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을 대표하는 문화유산 화성(華城)은 1997년 12월 6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올해로 지정 20주년이다.
당시 국제기념물유적협회는 "화성은 18세기 군사건축물의 대표격으로 유럽과 동아시아 성곽 축조 기술의 특징을 통합했다"고 평가했다. 국제기념물유적협회 한국위원회 위원장이자 유네스코 위원인 동국대학교 이혜은 교수는 지난 2010년 11월 수원에서 열린 유네스코포럼에서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는 화성이 아름답고 독창적일 뿐 아니라 화성 축성 과정에서 보여준 정조대왕의 위민정신과 과학정신을 담은 창조성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처음부터 계획 하에 세운 성곽이라는 점, 외침 방어용 목적을 뚜렷이 지닌 가운데 동양과 서양의 기술을 아울러 활용했다는 점, 이전 조선의 성곽에는 흔치 않았던 방어용 시설이 추가되었다는 점 등이 화성의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 요인이다.
화성이 쉽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 아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장안문 등이 크게 파괴되었는데, 이를 현대에 복원했기 때문에 유적지로서 가치가 떨어진다는 의견이 많았다.
1997년 당시 고 심재덕 수원시장이 유네스코 이사회에 공개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분위기를 역전시켰다. <화성성역의궤>는 화성 축성 당시의 기록을 세밀히 담고 있다. 이 자료 덕분에 화성은 언제고 옛 모습 그대로 복원 가능하다.
의궤는 조선 왕실이 후세가 참고하도록 국가의 주요 행사 전반을 기록한 문서다.
지난해 6월에는 화성의 문화 가치를 더하는 새로운 발견도 이어졌다.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왕실 도화서 화원들이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위해 화성 시설물을 그린 <정리의궤> 성역도(城役圖) 제39권이 발견됐다.
프랑스 파리 동양어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정리의궤>와 달리, 그간 성역도는 행방을 찾기 힘들었다. 경매 처분된 후 추적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정리의궤>는 <화성성역의궤>와 함께 화성 축성과 관련한 전반적 내용을 기록한 자료의 하나다. 1797년~1800년 사이 정조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긴 과정을 담은 <현륭원원소도감의궤>, <화성성역의궤>에서 주요 내용을 발췌해 한글로 옮긴 문서다. <정리의궤>는 현재 발견된 가장 오래된 한글의궤다.
채색본 성역도를 찾은 이는 한국인이다.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더봄 펴냄)를 쓴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다.
저자는 책에서 정조와 다산은 화성을 통해 ‘평화롭고 평등하며 외세에 침탈당하지 않는 자주적 나라’를 그들이 꿈꿨다고 주장한다. 화성은 정조와 다산의 꿈을 집약한 건축물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정조가 화성을 축성한 이유, 해마다 화성으로 행차한 이유(능행(陵幸))도 이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정조는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에서 개최해 화성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저자는 정조가 화성을 통해 한양을 받치는 배후도시 건설을 꿈꿨다고 해석한다. 실제 정조는 1804년 국왕의 지위를 양위한 후, 상왕이 되어 화성에 거주했다. 저자는 "즉위 초 시해 위기에 처할 정도로 미약한 왕권에서 출발한 정조"가 "철저히 백성의 지지를 바탕으로 개혁정책"을 펼쳐 왕권을 강화해나갔다고 강조한다.
이어 "비록 정권이 미약하게 출발하여도 백성을 중심으로 정책을 추진하면 반드시 후세의 역사가에게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를 오늘날 화성의 의미로 되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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