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O(국제노동기구) 사무총장의 한국 방문이 노사정위원회 재개의 물꼬가 될 수 있을까.
3박4일 일정으로 지난 4일 한국을 방문한 가이 라이더 ILO 사무총장. 그간 ILO 사무총장이 한국을 방문한 적은 있으나 정부 공식초청으로 온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ILO에 가입하고도 ILO 핵심협약 중 일부를 비준하지 않고 있는 한국 정부다. 불러서 굳이 싫은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다.
그런 한국정부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입장이 바뀌었다. 이번 ILO 사무총장의 한국 방문은 고용노동부의 정식 요청에 의한 방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제까지 지키지 않았던 ILO의 일부 핵심협약을 지키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의지로도 읽힌다.
실제 문재인 정부는 지난 대선에서 100대 국정과제를 발표하고 2019년까지 ILO 핵심협약 4개를 비준하고 관련 법·제도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ILO 회원국인 한국 정부는 ILO 핵심협약 8개 중 △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87호), △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 적용에 관한 협약(98호), △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29호), △ 강제노동 폐지에 관한 협약(105호) 등 4개를 비준하지 않고 있다.
이중 87호와 98호는 첨예한 갈등이 있는 협약이다. 모든 노동자가 노조를 설립, 가입할 수 있고, 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줘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지닌 협약이다. 그간 노조를 만들 수 없었던 특수고용노동자, 그리고 노조를 만든다 해도 원청의 압박으로 사실상 노조활동을 할 수 없었던 사내하청노동자들이 여기에 적용될 수 있다.
ILO 사무총장의 한국방문, 노사정위 재개될까
문제는 ILO 협약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노동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워낙 복잡한 이해관계가 씨줄 날줄로 얽혀 있는 게 노동법이다. 노동계, 정부, 사용자 측이 모인 노사정위가 법 개정에 앞서 사전 협의, 조정 기능을 수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서 박근혜 정부에서도 노사정위가 열린 바 있다. 하지만 노동계에서는 민주노총이 빠진 상태에서 한국노총만 참여했다. 노사정위가 '반쪽'이라는 평가를 받은 이유다. 게다가 지난해 1월 정부가 저성과자 해고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등 양대 지침을 발표하자 한국노동마저도 여기서 탈퇴하면서 사실상 '운행 중단' 상태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입장에서는 노사정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4일 청와대에서 가이 라이더 ILO 사무총장과 만나 국제 노동기준에 맞게 국내 노동법을 정비하는 문제는 다양한 이견이 존재하는 만큼 사회적 대화를 통해 양보·타협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한마디로 노사정위의 재가동을 이야기한 셈이다.
주목할 점은 라이더 사무총장의 행보다. 한국 방문에서 내놓는 메시지가 일관된다. "노사정위원회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를 두고 청와대가 라이더 사무총장을 노사정위 재개의 촉매제로 사용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지난 4일 한국을 찾은 라이더 총장은 방한 첫날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과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문성현 노사정위원장 등과 함께 만났다. 고용부 장관과 노동계 대표, 노사정위원장, 사용자 측 대표 등 이른바 노사정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2년 만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영주 고용부 장관은 "라이더 총장의 방한을 계기로 노사정이 한데 모이는 자리를 만들게 돼 뜻 깊게 생각한다"고 화답했다.
5일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진행한 기자회견에서도 라이더 사무총장은 "한국 노사정의 대화 재개를 강력히 촉구한다"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임금, 일자리 창출 문제 등에 대한 해결책을 노사정 대화로 찾는 일이 한국에 뿌리내리길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넘어야 할 산이 많은 노사정위
하지만 현실 조건상 노사정위 재개를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무엇보다 1999년 민주노총이 정리해고 및 파견제 도입을 반대하며 노사정위를 탈퇴한 뒤, 복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은 신뢰회복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노사정위원회가 언급되지만 노사정위에서 무엇을 논의할지조차도 이야기되지 않는 상황에서 섣불리 참여한다, 안 한다는 결정 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 관계자는 "노사정위 이전에 노정위를 정례적으로 진행하면서 구체적인 안을 만들어가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그런 과정 없이 곧바로 노사정위에서 모든 것을 논의하자고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경영계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듯하다. 노사정위원장을 노동계 출신인 문성현 전 민주노동당 대표를 위촉한 것을 두고 노동계에 무게추가 기운 게 아니냐는 지적을 제기한다.
더구나 이번 노사정위가 다룰 안은 박근혜 정부처럼 노동자의 권리를 후퇴시키는 게 노동권 신장에 방점이 찍혀 있기에 이전과 다르게 경영계에서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ILO사무총장의 방한으로 촉발된 노사정위 재개의 물꼬가 어떻게 흘러갈지 두고 볼 일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