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가 화해 강요…10억 엔 필요없다"

'화해 치유 재단' 졸속 출범…예고된 갈등 폭발

한일 위안부 합의 후속 작업으로 진행된 '화해 치유 재단'이 공식 출범했으나 대학생들의 반대 시위와 캡사이신 살포 등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여기에 재단이 기본 자금과 대략적인 사업 계획도 확정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면서 충분한 사회적 합의 없이 무리하게 재단을 출범시킨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28일 화해 치유 재단은 서울 서대문 인근에 위치한 바비엔 스위트에서 1차 회의 및 현판식을 갖고 공식 출범을 선언했다. 재단은 이후 기자간담회를 계획했으나, 오전 11시 경 11명의 대학생들이 기자간담회장에 들어와 피해자를 외면하는 한일합의를 파기하라고 구호를 외치면서 간담회는 예정보다 30분 정도 미뤄졌다.

이들은 미리 준비해 온 성명서를 통해 "한국 정부가 강행하고 있는 이 (화해 치유) 재단은 배상금도 아닌 10억 엔으로 가해국의 모든 책임을 떠안으려 하고 있으며, 심지어 일본에게 모든 합의를 이행했다는 면죄부를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화해는 가해자가 강요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피해자가 원하지 않은 합의를 진행해 놓고, 10억 엔을 받아 재단을 만드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폭력"이라면서 "10억 엔은 필요 없다"고 외쳤다.

단상에서 대학생들의 구호가 계속되자 경찰은 기자간담회 진행을 위해 학생들을 한 명씩 끌어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간담회장 바깥으로 쫓겨났지만 그 이후 연행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 28일 서울 서대문 바비엔 스위트 그랜드볼룸 홀에서 '화해 치유 재단' 출범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사진은 간담회 전 단상에 올라와 한일 합의 폐기 및 재단 설립 중단을 외치는 대학생들 ⓒ프레시안(이재호)

한편 기자간담회가 끝난 이후 한 남성이 김태현 재단 이사장에게 캡사이신으로 추정되는 물질을 뿌려 한때 소란이 일기도 했다. 이 남성은 기자간담회장 안에서 시위를 벌인 대학생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근혜 화법' 차용했나? "논쟁에 빠져 희망의 불씨 거뜨리면 안돼"

예정보다 30분 늦게 시작된 기자간담회에서 김태현 이사장은 "저와 재단 이사회는 지난 한일 간 위안부 합의로 인해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할 희망의 불씨를 찾았다고 생각한다"면서 "합의를 둘러싼 논쟁에 빠져 이 불씨를 꺼뜨려 버리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설립 준비 위원장으로서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 분들이 정말 희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37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났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설립 준비위원장 취임 직후 서울과 지방, 나눔의 집 등을 찾아다니며 피해자분들과 1시간 이상 씩 대화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저의 진심을 알아 주신 것인지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피해자 분들께서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재단 사업을 격려해 주셨다"며 "극히 소수의 피해자 분들 제외하고는 재단이 설립되면 사업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혀주셨다"고 전했다.

김 이사장은 또 "어제(27일)는 점심 때 피해자 및 가족 몇 분을 모시고 함께 식사하면서 그분들께 재단이 공식 출범한다는 사실을 보고드리고 앞으로 재단 사업과 관련한 의견을 청취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덧붙였다.

그는 할머니들이 자신에게 "정부가 나름대로 노력했다, 하루라도 빨리 재단이 설립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을 포함해 주로 재단에 긍정적인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소개하는데 기자간담회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 김태현 화해 치유 재단 이사장이 재단 출범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본자금도, 사업 계획도 없는 재단…일단 출범부터?

한편 지난해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 일본이 '일괄 거출'하겠다고 밝힌 10억 엔은 여전히 지급되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화해 치유 재단은 사업 진행을 위한 기본 자금도, 그리고 그 자금이 어디에 쓰일지 대략적인 사용처도 확정하지 못한 채 일단 출범부터 하는 기이한 상황을 연출했다.

28일 <한국일보>는 일본이 지급할 10억 엔과 관련,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재단에 출연할 10억 엔을 할머니들 지원 외에 일본어를 배우는 한국 유학생들의 장학사업에 사용하자고 우리 정부에 제안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보도했다.

또 같은날 일본 <교도통신>은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무대신이 "일한 양 정부가 (재단의) 사업 조정을 실시하고 있다. 그 결과에 따라 (10억 엔의) 지출 시기가 결정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 출연금의 사용처를 두고 한일 양국이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0억 엔이 장학 사업에 쓰일 수 있는지에 대해 김 이사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아시다시피 재단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와 손상된 존엄을 치유해주기 위한 사업을 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라고 답했다.

재단의 설립 목적을 확정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존엄을 회복하는 사업을 하는 것이 저희들의 목적"이라며 "그 외에는 이 돈을 사용할 수도 없고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하지만 김 이사장의 공언대로 10억 엔이 온전히 할머니들의 치유금으로만 쓰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난해 합의 당시 양측은 "일한 양국 정부가 협력하여 모든 위안부분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을 행하기로 함"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재단의 사업 집행에 있어 일본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에 향후 재단 사업 계획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 이사장은 "아마 10억 엔은 할머니들을 지원하는데 다 쓰일 것"이라는 답변 외에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또 재단의 골격인 정관이 마련됐느냐는 질문에도 "오늘(28일) 통과시켰는데, 재단의 홈페이지가 만들어지면 공개할 예정"이라는 것 외에 추가적인 설명이 없어, 정치적인 논란이 되기 전에 일단 재단을 공식화하는 졸속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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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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