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14차 촛불집회가 열렸던 광화문 광장의 스타는 "염병하네" 아주머니였다. 민주주의를 고래고래 외치며, 특검 사무실에 등장하던 최순실 씨에게 일갈했던 바로 그분이다. "저는 청소한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치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월 100만 원 남짓 벌면서도 세금 꼬박꼬박 내고 열심히 일하며 아이들 키웠습니다"라는 말에는 자기 삶에 대한 자부심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존심이 강하게 베여 있었다.
난데없이, 최순실이 떠올랐다. 구치소에서 혼자 "염병하네"를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청소 아주머니와 반대의 이유로. 자기가 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으로 치자면, 최순실을 당할 자가 많지 않다(물론 박근혜 대통령이나 김기춘 전 비서실장, 우병우 전 수석 등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이들은 '후안무치(厚顔無恥)' 또는 '몰염치(沒廉恥)'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긴 하다). 열심히 일한 것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테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보더라도 '저 많은 일을 어떻게 다 했을까?'할 정도로 지독하게 바쁘게 살았다. 아주 작은 일에 대해서조차 허투루 대하는 바가 없었다. '이권 개입', '인사 전횡'이나 '국정 농단', '헌정 파괴'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의 성실함이다(일하는 스타일만 보면 최순실과 박근혜는 정반대고, 그래서 둘은 정말 호흡이 잘 맞는 한 쌍이다). 무엇보다 정부 예산, 조직, 인사, 사업을 다룬 능력과 노력은 가공할 정도다.
<최순실과 예산 도둑들>(정창수·이승수·이상민·이왕재 지음, 답 펴냄)에는 최순실과 박근혜, 그리고 그 일당들이 정부 예산을 얼마나 집요하고 치밀하게 도둑질했는가가 잘 정리되어 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에서도 이 책을 구입해 읽었고, 저자들 도움도 따로 구했다고 한다. 특별검사들 역시 정부 예산을 제대로 다뤄본 적은 없기 때문에, 이른바 '최순실 예산'의 실태와 문제점을 파악하고 죄를 추궁하기가 쉽지 않았다. 차은택 감독과 김종 전 차관 등이 앞장서 문화체육관광부 예산과 사업, 인사에 개입한 것은 그나마 어느 정도 알려졌다. 하지만 그것이 문화체육관광부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최소한 1조4000억 원의 '최순실 예산'이 책정된 것으로 파악되었고, 보건복지부·해양수산부·산업통상자원부·농림식품수산부·행정자치부·외교부·국무조정실 등 거의 전 부처에 걸친 예산 도둑질이 진행되었다(최근 특검은 미얀마 공적 개발원조 수사와 관련해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위원회까지 압수수색했다).
정부 예산의 구조와 실태, 작동 방식에 대해 잘 모르고선 불가능하다. 그래서 저자들은 관료들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문화체육관광부는 '블랙 리스트' 건까지 더해져 '징벌적 차원의 정부조직개편' 대상으로 논해질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공모세력은 기획재정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예산요구서와 사업 설명자료에 'VIP'라는 단어만 들어가면 무사 통과시켰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나 재외 해외문화원 예산이 매년 폭발적으로 늘어나도 "이 많은 예산을 깍지도 않고 자동문처럼 문을 그대로 열어 주었다"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만약 기획재정부가 다른 예산과 사업에 하듯 '최순실 예산'을 따지고 들었다면 상황은 크게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기획재정부 관료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 '갑 중의 갑' 공룡 조직 기획재정부의 권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조직 차원의 직무유기를 한 셈이다(같은 기간 '왕 장관' 최경환은 한동안 막혀 있던 기획재정부 인사에 물꼬를 텄고, 기재부 관료들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저자들의 분석과 예측은 우리를 더욱 당혹하게 한다. "김종 표 스포츠산업 예산은 최순실 사태에도 크게 상처받지 않고 2017년 그대로 살아서 진행되고 있다. 무엇보다 스포츠산업진흥법이 확실한 도장을 찍어준 이상 내년도, 내후년도, 그 이후에도 이 예산은 생명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아직까지 문체부 제2차관실에 살아남아 있거나 큰비가 그치면 다시 돌아올 김종 전 차관의 키즈들은 그래서 할 일이 많다."(<최순실과 예산 도둑들> 중 198쪽) 최순실이나 김종, 하물며 박근혜 대통령이 권좌에서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예산과 사업, 자리를 매개로 한 관료와 이익집단의 '거대한 이권 사슬'은 계속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촛불이 100일 동안 타오르는 동안, 400조 원에 달하는 정부 예산이라는 '눈먼 돈'을 뜯어 먹는 구조는 하나도 바뀐 것이 없다. 문화체육관광부도, 기획재정부도, 아니 다른 어떤 곳도 지금까지 달라진 건 없다. 아니, 어쩌면 달라질 것도 없다.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다음 정부는 '최순실 예산'이 집행한 것으로 감사원과 국회의 2017년 결산심사와 국정감사 등을 받아야 한다. 즉, 짜인 예산대로 써야만 한다. 더 황당한 것은 2018년 예산조차 각 부처가 올해 5월부터 기획재정부에 보내는 '예산 요구서'를 기초로 작성된다는 것이다. 내년 예산안에조차 '최순실 예산'이 상당 부분 그대로 반영되는 구조이자, 일정으로 되어 있다.
인수위원회 없이 출범해야 하는 다음 정부에게 '정부조직개편'이 미리 준비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듯, 내년도 '예산'과 '사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더욱 중차대한 숙제이다. "집권하면 일자리 추경을 실시하겠다"는 문재인 전 대표의 약속처럼 새로운 집권세력이 "무엇을 새로 하겠다"라는 주장은 오히려 쉽다. 반대로 "무엇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주장과 그것의 실행은 훨씬 어렵다. 새로운 일은 예산과 조직을 늘릴 기회니, 실현하는데 어려움이란 없다. 하지만 줄이고 없애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이렇게 '적폐'는 쌓여가고 '청산'은 멀어진다.
너나없이 '적폐청산과 새로운 대한민국의 건설'을 얘기한다. 청와대나 검찰 등 권력기관개혁과 정부조직개편도 미리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그걸로 부족하다. 정부가 움직이는 방식, 돈과 일이 만들어 지고 작동하는 방식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예산 도둑'은 최순실만이 아니다. 최순실은 과욕을 부린 탓에 만천하에 드러나 버린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집권을 꿈꾸는 후보와 정당이라면 '최순실과 그 일당들'만큼 노력해야 하고,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킬 수 있고, 그래야 바꿀 수 있다. '해야 할 일'(to do list)말고 '해서는 안 되는 일'(not to do list)을 지금부터 치밀하게 만들어 집요하게 해나가야 할 것이다. '적폐청산-정책편(또는 예산편)' 작업을 대선 과정은 물론 다음 정부 4년 내내 진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 예산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 어떻게 하면 '눈먼 돈'을 챙길 수 있는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청와대를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기획재정부를 비롯한 부처들과 콘텐츠진흥원 같은 기관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관료들은 어떻게 다룰 것이며 R&D와 ODA자금은 어떻게 집행되는지 훤하게 꿰뚫고 있어야 한다. 최순실만 한 반면교사(反面敎師)가 없다. 자칫 잘못하면 최순실한테 이런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음을 명심하자.
"(그것도 못하면서 집권하겠다고?) 염병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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