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랜드>, 망가진 삶을 위로하다

[김경욱의 데자뷔] 뮤지컬 영화는 단순한 구조라 허술하다?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끔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한국에서 더 인기를 끄는 외화가 있다. 2012년 대통령 선거의 결과로 맨붕에 빠진 우리들을 위로해준 <레미제라블>(2012), 외화로서는 드물게 천만관객영화에 등극한 <겨울왕국>(2014), 그리고 엠마 스톤과 라이언 고슬링이 '골든 글로브'에서 주연상을 석권한 <라라 랜드> 등이 그 사례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세 편 모두 뮤지컬 장르라는 것이다. 한국영화가 새로운 시도를 통해 흥행을 모색할 때, 아직까지 성공사례가 나오지 않은 장르가 바로 뮤지컬이다. 뮤지컬 공연을 즐기는 관객층이 꽤 많은데도 그렇다.

뮤지컬은 할리우드 영화의 주요 장르의 하나로, 1930년대 경제대공황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이 장르의 가장 큰 특징은 일반적인 영화처럼 이야기가 펼쳐지다가 춤과 노래가 끼어드는 것이다. 주인공을 둘러싼 현실이 비록 어렵다 해도 춤과 노래가 시작되면 비관적인 전망은 모두 사라지고 장밋빛으로 변한다. 노래의 가사는 희망을 얘기하고 현란한 춤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래서 뮤지컬은 미국식 낙관주의, 도피주의와 판타지가 어우러진 장르로 평가된다. 장르는 흔히 부침을 겪기 마련인데, 뮤지컬은 쇠퇴기를 거쳐 뮤직 비디오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통해 명맥을 유지해왔다. 최근에는 간간히 주목받는 뮤지컬 영화가 등장하고 있다.

다미엔 차젤레의 <라라 랜드>에는 뮤지컬 장르의 전통과 변화 그리고 포스트모던 시대를 거쳐 온 흔적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오프닝 크레디트에서 1950년대의 뮤지컬 영화처럼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했다고 명시하면서도, 첫 장면은 현대 도시의 상징 같은 교통체증으로 넘어간다. 그런 다음 뮤지컬답게 운전자들이 자동차 밖으로 나와 춤과 노래를 부를 때, 꽉 막힌 도로의 답답함과 짜증은 멀리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춤과 노래가 끝나면, 현실은 다시 교통체증이 계속되는 도로이다. 이렇게 공간의 배경은 현대적이지만, 인물의 의상 등에서 원색을 강조함으로써 마치 1930년대의 테크닉칼라 영화를 보는 느낌을 준다. 또 영화를 보는 내내, <파리의 아메리카인>(1951), <사랑은 비를 타고>(1952), <쉘부르의 우산>1964) 등, 여러 편의 뮤지컬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말하자면, 고전과 현대 영화의 이미지와 정서를 절묘하게 버무려놓은 셈이다. 뮤지컬 영화는 단순한 이야기가 많고 그래서 허술하다는 지적을 받는데, 이 영화는 이야기 구조를 계절별로 나누어 전개함으로써 약점을 보완하려고 했다.

<라라 랜드>의 두 주인공, 미아와 세바스찬은 뮤지컬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다. 커피숍에서 일하는 미아는 영화배우가 되기를 꿈꾸고, 재즈피아니스트 세바스찬은 재즈클럽을 여는 게 꿈이다. 그들은 꿈의 도시 할리우드(아마도 '라라 랜드'는 할리우드가 있는 로스엔젤리스의 약자 'LA'에서 나온 제목일 것이다. 이 영화의 흥행에는 제목이 주는 미묘하게 낭만적인 느낌도 기여했을 것 같다)에서 성공을 위해 악전고투한다. 이 영화는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춤과 노래를 즐기면서 뮤지컬의 재미를 만끽하면 그만일 수 있다. 그런데 이야기의 설정에서 두 가지가 흥미로웠다. 특히 할리우드(그리고 한국영화)의 주류 영화에서 로맨스가 점점 사라져가는 추세에서, 뮤지컬 장르와 함께 로맨스가 재현되는 방식을 주목했다.

