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9번 투옥한 독립운동가, 누가 그를 지웠나?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안재홍과 동지적 연대를 맺은 건축왕

1920년대 급격한 부를 축적한 정세권은 대(大)자본가로 성장하는 와중,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가 참여한 민족운동 관련 조직 중 공식적 기록으로 확인 된 것에는 조선물산장려회를 비롯한 양사원, 신간회, 조선어학회 등이 있다. 아래는 국가보훈처의 공식 기록이다.

"1923년 1월 조만식(曺晩植)‧안재홍(安在鴻) 등을 중심으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가 발기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서울 지회를 설립했다. 1930년 4월 조선물산장려회 서울 지회의 경리부 상무이사로 선출되고, 1930년 5월에는 중앙회의 경리부 상무이사로 선출되었으며, 1934년 중앙회 이사로 선출되어 회관건립‧강연회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1927년 2월 자치론을 비판하고 절대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자 이에 적극 찬동하여 서울 지회에서 활약했다. 1930년 11월 신간회 서울 지회의 대회준비위원회에 김응집(金應集)‧홍기문(洪起文) 등과 함께 재정부원으로 활동했다.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가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을 하면서 독립된 사무실이 없어 고난에 처하자, 1935년에 서울 화동(花洞)에 있는 2층 건물과 부속 대지를 조선어학회 사무소용으로 기증하여 조선어학회의 국어운동과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6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국립유공자 공훈록 6>(국립유공자공훈록편집위원회 엮음, 국가보훈처 펴냄, 1988년), 667~668쪽)

그가 맡은 직책은 대부분 경리와 재무이사로 조직의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서슬퍼런 일본 강점기, 거대 기업을 운영하는 자본가, 그것도 정부 인‧허가가 필요한 부동산 개발업의 자본가가 대놓고 여러 조직의 재무를 담당하면서 재정을 지원한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역할은 더욱 빛난다. 또한, 이러한 공식적 기록 이외에도 가족들은 그가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가 가족을 지원했던 사실을 증언한다.

"아버님은 또 만주동포구제회를 손수 설립하였다. 만주 땅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같은 동포 흉탄에 쓰러지신 김좌진 장군 유가족이 오셨다. 현지처이신 미망인과 명한, 철한이 남매와 그들의 이모, 나 선생이 함께 왔다." (<구름따라 바람따라>(정몽화 지음, 학사원 펴냄, 1998년)

우리나라 최초의 법학교수이자 서울대학교 법대 초대학장을 역임한 최태영 박사(1900~2005년)의 회고다. (최태영 박사는 우리나라 상고사 연구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1922년 조만식이 1차로 시작했던 물산장려운동이 일제 탄압으로 잦아든 뒤, 1929년 이를 재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경상도 사람 정세권이 내게 와서 이를 다시 일으켜 세워 보자고 했다. (정세권의 주장은) 여러 사람이 뜻을 같이 했는데, 일제가 주목하니 위험한 노릇이어서 법을 아는 내가 나서서 법망을 비켜가며 친일을 피하고 징역 안 갈만큼이라도 하자는 것이었다." (최태영, '광산이야기와 제2차 물산장려운동', <대한민국학술원통신>, 제144호, 2005년 7월, 4~9쪽)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1924년 법학사를 마치고 조선에 들어와 1925년 한국인 최초로 법학 교수가 된 최태영 박사에게 정세권이 접근하여 조선물산장려운동 재개에 협력을 부탁했다. 최태영은 1929년 정세권과 함께 물산장려회 상무이사로 활동을 시작한다. ('물산장려 정기대회', <중외일보>, 1930년 5월 19일)

그와 함께 한 근‧현대사의 굵직한 인물 중, 특히 각별한 관계를 유지한 인물은 민세 안재홍과 고루 이극로다. 이 두 인물은 납북과 월북으로 그 업적이 상대적으로 가려진 형편이나, 민세 안재홍은 1920년대 민족 언론의 사표였으며, 고루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최고역점사업 한글사전 편찬의 실질적인 기둥이었다.

특히 민세 안재홍은 기농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 양사원, 신간회, 조선어학회 등 모든 활동을 함께 한평생의 동지였다.

안재홍(1891~1965년)의 아호 민세(民世)의 의미는 '민중의 세상'인 만큼 그는 매우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였다. (<안재홍의 항일과 건국 사상>(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엮음, 백산서당 펴냄, 2010년), 9쪽)

또한, 언론인으로서, 그리고 정치인이자 역사가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1924년부터 1932년까지 <조선일보> 주필 그리고 조선일보 사주를 역임하면서 기록적인 수의 글을 발표하였는데, 사설 980여 편과 시평 470편 등 1450여 편에 이른다. (<조선일보 사람들 일제 시대편>(조선일보사 사료 연구실 엮음, 랜덤하우스중앙 펴냄, 2004년), 97쪽)

<조선일보> 활동을 개시하기 전 이미 독립운동에 가담한 대가로 3년간의 옥고를 치른 그는, 언론인으로서 <조선일보> 재직 시 감옥을 제집 드나들 듯하였다. 일본의 비인도적 처우를 비판한 사설('보석(保釋) 지연(遲延)의 희생', <조선일보>, 1928년 1월 21일), 일본의 중국 침략을 비판한 사설('제남사변(濟南事變)의 벽상관(壁上觀)', <조선일보>, 1928년 5월 9일), 신간회 총무간사로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 준비 발각 등으로 1928년 3차례에 걸쳐서 투옥되었다.

