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색 크레파스의 추억
요즘 10대는 잘 모르는 크레파스가 있다. '살색 크레파스'. 크레파스 통을 열면, 나란히 누운 크레파스들 사이에서 살색 크레파스 키가 늘 제일 작았다. 집이며 옷이며 알록달록 다양하게 색칠했는데 사람 얼굴은 무조건 살색으로 칠했던 탓이다.
내 크레파스 통 사정만 그랬던 게 아니다. 친구들 대부분이 그랬다. 살색 하나 모자라서 크레파스 세트를 사고 또 사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중학생이 되어 크레파스 대신 물감 묻은 붓을 들었어도, 여전히 사람 얼굴에는 살색 크레파스를 닮은 색을 만들어 채워 넣었다.
그러다 언제였을까, 우연히 공익광고 하나를 봤다. '흰색', '살색', '검은색' 크레파스가 그려져 있었고, 그 위에 짤막한 문구가 쓰여있었다.
'모두 살색입니다'
이후로 나는 바뀌었다. 반마다 꼭 한 명씩 있던 '깜둥이'들에게 '깜둥이' 대신 '저기...'라고 불렀다. 또, 누군가 그들에게 '깜둥이'라고 부를 때면 내가 대신 수치심을 느끼곤 했다.
어린 날 각성(覺醒)의 경험은 짜릿한 것이었다. 누군가를 '깜둥이'라고 불렀던 지난날을 반성하는 동시에, 그렇게 반성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자못 뿌듯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천부(天賦)의 권리라 배웠던 '인권'은 때가 되면 알아서 피는 들꽃 같은 게 아니라 누군가 쌓고 쌓고 또 쌓아 올린 돌탑 같은 거라고. 그러니까 인권은 교육되어야 한다고.
제2의 살색 크레파스를 찾아서
난데없이 살색 크레파스의 추억이 떠오른 까닭은, 7일 인권위의 대통령 특별보고 때문이다. 인권위는 특별보고 자료를 통해 주요 정책 권고 중 하나로 살색 크레파스 시정 권고(2002)를 꼽았다.
2005년 국가기술표준원은 '살색은 인종 차별 언어'라는 인권위 권고를 받아들여 살색을 '살구색'으로 바꿨다. 이로써 살색 크레파스는 '살구색'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처음엔 살구색이라는 말이 어색하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5년이 흐르고 10년이 흐르면서 살구색은 살색의 대체어로 무사히 자리 잡았다.
살색의 폐기와 함께, 인종 차별은 옳지 못하다는 인식이 사회에 퍼졌다. 다문화 가정 주민 혹은 이주 노동자를 차별하거나 '깜둥이'라는 표현을 쓰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상식이 되었다.(안타깝게도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임명한 현병철 전 인권위원장은 '깜둥이' 소리를 곧잘 해대던 인물이었다.) 당시 신생 조직이었던 인권위는 살색 크레파스 시정 권고를 통해 존재감을 당당하게 입증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인권위의 역할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대폭 축소됐다. '식물위원회'라는 조롱까지 받아야 했다. 다행히 새 정부 출범 이후 다시 조금씩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5년 9개월 만에 부활한 대통령 특별보고가 바로 '인권위 정상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제2의, 제3의 '살색 크레파스'를 기대해도 될 시점이 다시 온 것이다.
