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2명이 4월 11일 '블랙리스트' 폐지를 촉구하며 새벽 울산 동구 남목고개 고가도로 기둥에 올랐다. 이들은 앞서 9일 하청업체가 폐업되면서 해고됐다. 통상 하청업체가 폐업할 경우, 소속 하청 직원들은 다른 하청업체로 이직하는 식으로 고용이 승계된다. 하지만 이들 2명은 하청지회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고용이 승계되지 않았다. 일명 솎아내기를 당한 셈이다. <프레시안>에서는 현재 문제가 되는 조선계에 만연한 '블랙리스트'에 대해 살펴본다. 이 기획은 다음 스토리펀딩에서도 공동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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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악스럽기 그지없는 손이었다. 두툼한 손바닥은 쇠망치를 연상케 했다. 대못도 그의 손바닥으로 탁 치면 단박에 들어갈 기세였다. 손등에는 군데군데 불에 덴 듯한 흉터자국이 선명했다. 마찬가지로 손톱에는 검은 기름때가 선명하게 끼어있었다. 영락없는 노동자의 손이었다.
"아니 어딜 그리 내빼는교. 이리와 한 잔 해야 한다 아닌교."
그 거칠고 투박한 노동자의 손이 기자의 어깨를 눌렀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흡사 무림 고수에게 혈이 찍힌 기분이랄까. 온몸이 마비가 된 느낌이었다. 그때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나는 누군가, 여긴 어디인가.'
다른 회사의 같은 노동자들
시작은 '착각'에서부터 비롯됐다. 현대중공업 블랙리스트 취재를 하러 울산에 내려갔을 때였다. 하루 꼬박을 취재한 내게 하창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장이 함께 저녁을 먹자고 했다. 거절한 이유가 없었다. 가벼운 저녁자리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그렇게 데려간 곳은 현대미포조선 인근 시장가의 허름한 식당. 이미 많은 노동자들이 한창 '달리고' 있었다. 연신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불콰해진 얼굴로 우리를 반겼다. 아니 정확히는 하 지회장을 반겼다. 한 명 한 명과 악수를 하는지라 자리에 앉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그렇게 '식전행사'를 하고서야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들 조선소 일을 마치고 곧바로 달려온 모양새였다. 하늘색 작업복에 갈색 작업화 차림이었다. 왼쪽 가슴에는 ‘현대미포조선’이라는 명찰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서로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머리에 두건을 쓴 40대 남성은 전기배선 업체에서, 빨간 손수건을 목에 두른 30대 남성은 용접 회사에서,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작업복이 아닌 등산복을 입은 50대 여성은 도장 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다들 미포조선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이었다.
이날 모인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가입에 동의한 사람들이었다. 노조 가입서를 쓰는 자리였다. 그간 하창민 등 하청노조 간부들은 적게는 한 달, 길게는 몇 달 동안 이들 가입을 설득하고 독려해야 했다. 그간 노력이 결실을 맺는 자리였다.
식당에는 우리 일행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식당은 밖에서 내부를 볼 수도 없는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노조원이 된 것이 회사에 알려질 경우, 블랙리스트에 오르기에 조합원 신원은 최대한 비밀에 부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기자가 노조에 가입해야 한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했던가. 30대 젊은 남성 노동자가 '딴지'를 걸었다. 술도 얼큰하게 취해 발음이 꼬인 지도 오래돼 보였다.
"아니, 근데 나는 노조 가입한다 아닌교. 그런데 여기 기자분은 왜 노조 가입을 안 하는교? 안 하는데 왜 여기 왔는교? 기자분이 가입 하면 나도 한다 아닌교. 어떤교?"
순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기자가 하청노조 조합원으로 가입해야 자기도 가입한다? 가입하기 싫어 부리는 '몽니'로만 보였다. 하기야 노조의 당위성은 안다 해도 가입 이후 되돌아오는 뒷감당은 만만한 게 아니다.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하나 둘씩 놓치면 노조원 가입수는 늘 제자리일 수밖에 없다.
노조 간부들이 나섰다. '기자는 조합원 자격이 안 된다'고 제지했지만 이미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가입서를 쓴다 해도 내가 조합원이 될 수는 없는 일. 그의 가입을 돕기 위해 '거짓' 가입서를 썼다.
그렇게 쓴 가입서를 그는 한참동안 살폈다. 들고 있는 손이 흔들리는지, 그의 머리가 흔들리는지 가입서를 들고 있는 그의 몸이 몇 번이나 휘청거렸다. 주민번호에 은행 계좌까지 써놓은 가입서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어차피 가입서를 쓴다는 행위 자체가 거짓인데 그 내용이 무슨 소용 있으랴.
나의 숙취는 어디서 보상 받아야 하나
그렇게 그가 겨우 노조에 가입하나 싶었다. 하지만 이내 또 다른 트집을 잡았다. 기자가 자신과 대포 한 잔을 마시면 자기가 노조에 가입하겠단다. 이번에도 별수 없었다. 대포 한 잔에 노조원 한 명 가입이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대포 한 잔의 위력은 대단했다. 유리잔 한 잔 가득 부어진 소주는 목구멍을 넘어가면서부터 화끈거리더니 이내 뱃속에서 폭발했다. 취기가 뱃속에서부터 올라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한 잔을 더 해야 한단다. 주변에서 말려도 소용없었다. 도망치려는 기자를 억센 노동자의 손이 붙들었다. 결국, 오기 반, 굴복 반으로 대포 한 잔을 더 마셨다.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는 심정이었다.
이후 어떻게 식당을 빠져나왔는지, 서울은 언제 올라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그때 이 노동자가 노조 가입을 했는지 여부도 기억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중에야 그렇게 딴지를 걸며 노조 가입을 미뤘던 그 노동자가 결국, 그날 노조 가입서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황당하다 못해 허무할 지경이었다. '나의 숙취에 대한 보상은 어디에서 받아야 하나'. 허무함 뒤에는 분노까지 치밀었다.
비정규직의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현대중공업의 블랙리스트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하청 노조 간부들이 노조원 한 명 조직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누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노조원이 되려 할까. 자기 고용이 위태롭지 않으면 노조 근처에는 기웃거리지도 않는다.
그런 노동자를 설득하고 독려하면서 한 명 한 명 모아 지금의 노조를 만들어 온 셈이다.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는 심정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렇게 만든 노조를 회사는 무척이나 쉽게 깨뜨린다. 그 도구는 블랙리스트다. 흡사 주술과도 비슷하다. 노조에 가입한 사람은 물론, 가입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절대 풀리지 않는 '고박(固縛)'으로 다가온다.
"한 번은 택시를 탔는데, 아는 형님이 거기 있더라고요. 노조 활동하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해고된 뒤, 공장으로 못 들어온 분이에요. 그런 것을 우리는 잘 알기에 노조는 생각도 못했죠. 그런데 말이죠.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회의가 밀려오더라고요. 10년 전에 받는 월급보다 지금이 더 적어요. 게다가 힘들고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해요. 그런데도 요즘처럼 일이 없으면 빈손으로, 그것도 제일 먼저 쫓겨나죠."
작년에 하청노조에 가입했다는 김형호(43) 씨는 그간 모은 적금, 보험 등을 모두 해약했다고 했다. 언제 해고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노조에 가입하는 순간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것을 잘 알기에 각오는 하고 있단다. 헌법에 보장된 노조활동이 그에게는 자기 인생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활동인 셈이다.
대통령이 바뀌고 세상도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바뀐 세상은 아직 먼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은 여전히 과거의 시대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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