ⓒ판시네마 제공

먼저 하나는 미아와 세바스찬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로맨틱 코미디처럼 설정한 점이다. 그들은 첫 눈에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다소 티격태격 하다가 점점 가까워진다. 파티에서 만난 두 사람이 자신의 차를 찾으려고 밤길을 걷다가 춤과 노래(‘A LOVELY NIGHT’)를 하는 장면이 있다. 그들은 뮤지컬 영화의 전설, 진저 로저스와 프레드 애스테어를 흉내 낸다. 뮤지컬 장르의 컨벤션에 따르면 노래의 가사는 당연히 구애가 되었을 텐데, 여기서는 로맨틱 코미디를 따라 서로 상대가 자기 타입이 아니므로 관심이 없다고 주장한다.

다른 하나는 두 사람이 헤어지는 과정과 결말이다. 세바스찬은 친구 키이쓰의 재즈밴드에 들어가기로 한다. 그가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미아가 안정된 수입의 남자를 원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점점 바빠지게 되자 두 사람의 사이는 멀어진다. 미아에게 영화배우가 될 기회가 찾아오고 파리에서 촬영하게 되자,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게 된다. 다미엔 차젤레의 전작 <위플래쉬>(2014)에서, 앤드류는 최고의 드러머가 되기 위해 애인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그는 결국 꿈에 가깝게 다가가지만, 애인은 돌아오지 않는다. 일에서의 성공과 연애는 양립할 수 없다는 차젤레(또는 대다수 현재의 청춘남녀들?)의 생각이 <라라 랜드>에서도 반복된다.

이전에 미아는 세바스찬이 대중의 입맛에 맞는 재즈를 연주하며 신나게 공연하는 모습을 보고 실망한다. 세바스찬이 성공을 거두고 있을 때, 미아의 일인극 공연은 실패로 끝난다. 미아는 세바스찬에게 꿈을 포기했다고 비난하지만, 그녀는 혹시 세바스찬의 성공을 시기한 건 아니었을까? 이것은 남녀가 동일하게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아니면 그녀의 사랑의 대상이 자신의 자아 이상과 일치하는, 꿈을 간직한 세바스찬이었는데 그것이 깨졌기 때문일까? 그녀가 그에게 매혹된 순간은 그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가운데 레스토랑에서 고독하게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았을 때이다.

이 영화는 별이 가득한 프로레타리움에서 미아와 세바스찬이 날아오르는 장면 등, 뮤지컬답게 로맨틱한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진짜 사랑한다는 느낌을 주는 장면은 별로 없다. 그들은 동거까지 하는데도, 연인과 친구 사이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바스찬이 배우를 포기하고 부모의 집에 칩거하고 있는 미아를 찾아가는 이유는 구애가 아니라 오디션을 보라고 권유하기 위해서이다. 그가 미아에게 일인극을 시도하라고 권유하고, 그녀와의 이별을 감수하면서도 배우의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용기를 줄 때, 그는 애인이 아니라 멘토 역할을 한다.

그들의 이별은 이 낭만적인 영화에 일말의 씁쓸함을 안겨주지만,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대 사회를 진단하면서 주장한 내용을 생각하게 만든다. [리퀴드 러브]에서 그는, ‘연인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헌신하는 일은 ‘길게 보면 의미가 없는’ 일로 변화했다. 관계에 대한 투자는 내가 헌신하더라도 상대방의 배신으로 흐트러질 수 있으므로 안전하지 않다. 우리가 헌신적인 사랑을 할 수 없는 이유, 상대방이 주는 만큼만 사랑을 베풀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일정 선을 유지하는 행위에는 모두 이런 생각이 잠재되어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 영화에는 미아와 세바스찬이 가깝게 교류하는 인물도 거의 등장하지 않고, 대부분 스쳐 지나간다.

5년의 시간이 흐르고 미아는 남편과 함께 우연히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재즈 연주를 하는 세바스찬을 보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이 헤어지지 않았을 때를 가정하는 장면이 10여분에 이르는 춤과 노래로 펼쳐진다. 여기서 차젤레는 뮤지컬의 거장 빈센트 미넬리가 <파리의 아메리카인>에서 연출한 그 유명한 마지막 장면을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찍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장면을 위해 두 사람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을까?

영화는 레스토랑을 나서는 미아와 연주하는 세바스찬이 멀리서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장면으로 끝난다. 헤어졌지만 두 사람 다 꿈을 이루었고, 각자의 나르시시즘은 충족되었다. 그리고 관객들은 '꿈꾸는 사람들을 찬양하고, 망가진 삶들을 위로한다'고 노래하는 영화를 즐겼다. 그러므로 더 바랄 게 뭐가 있겠는가!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김경욱

연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동국대와 중앙대에서 영화이론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YU HYUN-MOK>(2008),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등이 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