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乙巳五賊) 첩 사양하고 죽음 택한 의기 '산홍(山紅)'

매국노 꾸짖은 '진주기생' 정부포상 추진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경남 진주 기생(妓生) 산홍(山紅)에 대한 정부포상이 추진된다고 한다.

진주문화원 추경화 향토사연구실장은 의기 논개(論介)의 정신을 이은 진주기생 산홍의 명예회복을 위해 정부포상을 추진 중이라고 4일 밝혔다.

추 실장은 "통영 기생 이국희·정막래 등 3·1운동으로 대통령 표창이 추서된 일이 있어 산홍도 충분한 자격이 된다"고 말했다.

▲ 1930년대 평양기생학교 음악교육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산홍은 진주교방에 속했던 기녀로 논개의 절의를 계승한다는 자존심이 충만했다고 한다. 1863년생으로 추정되고 재색이 빼어났던 것으로 전해져 온다.


산홍(山紅)은 구한말 3대 문장가이자 애국지사인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1855~1910년)이 쓴 ‘매천야록’에서 만날 수 있다.

‘매천야록’ 광무 10년(1906)조에는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이 돼 줄 것을 요청하자. 산홍이 사양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첩이 비록 천한 창기이지만 사람 구실하고 있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이지용이 크게 노해 산홍을 두들겨 팼다”고 기록돼 있다.

이지용은 1905년 내무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서명한 을사오적(乙巳五賊) 중 한 사람이다. 1907년에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됐으니, 그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대단했다. 그가 진주를 방문한 흔적은 촉석루 벼랑에 그의 이름을 새겨 놓은 데서 알 수가 있다.

이 일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절개를 칭찬해 마지않았으며, 황현 선생 또한 산홍의 기개를 세상에 소개하기 위해 매천야록에 당시의 일을 기록해 두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을 전해들은 어떤 사람은 이지용에게 시를 지어 주면서 희롱까지 했다고 하니 그 여파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온 나라 사람이 다투어 매국노에게 달려가 / 노복과 여비처럼 굽신거림이 날로 분분하네 / 그대 집 금과 옥이 집보다 높이 쌓였어도 / 일점홍(一點紅)인 산홍은 사기가 어렵구나"

▲ 진주 의기사. ⓒ진주시청

진주성 안에는 임진왜란 때 왜장을 안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나라를 위해 산화한 논개를 기리기 위한 사당(祠堂)인 ‘의기사’가 있다. 예부터 진주 기생들은 의기 논개의 충절을 사모했는데, 산홍 역시 그러했다. 그곳에 산홍이 '의기사감음(義妓祠感吟)'이란 제목으로 시 한 수를 남겼다.

▲ 진주기생 산홍의 시. ⓒ진주시청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 두 사당에 또 높은 다락 있네 / 일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 놀고있네"

논개는 왜장을 안고 몸을 날려 천추에 꽃다운 이름을 남겼건만, 자신은 일없는 세상에 태어나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나 놀고 있음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또 의기사 아래 남강 절벽 바위에는 '山紅'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누가 언제 새겼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충정에 감복한 사람이 새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 매천 황현의 시. ⓒ진주시청

아울러 의기사 오른쪽에는 또 한편의 시가 걸려있는데 매천 황현의 작품이다.

"풍천나루의 강물은 아직도 향기로우니 / 머리와 수염을 깨끗이 씻고 의로운 / 논개에게 절하노라 / 아름다운 성품으로 어떻게 적장을 죽였던가 / 죽음을 각오한 채 거룩한 뜻을 단행했네 / 장계의 연로자들은 고향 사람이라 자랑스러워하고 / 촉석루에서는 단청하고 순국함을 제사지낸다 / 화려한 왕조 돌아보면 인물이 많다 하지만 / 기생이었어도 오랜 세월 그 이름 한결같이 빛나리"

1898년 매천이 진주를 방문해 의기사에 참배하고 지은 시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비 매천 황현, 을사조약 때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지용을 나무란 지조 높은 진주 기생 산홍의 시가 나란히 논개 사당에 걸려있다는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발행된 대한매일신보에도 관련 내용이 실려 있다. 1906년 11월 22일 2면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 앞에 당당함은 일개 기생이 아니라 절대 권력에 용감하게 맞서 싸운 기개 어린 항일투사로 보는 게 마땅하다'고 실었다. 이지용이 산홍을 총애한다는 설은 각 신문에 보도되기도 하는 등 널리 알려졌다.

이후에도 이지용은 산홍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했는데 1908년 2월 마침 지인의 생일잔치에 초대되자 이지용이 또 다시 보석 반지 등 거금을 주며 술에 취해 첩이 돼 달라면서 공갈협박을 일삼았다.

조선말 유학자인 양회갑(1884~1961)은 자신의 시문집 정재집(正齋集)에서 ‘기녀 산홍이 매국노의 죄를 나무라며 잠자리를 거절하고 스스로 죽다(妓山紅 數罪賣國 賊不許寢 自死)’라는 시를 지어 산홍의 절개를 칭찬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의로운 일을 한 기생을 의기(義妓)라고 한다. 진주기생 산홍 또한 “기생 줄 돈이 있으면 나라를 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하며 친일파 인사를 꾸짖어 논개로 대표되는 의기의 맥을 이었다.

추 실장은 "매국노이자 당시 최대 권력자의 요구를 거절하고 지조를 지킨 산홍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요 순국항일지사"라며 "영원히 후세에 훈육자료로 삼기 위해 정부포상을 신청하기로 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편, 국가보훈처는 자결 순국자 38명을 이미 정부포상 한 바 있다. 만약 산홍의 포상이 성사되면 39번째 순국항일투사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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