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암살단' 모집까지, 백색테러 위험수위로

[안종주의 안전 사회] '백색테러' 어두운 역사, 되살아나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테러는 대한민국에서 위험의 종류 축에 끼지 못했다. 지금은 달라졌다.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벌어진 김정남 암살이 북한의 짓으로 거의 드러난 때를 즈음해 남한에서도 테러가 언론과 사람들의 입길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언어의 테러가 일상화한 지는 이미 오래다. 마침내 헌법재판소에서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저지하기 위해 대통령 변호인단 원로 법조인 입에서 공개적으로 폭력의 언어가 헌법재판관과 언론인, 국민을 향해 마구 배설됐다. 언론인을 향해 '놈' 자는 기본이고 '서울 거리 피바다' 운운한다. 한때 북한이 가끔 남한과 미국에게 쏟아내던 말들이다.

언어의 테러든, 물리적 테러든 거의 모든 테러는 비정상인들이 저지르는 행위다. 테러는 테러를 부추긴다. 재앙 수준의 큰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는 늘 300번의 징후와 29번의 경고가 있다는 '하인리히 법칙'은 위험학을 아는 이들에게는 익숙한 명구이다. 이 법칙을 테러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박근혜-최순실의 헌법유린·국정농단 사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통령 탄핵의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 사회는 점차 테러 위험으로 빠져 들고 있다. 하인리히가 경고한 것처럼 우리는 이미 300번의 징후, 즉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살해 위협과 같은 언어 테러를 겪었다. 또 최근에는 29번의 경고에 해당하는 박근혜 골수 지지자들의 기자 폭행과 차량 파괴 등을 보았다.

역사의 물길을 돌리려는 테러 조장 세력들

이제 남은 것은 한 번의 큰 사고, 즉 집단폭력이나 정치적 테러다. 최근에는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대행과 강일원 주심 헌법재판관, 그리고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에 대한 살해 내지 테러를 암시하는 글들이 사이버공간에서 마구 돌아다니고 있다. 가당치도 않게 윤봉길, 안중근 등 목숨을 내걸고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투사처럼 목숨을 내놓고 이들을 죽일 20~65세의 청년살수단을 모집한다는 내용의 글을 SNS에 올려 퍼트리고 있다.

황당하기도 하고, 소가 웃을 일이긴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2주 전 토요일 오후 이른바 '태극기 집회' 때문에 버스가 남대문 인근에서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멈췄다. 하는 수 없이 걸어서 수만 명이 운집한 시청 태극기 집회를 뚫고 광화문 촛불 현장으로 잰 걸음을 하여 갔다.

인파가 약간 뜸한 서소문길 한 옆을 지나가는데 한 60대 여성이 소리쳤다. "빨갱이다!" 나를 향해 소리치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외침이었다. 순간 내 점퍼 지퍼에 달린 세월호 상징 노란 리본이 생각났다.

뒤를 돌아보며 "맞소. 빨갱이요!"해주고 성큼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녀에게 노란 리본을 단 사람은 죄다 빨갱이였다. 아니 촛불 시위자들은 모두 빨갱이로 보였을 것이다.

만약에 당시 그 여성 주변에 남성이 많이 있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누군가가 "저놈 죽여라!"고 외치거나 멱살을 잡는다면 아무리 내가 180센티미터(cm)가 넘는 건장한 체격이라도 수십 명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시청 태극기 집회에서 "빨갱이" 비난에 이어 집단 테러 당할 뻔한 사연

광화문 광장에 도착해 지인에게 당시 이야기를 했더니 운이 좋았다고 한다. 앞으로 노란 리본을 단 채로 함부로 태극기 집회 인파 속을 헤집고 다니는 무모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내가 광신도와 같은(미국 <뉴욕타임스>의 보도를 빌리자면 cult-like) 박근혜 지지자들에게 두들겨 맞는 모습을 상상하니 한겨울인데도 등에 식은땀이 흘려 내렸다.

