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상황에서 걱정되는 대목이 있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 인식 악화 가능성이 바로 그것이다. 정부는 '한국은 진정성을 가지고 대화로 문제를 풀려고 하는데 북한이 도발로 무산시키고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을 개연성이 높다. 그리고 이러한 북한에 대한 실망감은 '문제 해결 지향적인' 대북정책의 수립을 어렵게 만들 소지가 크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에 고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화 제의는 없었다
먼저 팩트부터 체크할 필요가 있다. 언론 보도와는 달리 한미 정상회담에선 북한에 어떠한 대화 제의도 없었다. 회담의 결과는 문서가 말해주고 그 문서의 핵심은 공동성명이다. 공동성명에선 "북한과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고 하면서도 그 앞에 "올바른 여건 하에서"라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중단하고 최소한 핵 동결이나 더 나아가 비핵화 의사를 보이면 한미 양국이 대화에 나설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걸 두고 대화 제의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냉정하게 평가하면, 한미 정상회담에선 '대화 제의'보다는 한미동맹 강화와 군비증강, 그리고 대북 제재 유지 및 강화 방침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양 정상은 "모든 국가 역량을 활용하여 확장억제력을 강화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는 내용적으로 미국의 핵우산과 재래식 군사력, 그리고 미사일 방어체제(MD) 강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공동성명에는 "대한민국은 상호운용 가능한 킬-체인,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계(KAMD) 및 여타 동맹 시스템을 포함하여, 연합방위를 주도하고,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방어, 탐지, 교란, 파괴하기 위해 필요한 핵심 군사 능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해 나갈 것이다"라고도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다. 공동성명에는 "양 정상은 한미일 3국 안보 및 방위협력이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여 억지력과 방위력을 증진시키는데 기여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이러한 협력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핵심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한미동맹이 공동의 적으로 삼고 있는 북한을 상대로 "모든 국가적 역량을 활용하여" 군사력의 강화 방침을 밝히면서, 그리고 한미일 군사협력을 강화하겠다고 하면서, 북한에 핵과 미사일을 내려놓으라는 것이 과연 현실적인 접근법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대북 제재와 관련해서도 근본적인 성찰을 요한다. 한미 공동성명에선 북한의 도발 행위 중단 및 대화로의 복귀를 위해 최대의 압박 전략으로 "기존 제재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새로운 조치들을 시행하기로 하였다". 제재 위주의 접근이 품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북한으로 하여금 "피해 의식과 피포위 의식"을 더욱 강화시켜 생존 수단으로서의 핵무기에 더욱 집착하게 만든다는 데에 있다.
흔히 문재인 정부의 북핵 대처는 '제재와 대화의 병행론'으로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진실과 거리가 멀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대북 제재는 '현재 진행형'이다. 반면 대화는 '조건부 미래형'이다.
이렇게 시차가 있고 조건도 걸려 있는데 이를 두고 '제재와 대화의 병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해 '선 제재, 후 대화'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한미 양국에 조건부 대화에 집착할수록 북한은 그 조건으로부터 멀어져왔다는 것이다. 북한의 ICBM 발사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와 같은 조건부 대화론, 대북 제재 유지와 강화, 확장억제력을 비롯한 한미연합전력의 강화 및 한미일 군사협력 추진 등은 이명박·박근혜-오바마 행정부 시기의 접근법과 거의 일치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전략적 인내는 실패했다"고 선언했지만, 정작 두 정부 역시 실패한 정책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한미 양국에서 정권은 교체되었지만, 정책은 거의 바뀐 게 없는 셈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문재인 정부는 바로 이 점을 직시해야 한다. 첫 단추를 잘못 꿴 것은 아닌지 성찰적으로 검토하면서 북핵 대처 방안을 새롭게 짜야 한다.
'협상을 통한 최대의 압박'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대의 압박" 수단을 바꿔야 한다. 무력시위와 경제제재를 통한 대북 압박은 "핵 억제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북한의 강박관념으로 이어져 왔고,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다른 도구를 써야 한다. 그건 바로 협상이다. '협상을 통한 최대의 압박'만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선순환을 도모할 수 있다.
'북한이 협상을 거부하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국내의 대다수 언론이 7월 5일 "김정은, '핵·미사일 협상은 없다'"고 발언했다고 보도한 것도 이러한 통념을 강화시켜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통념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이 발언 앞에는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과 핵 위협이 근원적으로 청산되지 않는 한"이라는 조건이 달려 있다. 이건 북한의 기존 입장을 되풀이한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북한은 계춘영 인도 주재 북한대사를 통해 과거보다는 진일보한 입장을 내놓은 바 있다. 그는 6월 20일 인도 방송 위온(WION)과의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 바 있다.
"일정한 상황이 되면 핵과 미사일 실험의 동결 조건을 논의할 의사가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이 잠정적이든 영구적이든 대규모 군사 훈련을 완전히 중단한다면 우리 또한 (핵과 미사일) 실험을 잠정적으로 중단할 것이다. 한반도 문제를 어떻게 평화적으로 해결할지 대화해보자. 우리는 언제든 전제조건 없이 대화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러한 입장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북한은 여러 차례에 걸쳐 한미 양국이 군사훈련을 중단하면, 북한도 핵실험을 중단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했었다. 그런데 계 대사는 여기에 미사일 발사 동결도 추가시켰다. 아울러 "전제조건 없이 대화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발언도 최근에는 이례적인 것이다.
발언 자체만 놓고 본다면 북한은 대화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서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미 양국은 이러한 제안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일축했다. 또한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면서 북한의 수용 가능성이 없는 전제조건을 내걸고 말았다. 이러한 지적이 북한의 제안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였어야 한다는 취지는 아니다. 조건 없는 대화를 통해 상호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어야 한다는 취지이다.
누가 할 것인가?
흔히 한미 양국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면 북한을 옹호하는 것처럼 비춰진다. '문제 해결 지향적인 관점'에서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것도 '자기검열'이라는 단어가 뇌리를 맴돌 만큼 쉽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문재인 정부가 한미 정상회담에서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북 제재를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라는 지금까지의 지배적인 프레임을 '협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로 바꿔내지 못하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코리아 아마겟돈'이 서성거릴 것이라는 강한 우려를 갖고 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지금까지 협상다운 협상은 없었다. 그래서 협상이야말로 가장 강인한 자의 선택이며, 김정은의 전략적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다.
생각해보라.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놓고 협상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피곤할 일이 될 것인가를 말이다. 까다로운 북한과 미국은 말할 것도 없다. 국내 보수 언론과 야당의 반대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한다. 한국 주도의 해법을 마련해 북한과 미국의 동의를 구해내고 국내 여론도 설득해야 한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이 몫을 해주길 바란다. 우리 국민을 믿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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