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건축왕에게 감사하라 한 이유는?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조선물산장려회관을 건설하다

1928년 1월 19일 <동아일보>에는 "조산 물산 장려 운동 경성지회 설립"이라는 작은 기사가 실렸다. 지난 1월 16일 오후 경운동 천도교기념관에서 경성지회를 설립하면서 새로이 15명의 이사를 선임한다는 내용이었다.
비록 작은 기사로 소개되었으나, 그날의 모임은 조선 물산 장려 운동 황금기의 도래를 알리는 시발점이었다. 새로 선임된 이사진에는 정세권을 비롯한 산업계 인사들이 참여하면서 오랜 기간 침체기에 빠졌던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922~1923년 아주 짧은 활성화 시기의 조선물산장려회는 조선 물산을 애용하자는 가두 행진과 선전 활동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곧 이은 침체 기간 중에는 회관 임대료를 걱정할 만큼 상황이 악화되었고, 물산장려회에 참여한 명망가들은 어떻게 하면 쓰러져가는 조직을 재건하느냐를 고민했다. 따라서 1923~1928년 사이 제대로 된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1928년을 기점으로 정세권을 위시한 상공업자 그룹이 조선물산장려회에 참여하면서 실질적인 사업들이 시작된다.

1928년 경성지회 이사로 조선물산장려회와 인연을 맺은 정세권은 1929년 본부 상무이사로 더 큰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하였고, 1930년부터는 막대한 재정을 지원함과 동시에 전임 상무직을 맡으면서 사업 전반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 조선물산장려회의 선전 활동 광경, ⓒ독립기념관

'조선 물산 애용'의 표어적 의미만을 생각하면, 이는 소비운동에 한정된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사실 초기의 물산장려회는 조선 물산 애용에 집착하면서 조선 물산 생산에 관한 관심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물산을 애용하기 위해서는 조선 물산의 생산과 판매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것이었고, 상공업자 그룹의 참여는 그렇기에 일대 전환점이었다. 이를 통해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은 단순한 조선 물산 소비 촉진 차원에서 벗어나, 조선 물산 생산 독려와 판매 활성화에 이르기까지 대폭 확대된다.

조선물산장려회가 특히 사활을 걸었던 역점 사업의 하나는 조선 물산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공간의 확보였다. 당시 조선 상공업은 소상인과 소공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였기에, 이들의 물품을 일반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판매 채널(상품 진열 및 판매소)의 확보가 절실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만들어 놓은들 소비자들이 그 물건의 존재를 모른다면, 판로 자체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그 물건은 시장에서 배척됨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접근성이 높은 경성 요지에 조선물산진열관, 또는 조선물산장려회관의 건립은 지상 과제였다. 그리고 정세권이 이 일을 해낸다.

물산장려회는 1930년 5월 16일 제8회 정기 대회에서 물산장려회관의 건축과 진열관 설치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1931년 9월 종로구 낙원동 300번지에 물산장려회관이 준공되고 조선물산진열관이 개설됨으로써 물산장려회는 상설적인 소비 판매 기관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이 되살아나면서 회관 건립이 추진되자, 조선의 언론과 산업계가 거는 기대는 대단했다. 1931년 6월 15일에 열린 정초식에는 조선일보사 사장 안재홍을 비롯해 동아일보사 대표 함상훈, 중앙상공협회 대표 양재창 등 유력 인사가 참여해 비상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회관 건축 과정에는 수많은 난관이 있었다. 조선물산장려회 내부에서조차도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기에 회관건립이 불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회관 비용을 어떻게 조달하느냐'였다. 회관 건립 비용에는 부지비 5000원과 건축 공사비 1만5000원, 총 2만 원이 필요하였다. 기부금을 모집해 회관을 건립하자는 의견에 다수의 동의도 있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기부금은 모이지 않았다. 지리멸렬한 시절을 보낸 조직이 새롭게 거창한 사업을 진행하려고 하니 '기부금을 십시일반 모읍시다'라는 주장이 현실화되지 않은 것이다. 결국, 회관 건축비 전액은 정세권이 부담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정세권의 증언이다.

