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미투운동' 중대 시점..."이런 세상 터져야 마땅"

[현장] 광장으로 나온 '미투'... 청계광장서 1박 2일 '2018분 이어 말하기'

"성교육도 받기 전인 어린 나이에 나는 성추행을 당했다. 그것도 집 앞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몰랐던 나는 그 일을 일기장에 썼고 어머니는 나를 불렀다. 이 일을 지우개로 지워라, 학교에 제출하지 말라고, 남 앞에서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 일을 여태까지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지만, 내 손으로 그 글자들을 하나하나 지웠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지울 수 없었다."(20대 여성 대학생 A 씨)

"모르는 아저씨가 삼촌 친구라며 다가왔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6살 아이가 성폭행을 당했다. 20대 삼촌도 고등학생 사촌들도 아버지 직장 동료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여름날 덥겠다며 내 팬티 벗긴 것을, 그리고 그들이 내 생식기에 더러운 손가락을 넣었던 일을, 그 손가락을 떠올리며 그것을 잘라버리는 상상을 수없이 했다."(40대 여성 직장인 꽃마리 씨)

"제가 아는 분의 사연이다. 베트남 결혼 이주 여성의 친정 어머니가 성폭행을 당했던 일이 있었다. 이주 여성의친정 어머니는 한국 남성과 결혼한 딸의 출산과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서 한국에 입국했다. 친정 어머니의 여동생도 한국 남성과 결혼하고 한국에 살고 있었다. 친정 어머니는 한국에 머물고 있는 동안 동생을 만나러 갔다가 동생 사돈의 친구에게 강간을 당했다. 동생 사돈의 친구가 베트남에서 온 친정 어머니를 강간 하는 동안 사돈이 밖에서 망을 봐주었다."(30대 이주여성 레티마이투 씨)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주최한 '2018분의 이어 말하기'에서 한 여성이 발언하고 있다. ⓒ프레시안(박정연)

대학생 A 씨, 영화인 윤한나 씨, 이주여성 레티마이투 씨, 직장인 꽃모리 씨, KTX 승무원 김승하 씨까지, 각계 각층의 여성들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연대의 의미를 나타내는 검은색 끈을 들고 광장에 나와 '말하기'를 시작했다. 꽃샘추위의 모진 바람이 불던 22일, 청계광장에서 열린 '2018분 동안의 이어 말하기'에 동참한 여성들은 일상적이었던 성폭행 경험에 대해 이어 말했다.

발언대에 나선 여성들은 자신의 성폭행 경험을 고백하는 과정에서 고개를 떨구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발언자가 말하기를 주저하고 눈물을 흘릴 때면 이를 바라보던 청중들이 "힘내라,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며 박수로 응원을 보내기도 했다.


여성들의 외침, "이런 세상은 터져야 마땅하다"


'미투'는 단순한 폭로 운동이 아니다. 촛불로 '제도의 민주화'를 어느 정도 성취한 지금도 일상생활 속의 민주화는 아직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촛불 광장에서 '박근혜 퇴진'을 목청껏 외칠 수 있는 사회지만, 직장으로 돌아오고, 학교로 돌아오면 다시 입을 닫아야 하는 게 우리 사회다. 권력자와 시민 구도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일상의 '민주화'가 없다면, 2018년의 '미투 운동'은 "어느 때나 간혹 있어왔던 '성추문' 사건이 또 발생했다"고 역사책에 기록될 수밖에 없다.

지금 '미투 운동'은 가장 중요한 시점을 지나가고 있다. '일상의 민주화'가 없다면 사회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먼 훗날 또 다른 '성추문' 사건을 맞이하게 될 수밖에 없다. 지금 '백래시'(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反페미니즘 진영의 반동) 현상이 강해지고 있어 '미투 운동'이 제도적 공고화로 이어지지 못할 경우 좌절을 겪게 될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때문에 현 시점이 미투 운동의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 있다.

22일 오전 9시 22분, 청계광장 발언대 뒤편에 설치된 '00:00'이였던 타이머가 '00:01'로 바뀌며 이어 말하기의 시작을 알렸다. 340여 개 여성·노동·시민단체들의 연대체인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주최한 '2018분의 이어 말하기'는 23일 오후 7시까지 총 2018분, 꼬박 34시간 동안 여성들의 성폭력 경험, 미투에 대한 지지 발언 등을 이어간다.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주최한 '2018분의 이어 말하기' 웹자보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이날 사회를 맡은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 나우 씨는 "한 여자가 자신의 삶에 대한 진실을 말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 이런 세상은 터져야 마땅하다"라며 "성폭력 문제를 몇몇 괴물의 문제로 봉합하고 떼어내려 하지만 괴물을 키우고 두둔한 것은 조직의 문화와 법률 해석에 있다"라고 했다.


