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 암 노인, 여자를 죽이다

[프레시안 books] <만약은 없다>

지난해 소셜 미디어에서 군대 간 의사의 이야기가 화제였다. 갓 전문의가 된 이들이 군대에서 겪은 에피소드다. 상대적으로 의학 지식이 떨어지는 군의관이 아픈 훈련병인 초보 전문의를 치료해야 했다. 군의관은 솔로몬에 버금가는 지혜를 발휘했다. 그는 아픈 전문의끼리 서로 진찰하고, 증세를 기록하도록 지휘하기만 했다. 이 이야기가 우스워 많은 누리꾼이 글을 공유했다.

2013년에는 의료 현장에 흉부외과 전공의(레지던트)가 부족하다는 글도 화제가 됐다. 구체적인 응급 사례가 전제된, 응급실에 흉부외과 전공의가 없어 살릴 수 있는 환자를 살리지 못하는 의료 현실이 안타깝다는 글이었다.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 <골든 타임>에서 묘사된 급박한 응급실 상황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는 이 글의 영향으로, 한동안 흉부외과 전공의를 늘려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도 여럿 쏟아졌다.

이 글들을 쓴 이는 한 사람이다. 고려대학교 병원에서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취득하고, 현재는 충청남도 소방본부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는 의사 남궁인 씨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의사로서는 특이하게 피아노를 치고, 대중음악과 젠트리피케이션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무엇보다 문학에 열정을 불태우는 그가 쓴 글에는 서정이 가득하고, 현장의 경험이 구체적으로 녹아났다.

그가 쓴 생생한 이야기는 소셜 미디어뿐만 아니라 여러 매체에도 꾸준히 실렸다. 이 이야기를 묶은 책이 <만약은 없다>(문학동네 펴냄)다.

사실을 바탕으로 약간의 허구를 담은 이야기 서른여덟 편이 수록된 이 책은 크게 두 편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의료 현장에서 일하며 겪은 에피소드가 주로 수록된 2부 '삶에 관하여'다. 앞서 언급한 군대 이야기를 비롯해, 의외의 상황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이야기가 다수다.

이불을 두고 "아픈 남편"이라며 신고한 조현병 환자를 입원시키기 위해 구급대원이 기지를 발휘한 이야기, 2010년 남아공 월드컵 16강, 우루과이전에서 이청용이 동점골을 넣는 순간 오래도록 앓은 아버지를 잃은 아들이 웃지도, 울지도 못한 이야기에는 농도 짙은 삶의 애환이 서렸다. 모두가 기피하는 크리스마스 당직을 자처한 그가 하루 종일 몰려드는 응급 환자와 씨름한 후, 당직 결과를 보고하는 마지막 글은 짧은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책을 마무리하며 독자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태 제 책은 이러이러했습니다. 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듯하다.

책의 무게중심은 1부 '죽음에 관하여'에 쏠린다. 쉽게 책장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세밀히 묘사된 죽음의 기운이 가득하다. 저자는 문학적 상상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삶에서 막 죽음의 경계선을 넘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독자가 깊이 각인토록 한다.

유달리 자살과 관련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다량의 수면제를 먹은 후 깨어난 이는 "괜찮다"며 의연히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려 한다. 의료진은 안심하며 그의 퇴원을 허락한다. 퇴원한 순간, 그는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려 한 번 실패한 죽음을 확실히 마무리한다. 의사는 그가 그토록 다가가고자 한 죽음의 이유를 알 수 없다. 눈을 감을 때마다 얼굴이 으스러진 그가 찾아온다. 의사 역시 한동안 자살의 열망에 시달린다. 첫 에피소드인 '죽고자 하는 열망' 편은 저자가 이 책을 엮은 이유처럼 이해된다.

▲ <만약은 없다>(남궁인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이 글 외에도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죽음이 이어진다. 때로 이야기에 실린 안타까움은 넘친다 싶을 정도의 감상에 더해져 숨 막힐 정도로 짙다. 자살하기 위해 손목은 물론, 발목까지 썰려 한 노인의 모습에서 저자는 예수의 모습을 뽑아낸다. 교통사고로 실려온 아내의 생사를 묻는 남편의 이야기는 섬뜩한 반전으로 끝난다. 치료도 포기한 암 말기 환자인 노인은 운전하다 극심한 통증으로 도로 위에서 정신을 잃는다. 그 차에 들이받힌 여성 운전자가 응급실에서 사망한다.

노인을 비난할 수 있을까. 의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고 이 물음은 이내 독자를 향한다. 누가, 감히 죽음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느냐고. 이 물음은 이 책에서 유일하게 허구로만 채워진 '치밀하고 압도적인 스위치' 편에서 더 구체화한다. 의식을 잃은 채 살아날 가망성이 없는 환자, 연명 치료가 가족과 환자 모두를 더 힘들게 하는 환자에게 병원은, 의사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저자는 스스로 질문한다. 가상의 이야기는 의사가 안락사를 '선물'하며 끝난다. 한국의 의사는 절대 내릴 수 없는 선택임에도 말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서 오느냐는 생생한 현실의 이야기다. 그 최전선에 선 이는 의사다.

주로 응급실에서 그가 마주한 삶과 죽음의 현장은 처참하고, 급박하다. 피가 흥건하다. 글솜씨 좋은 저자가 의사였기에, 자살자와 교통사고 환자가 몰려드는 응급실 의사였기에 <만약은 없다>에는 서민의 애환이 가득하고, 일류 소설가도 흉내 내지 못할 죽음의 냄새가 짙다. 책에 수록된 모든 이야기가 우리의 드라마고, 대서사시다. 이 책에는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들의 인생이 담겼기 때문이다. 1부와 2부에 실린 글의 성격이 급전환되어 약간의 아쉬움이 있지만, 이 정도로 생생한 열기를 지닌 책은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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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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