"제 제안으로 회관 건축비 지급 방법을 동정금(기부금)으로 하자는 결의가 있었고, (기부금으로 회관 설립을) 반대하는 의견도 없었다. 그러나 책임 간사는 이를 확정 발표하지 않고 차일피일 연기하다가 회관 건축비는 일전도 건축자(건양사)에게 지급되지 않았다. (건양사가 모든 건축비를 부담하였기에) 건물은 건축자 건물이 되고 만 것이다."

증언의 요지는 회관건 설비를 기부금으로 하자고 의견을 모았으나, 조직에서 해당 의견을 확정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미 정세권의 건양사에서 건물 건립을 진행 중이었음에도 건축 비용이 들어오지 않으니, 결국은 회관을 시공한 건설 업체(정세권의 건양사) 소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으로 설명을 하면, 자본이 부족한 건축주가 건설 회사에게 우선 건물 시공을 시작하면 중간에 중도금을 주겠다고 구두 약속을 하였는데, 건축주가 차일피일 중도금 지급을 미루더니 결국, 지급하지 않았기에 건물 소유가 건설 회사로 된 것이다. 중도금 지급이 안 되는 상황에서 건물 시공을 진행하는 것은 21세기 현재에서도 매우 힘든 상황이다. 중도에 공사를 중지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그런데도 정세권은 자비로 회관 건설을 마무리한다.

"다수의 동지가 집합하여 기공식을 한 회관을 실물 운동이라 (폄하)하여 (회관 건립 공사를) 중지한다면, 이는 위축된 기백입니다. 제 힘이 닿는 곳까지 하여 회관 건축을 완성하였고, 순조선 물산을 수입하여 1, 2, 3층에 진열하고 옥상에는 기와 간판을 세워 (물산장려회)깃발을 높이 걸었습니다."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 <장산>의 표지에 나온 건물은 낙원동 300번지에 신축된 조선물산장려회관으로 추정된다.

▲ <장산> 2권 2호 표지(1931년 2월호). (<장산>은 매우 희귀한 자료이다. 자료 제공자 연세대학교 정용서 교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정용서

조선물산장려회관 건립은 조선물산장려회에서 조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룬 사업이었음에도 아무도 해당 건물 설립 자금을 지출하지 않았고, 그만큼 회관 설립 과정은 지난하였다. 이를 알기에 만해 한용운은 "백난중분투하는 정세권 씨에게 감사하라"는 글로 정세권의 공을 치하하였다.

▲ 한용운, '백난중분투하는 정세권씨에게 감사하라'. ⓒ<장산>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인의 자급자족을 고취시키는 물산장려회에 대하여 나는 호감을 가집니다. (물산장려회의) 정신 (또는 방향) 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비난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른 사람에게 의존적인 사람 혹은 심적으로 쇠약한 조선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정신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번에 그 어려운 중에서 회관을 건설하고 (물산장려회의) 경리를 맡은 정세권 씨가 백난중에서 회관을 완성하고자 고군분투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장래 더욱 발전되기를 믿으며, 집 짖는 것도 고마운 일이나 그것보다도 장래에 이용을 더욱 뜻 깊게 하기를 바랍니다."

정세권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설립된 물산장려회관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특히 전시관에서 개최되었던 조선물산 진열행사(염매시)는 대중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물산장려회의 주장처럼 조선물산장려회관은 '조선 산업전(産業戰)의 진영(陣營)'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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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부동산/도시계획) 취득 후,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환경대학원)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부동산 금융과 도시/부동산개발이며, 현재는 20세기 초 경성의 도시개발과 사회적기업과 경제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Urban Hybrid (비영리 퍼블릭 디벨로퍼)의 설립자겸 고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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