백색테러는 우리 현대사에서 부끄러운 민낯으로 존재한다. 이제 그 역사가 다시 환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자주 한다.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좌우의 대립 속에 극심한 정치적 테러에 시달렸다. 특히 친일 부역 세력과 극우 집단이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의 상징이었던 몽양 여운형과 백범 김구 등을 암살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마침내 터진 한국전쟁 당시에는 좌우 양쪽에서 번갈아가며 집단학살을 동족에게 가했다. 두 번 다시는 겪지 않아야 할 역사의 비극적 순간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일부 집단이 '박근혜 보위'를 외치며 공공연하게 내전, 쿠데타, 테러, 살인을 일상적 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하는 스님과 웃으며 함께 사진을 찍는 문화방송 기자와 아나운서의 사진은 단순 의사 표시 수준을 넘어 그들의 의식세계를 무엇이 지배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3월9일 또는 10일 이루어질 헌법재판소 평결을 앞두고 탄핵 인용 여부와 함께 물리적 집단 충돌 우려가 우려로만 그치지 않는 현실이 될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지난 21일부터 인터넷과 SNS 공간을 달구고 있는 '청년 암살 살수단' 지원자 모집 메시지는 더욱 뜨거운 관심을 받을 것으로 본다.

방귀가 잦으면 똥이 마렵다는 말이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벌어진 희대의 암살 사건, 즉 김정일의 장남인 김정남 암살 사건으로 대한민국 국민은 하루에도 수십 차례 암살이란 단어를 듣고 있다. 여기에다 청년암살살수단까지 등장해 암살이란 단어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암살이란 단어를 듣고 이를 경계하는 마음을 갖는다. 하지만 극단적인 비정상 성격의 소유자는 이를 실행에 옮기려 할 수 있다. 재앙적 집단테러나 정치적 테러는 단 한 차례일지라도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29번의 경고에 대해서 응답해야 한다. 300번의 징후에 대해서도 무심코 넘겨서는 안 된다. 사이버 상에서 나대는 테러 협박범을 잡아들여야 한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엄단해야 한다.

황교안은 과연 탄핵 인용 뒤 테러 방지할 의지가 있는가?

이미 우리 사회는 테러라는 위험이 실제 상황으로 일어날 수 있는 자양분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이제 국가 공권력은 이를 미리 막을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통령 권한대행 시계' 제작·배포와 같은 '대통령 놀음'에만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 한가한 발상과 행보는 나라를 망칠뿐이다. 백색 테러를 막기 위한 특급 경계령을 발령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특검 연장 거부 같이 역사와 정의를 거스르는 일에만 관심을 보인다. 이를 보고 있노라면 탄핵 심판 이후가 걱정된다.

문재인 후보 테러설로 캠프 자체 경호를 강화하자 종편 등에 고정출연하는 정치평론가 가운데 몇몇은 실제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국민의 관심을 끌기 위해 문 후보 쪽이 '대통령 코스프레'를 한다는 비판을 계속하고 있다. 테러는 그들이 문재인을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테러조차 정치적 호불호로 재단을 한다. 바로 이런 비뚤어진 사고가 테러를 방조하는 것이다.

그 모든 테러, 즉 폭력은 나쁘다. 물론 예외는 있다. 흔히들 정당방위라고 해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폭력에 대한 폭력 말이다. 하지만 폭력에 대해 맞대응하는 정당방위조차 일부 언론과 정치 평론가들은 양쪽을 모두 비난하는 식으로 나올 것이다. 이들 또한 테러 방조범이나 다를 바 없다.

박근혜 탄핵과 새로운 권력교체를 계기로 테러를 부추기는 정치세력과 가짜안보 장사를 벌이는 집단, 친일매국 세력과 박정희-박근혜 부역 세력들을 제대로 몰아내야 한다. 더는 우리 사회에 테러와 테러를 입에 올리는 세력, 테러를 선동하는 세력이 발을 못 붙이도록 해야 한다. 테러를 걱정하는 사회는 분명 불안사회다. 위험사회다. 테러 없는 사회가 곧 안전사회다.

▲왼쪽부터 MBC 최대현 아나운서, 승려 출신 정한영씨, MBC 김세의 기자. ⓒ정한영 씨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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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주 박사는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를 지냈으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안종주의 위험 사회' '안종주의 건강 사회'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연재 칼럼을 써왔다. 석면,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등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보건 및 환경 보건 위험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석면, 침묵의 살인자> <위험 증폭 사회> 등 다수가 있으며,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해 <코로나 전쟁, 인간과 인간의 싸움> <코로나19와 감염병 보도 비평>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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