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자, 돈 받으려면 사용처 먼저 내라?

외교부 "1억 분할 지급…일본 배상금 아니라는 입장" 시인

지난해 한일 양국의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의해 설립된 '화해 치유 재단'에 일본 정부가 10억 엔을 출연하기로 결정한 가운데, 생존해 있는 피해자가 본인에게 배당된 1억 원 규모의 현금을 한꺼번에 수령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여 논란이 예상된다.

일본 정부는 지난 24일 각의(국무회의) 결정을 통해 화해 치유 재단에 10억 엔을 내기로 결정했다. 이에 정부는 한국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및 대리인에게 직접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외교부는 25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 사업'을 위해 현금을 지급하겠다며 한일 간 위안부 합의가 결정됐던 지난해 12월 28일을 기준으로 생존 피해자에 대해서는 1억 원, 사망 피해자에 대해서는 2000만 원 규모의 지원금을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외교부는 피해자 및 대리인에게 이 금액이 일괄적으로 지급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일차적으로 피해자 분들의 수요를 조사한 뒤 효과적으로 금액이 쓰일 수 있도록 1억 원에 준한 금액을 일정 기간에 따라 나눠서 드리는 것을 재단 내에서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피해자들이 일괄적으로 1억 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재단에 어떤 곳에 돈을 쓸지 밝혀야 1억 원을, 그것도 여러 번으로 나눠서 수령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피해자가 특별한 목적이나 사용처를 밝히지 않고 일시금을 원할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는 질문에 이 당국자는 "재단에서 판단을 해야 할 문제"라면서 "피해 당사자 본인을 위한 측면에서는 일시금보다는 분할 지급이 더 도움이 된다고 재단에서 논의한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일시금 지급보다 분할 지급이 피해자에게 더 도움이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 당국자는 "진정으로 피해자가 필요한 곳에 지원하겠다는 취지를 감안한다면 큰 돈을 드리는 것 보다는 그런 방식(분할 지급)이 진정한 치유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당국자는 피해자들의 수요를 조사해 일정한 목록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는 "피해자의 의견을 수렴하고 조정해서 재단에서 일차적인 목록을 만들 것이고 이를 현금 지급하면서 확인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피해자들이 받을 1억 원 남짓의 금액에 대해 재단 이사회가 사실상 그 돈의 사용처를 심사하겠다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이 당국자는 "개별 피해자를 만나서 현금 지급되는 것에 대한 사용처를 물을 건데, 재단에서 보기에 당장 큰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해되면 일시금으로 지급하는 것을 결정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는 "(피해) 할머니들의 상처 치유와 관계 없이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인다면 재단에서 판단을 해야 하지 않나"라며 "할머니들의 현재 상황과 가족 관계를 고려했을 때 이러한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화해 치유 재단의 김태현 이사장과 외교부, 여성가족부 관계자 등이 공식적으로 재단이 발족되기 이전에 피해자들의 의견을 수렴했을 때 분할 수령 방식을 원했느냐는 질문에 이 당국자는 "지금까지 의견 수렴은 사실 가장 큰 부분이 지난해 위안부 합의의 의의를 설명하는 것이었다"고 밝혀 지급 방식을 두고 피해자들의 의견이 모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당국자는 "지금 현재 생존 대상자가 46명인데 본인의 의견을 확실히 표현하실 수 있는 분은 그렇게 많지 않다"며 가족들이 대신해서 이 금액을 수령하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 1억 원의 자금을 일시금으로 지급할 경우 피해자의 상처 치유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쓰일 수 있음을 우려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생존자와 사망자를 포함해 238명의 피해자 및 가족 대리인에게 일괄적으로 특정한 금액을 지급할 경우, 자칫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주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이러한 방식을 택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이에 대해 이 당국자는 "한일 간 합의에서 일시금이나 분할 지급과 같은 내용은 없었다"면서 "재단에서 맞춤형 지원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우리가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윤병세(오른쪽)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24일 도쿄에서 양자 회담을 하기 전 악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일본이 낸 10억 엔, 배상금 아니어도 괜찮다?

한편 일본은 이번 10억 엔 출연이 배상금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 당국자는 "일본은 배상금이 아니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며 "이것이 저희들이 이번 합의의 성격과 법적 의미에 대해 설명 드린 점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일본이 배상금이 아니라고 주장하더라도 합의의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결국 박근혜 정부가 일본의 법적 배상을 포기한 채 위안부 문제를 매듭지으려 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동안 정부는 일본이 출연할 10억 엔에 사실상 배상금의 성격이 있다고 밝혀왔다. 특히 김태현 이사장이 지난 5월 31일 재단 설립 준비위원회 발족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10억 엔이 배상금이 아니라 치유금이라고 밝히며 논란이 되자, 그다음날부터 배상금의 성격이 있다고 수습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상의 배상금이라는 정부의 성격 규정은 유효한 것이냐는 질문에 이 당국자는 "공식적인 명칭과 관련해서는, 양국 정부의 입장 차이가 있는 현실적 제약이 있다고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며 그간 정부가 밝힌 입장에서 한 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 이번에 일본이 내놓은 10억 엔은 일본법상 일본 국가배상법이 규정하고 있는 '배상 상환 및 환불금'이 아니다. 이 당국자는 "일본 각의에서 결정한 것은 '국제기관용 등의 거출금'이다. 과거에 각의에서 결정한 사례로는 아시아여성기금(1995년 일본 정부가 민간과 함께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조성‧발족했던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이 있는데 이 경우에는 경제협력 이라는 표현이 들어가있다. 이번에는 그것과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이 출연할 10억 엔에 대해 ODA(정부개발원조) 예산이다, 경제협력 예산이다 라는 지적이 있었다"며 "실제 1990년대 아시아 여성기금이 경제 협력의 명목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원금 지급 이후 소녀상 철거?

일본이 10억 엔을 출연하는 조건으로 서울 종로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위치한 '평화비'(소녀상)의 철거 및 이전을 요구할 것이라는 관측이 높았다. 하지만 일본은 우선 10억 엔을 출연한 뒤 한국 정부에 소녀상 철거와 관련, "적절한 해결을 위한 노력"을 촉구했다.

소녀상 문제와 관련, 지난해 양측은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주한 일본 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하고,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 방향에 대해 관련 단체와 협의를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 합의를 이행할 것이냐는 질문에 이 당국자는 "합의 이행을 언제 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하다"며 "지금은 소녀상 문제를 거론하거나 그와 관련해서 관련 단체와 협의할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고 밝혔다. 그는 "이런 부분에 대한 일본 측의 이해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는 정부가 당장 소녀상을 철거하거나 이전할 계획은 없지만, 피해자들에게 지원금을 모두 지급하고 재단 사업이 마무리되면 소녀상과 관련한 조치를 취할 가능성을 열어둔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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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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