성명의 백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 성명에선 "상호 신뢰구축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추동할 수 있다"고 했는데, 트럼프는 빠르게 그 첫 단추를 채웠다. 이제 김정은이 화답할 차례임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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