이어 나우 씨는 "이제 겨우 두 달 된 미투 운동을 보며 바뀌었다고 하지만, 바뀐 것은 목소리를 낸 여성들의 용기일 뿐이지 아직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라며 "가해자의 길을 용인하고 피해자 행실을 문제 삼으며 성폭력을 견디고 감춰야 했던 이 땅의 질서는 마땅히 더 크게 흔들려야 한다"라며 한국사회에 만연한 '강간 문화'를 비판했다. (☞관련 기사 : "침묵을 강요하던 '강간 문화'는 끝났다")


꽃샘추위 속에도 청계광장 한 켠을 채운 50여 명의 참가자는 손에 핫팩을 쥐고 목도리를 두른 채 '#metoo #withyou', '미투가 바꿀 세상 우리가 만들자'라는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들고 발언을 경청했다.

발언자로 나선 영화인 윤한나 씨도 "최근에 '미투 운동이 정말 싫다', '요즘 애들 앞에선 무슨 농담을 못 하겠다' 하는 남자분들을 만났다"라며 "그 요즘 애들 중 하나가 바로 나였지만 반발을 할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다"라고 했다.

윤 씨는 침묵의 카르텔로 성폭력 문화를 공고히 한 이들을 향해 "당신이 평화인 줄 알았던 그것은 결국 공모로 평가될 것이다"라며 "눈과 귀를 닫고 짐승의 시대에 머물러 있겠다면, 제가 당신을 억지로 끌어낼 수는 없겠지만 당신은 당신의 생각만큼 괜찮은 사람이 아니다. 당신의 이름은 여성 인권의 후퇴를 조장한 사람으로 박제될 것이다"라고 외쳤다.

"성폭력이 만연한 내 일상의 경험들을 낱낱이 기억한다"

광장 한편을 따라서 대자보 벽이 세워졌다. 벽에는 여성들이 직접 매직으로 쓴 자신들의 경험을 담긴 글과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대자보와 피켓들이 붙어 있었다.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는 각계각층의 대자보와 1971년 미국 페미니스트들이 쓴 '강간 반대 선언문' 속 문장도 붙어 있었다.

▲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청계광장 한 편에 세워놓은 게시판. ⓒ프레시안(박정연)

광장을 지나가던 여성들은 대자보 앞에 놓인 에이포(A4) 용지에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 붙였다. 또 다른 여성들은 대자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대자보에 적힌 손글씨를 손으로 만져보기도 했다.

대자보에는 자신의 인생 경험을 적어놓은 이야기들이 줄을 지었다. 유년시절의 성폭력 경험부터 직장생활의 성폭력 경험까지 여성들은 청계광장으로 나와 말하고 쓰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적었다.

어떤 여성은 자신의 일생을 기록했다. 유년기였던 9살 때부터 현재 30살까지 자신의 일생에 빼곡했던 성폭행 경험을 글로 남겼다.

"나는 낱낱이 기억한다.
8살, 나는 집 근처 골목에서 남자 성기를 처음 보았다.
9살, 담임(50대, 남)은 여자애들을 무릎에 앉혀놓고 받아쓰기 틀린 개수 대로 뽀뽀를 시켰다.
13살, 툭하면 내 브래지어 끈을 잡아당겼던 김○때문에 학교에 가기 싫었다.
17살, 등굣길 버스 안에서 옆자리 아저씨가 내 허벅지를 더듬었다.
20살, 신입생 OT에서 선배들이 남자 동기와 함께 섹시 댄스를 추라고 했다.
23살, 남자친구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거냐며 매번 억지로 성 관계를 요구했다.
29살, 노래방 회식 때마다 술을 따르고 남자 팀부장들과 블루스를 춰야 했다.
30살, 어제 식당에서 미투 고발 뉴스를 보던 옆자리 남자들이 피해자를 보며 "에이, 별로 예쁘지도 않네"하는 소릴 들었다.
나는, 용기 내 증언하는 여성들의 미투를 통해 그리고 이 모든 내 삶을 통해, 성폭력이 만연한 내 일상의 경험들을 낱낱이 기억한다.
이제는, 함께 용기 내 증언하며 미투 이후의 세상을 우리가 원하는 세상과 닮은 세상으로 변화시키기를 바란다"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임윤옥 씨는 "여성들은 모든 것을 걸고 나온다. 직장에서의 해고, 업계에서의 퇴출 등의 두려움을 딛고 말하는 것이다"라며 "여성들의 말하기를 계기로 한국사회에 만연한 강간 문화가 사라져야 하고 개과천선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청계광장에서 진행되는 '2018분 동안의 이어 말하기'의 현장 발언은 신청 부스에서 즉석에서 신청할 수 있고 현장 참여가 어렵다면 다음 링크를 통해 발언 대독을 신청할 수 있다.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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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연

프레시안 박정연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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