인권위는 특별보고를 통해 과거를 성찰하고 새로운 인권 환경에 맞게 혁신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특히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혐오 표현에 대한 대응, 차별금지법 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인권위는 올 한 해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왔다. 지난 4월엔 차기 정부가 추진해야 할 10대 인권 과제 중 하나로 '성 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의 차별을 포괄적으로 금지하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제시했다. 7월에는 '성적 지향, 성 정체성 등 국제인권조약이 금지하는 차별 사유를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최우선 쟁점'이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UN에 제출하기도 했다. 조영선 인권위 사무총장 또한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입법 촉구 활동을 내년도 인권위 역점 사업으로 정했다고 밝히면서, "성 소수자 문제는 보편적 인권의 문제라는 점에 대해 국회의원과 국민을 설득하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요컨대, 방점은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을 포함한'에 찍혀있다. 인권위가 찾은 제2의, 제3의 살색 크레파스는 바로 '성 소수자 차별'이다. 차별금지법 내 차별금지 사유 가운데 '성적 지향'을 넣을지 말지를 놓고 벌써 10년째 옥신각신 중인 상황을 생각하면, 인권위가 이처럼 선도적으로 나서는 상황은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권위는 그러라고 존재하는 것
그래서 이번 대통령 특별보고에도 당연히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성적 지향', '성 정체성', '성 소수자'라는 표현을 찾을 수 없었다. 의아한 일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강조해왔던 인권위가 왜 대통령 특별보고에는 '성적 지향'을 넣지 않은 것일까.
단순히 지면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인권위는 분명 여성, 아동, 노인, 장애인, 난민 등 다른 사회적 약자는 호명했다. '성 소수자'를 넣느냐 마느냐의 차이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인권위가 성 소수자를 넣지 않았다면, 그것은 단순한 누락이 아닐 것이다. 차라리 삭제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보고 대상이 대통령이라는 점이 문득 마음에 걸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8대 대선 후보 당시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19대 때는 유보적인 태도로 선회했다. TV 토론회에선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발언했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대통령 당선 뒤인 지난 7월에는 사회적 논쟁을 유발할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100대 국정 과제 가운데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배제했다.
대통령이 성 소수자 문제에 소극적이라는 점을 알기에, '성 소수자'라는 표현이 보고 자료에 포함되면 대통령이 다시금 논쟁에 휘말릴까 봐 일부러 그러한 표현은 뺀 게 아닐까. 쉽게 말하면 대통령의 눈치를 봤기 때문은 아닐까. 인권위가 하겠다던 혁신은 결국 '청와대가 그어놓은 선'에서 멈추게 되는 것일까.
우리 사회에서 성 소수자 문제는 과거의 살색 크레파스만큼이나 시정이 필요한 문제다. 왜곡된 정보와 편견이 뒤섞인 혐오 발언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온다. 대선 후보조차도 TV 토론회에서 "동성애 때문에 대한민국에 에이즈가 창궐한 것 아니냐"는 혐오 발언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내뱉을 정도다.
상황이 이런데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벌써 10년째 제자리걸음이다. 국회에 갔던 법안은 보수‧기독교계의 극심한 반발로 몇 번이나 되돌아왔다. '표'로 움직이는 정치권의 생리 탓이다.
이때 인권위가 할 일은 정치권의 생리나 논리에 인권이 희생되는 상황을 지적하는 일이다. 저쪽의 사정을 따라가선 안 된다. 그게 인권위의 '독립성'이다. 정말로 대통령의 눈치를 보느라 특별보고에 '성적 지향'을 빠뜨렸다면, 이는 인권위의 '독립성 포기' 선언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암흑기였던 과거로 돌아가겠단 얘기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최우선 쟁점이라고 생각한다면,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설령 그 대상이 대통령이라도 말이다.
14년 전의 인권위가 그랬다. 살색 크레파스 시정 권고를 냈던 그 이듬해인 2003년, 인권위는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항명 행위'라는 비난이 일었다. 그러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한마디로 논란을 정리했다.
"인권위는 그러라고 존재하는 겁니다."
그렇다. 인권위는 '그러라고' 존재한다. 인종 차별을 해소하고,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개선하는 데 어떤 주저함도 없어야 한다.
물론, 정부와 정치권의 협조가 필요하다. 문 대통령은 이성호 인권위원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으면서, 성 소수자 문제는커녕 차별금지법 자체를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인권위 위상 강화를 지시했던 대통령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강조한 보고를 받고도 그에 대해 함구한 점은 유감스럽다. 만일 언젠가 인권위가 대통령의 뜻에 반기를 든다면,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했던 저 말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인권위는 그러라고 존재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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