1920년대 조선일보는 경영 사정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사주가 자주 바뀌었는데, 1924년 독립운동가 신석우가 경영권을 확보하면서 월남 이상재가 조선일보 4대 사장에 취임하였고, 이상재 선생의 사망으로 1927년 5대 사장에 신석우 그리고 1931년 6대 사장에 안재홍이 취임하게 된다. 안재홍은 조선일보의 경영이 어렵자 고향의 논밭을 팔아 신문사의 빚을 갚았고 직원들의 밀린 봉급을 지급했다고 한다. (<조선일보 사람들 일제 시대편>(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 엮음, 랜덤하우스중앙 펴냄, 2004년), 101쪽)

건양사가 1929년과 1930년 <조선일보>에 광고를 집중적으로 게재한 것은 당시 조선일보의 경영 상황을 도와주려는 의도로 추측된다. 건양사는 <조선일보>에 총 37회에 걸쳐서 광고를 게재한 데 비해, <동아일보> 게재는 2차례에 그치기 때문이다. 또한, 이상재(신간회 초대회장 역임) 및 안재홍과 조선물산장려회와 신간회 활동을 함께한 동지적 인연 역시 크게 작용한 듯하다.

안재홍은 사장에 취임한 지 1년 후 1932년 일제의 강압 때문에 경영권을 내놓게 된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의 독립운동은 지속하는데, 1936년 임정과 연락을 취하였다는 죄목으로 2년간 옥고를 그리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기농 정세권과 민세 안재홍, 고루 이극로에게 심한 고초를 안긴 것이었다. 특히, 감옥에서 안재홍과 이극로가 겪은 고초는 상당하였다. 일제는 안재홍에게 이극로를 직접 문초하라고 지시하면서 이극로가 대답을 하지 않는 경우, 이극로의 뺨을 때리라고 강요하였다. 안재홍은 이를 단연코 거절하였고, 그 결과는 모진 고문이었다. (<다사리 공동체를 향하여 : 민세 안재홍 평전>(정윤재 지음, 한울 펴냄, 2002년), 71~72쪽)


조선물산장려회와 신간회, 조선어학회 등 여러 민족운동에 기농 정세권과 민세 안재홍이 함께 참여한 점은 의미하는 바가 상당하다. 1920년대 새롭게 성장한 신흥 자본가와 언론인이 함께 합작하여 주도한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정세권은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민족운동 조직의 재무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고 안재홍은 자신의 미디어역량을 활용하여 민족운동의 취지를 설파하려 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는 민족 자본가과 민족 언론인 간의 협력을 통한 민족운동이라는 측면에서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아래 조선어학회 사진은 정세권과 안재홍의 친분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둘은 사진 속 맨 앞줄에 나란히 앉아 있다.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생존자들을 찍은 1946년 사진.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정세권, 세 번째가 안재홍. ⓒ조선어학회

본 연재와는 결이 다른 이야기를 지면을 통해서 하고자 한다. 해방 이후 민세 안재홍은 우파 정치인으로 미군정하의 초대 민정장관과 제2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6.25 동란 이전 그의 행적을 놓고 본다면, 조선일보 사주 안재홍은 민족 언론의 사표요, 해방 공간 대한민국 건국에 전념을 다한 정치인이었다. 그리고 정부는 이를 기억하여 1989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6.25 동란은 그의 일생을 바꿔놓았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그는 서울에서 북측에 납북되었다. 그는 북한에서 독립유공자로서 대우를 받았고 1955년부터 북한에서 정치 활동을 하면서 평화통일 추진협의회 최고위원을 역임하였고 1965년 별세하였다. (<안재홍의 항일과 건국 사상>(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엮음, 백산서당 펴냄, 2010년), 149~150쪽)

그런데 그는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아래의 발언을 하였다 전한다.

"1948년 미국인의 모략에 의하여 리승만 괴뢰 정권이 성립된 때도 미국인들에게는 버림을 받고 리승만 도당에게는 감시와 박해를 받으며 얼마 동안을 지내왔다." (<민주조선>, 1950년 7월 17일, <안재홍의 항일과 건국 사상>(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엮음, 백산서당 펴냄, 2010년))

위 발언만을 놓고 침소봉대한다면 그는 종북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의 삶 궤적을 볼 때 그는 기본적으로 우파 정치인이었으며, 그의 정치적 견해는 충분히 이승만 정권과 다를 수 있고, 또한 당시 북한군의 감시 하에 있었기에 본인 의도와 다른 발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필자와 다른 견해도 충분히 존재가능하다. 이유야 어쨌든 대한민국을 '괴뢰 정권'으로 칭한 점과 그가 북한에서 평화통일 추진협의회 최고위원을 역임한 점, 그가 북한에서 '애국지사' 칭호를 받은 점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세 안재홍은 우리에게 많은 숙제를 던져준다. 1989년이 되어서야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위대한 언론인 민세 안재홍은 납북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십 년간 평가가 미루어졌다. 그렇기에 그에 대한 연구, 특히 북한에서의 행적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최근이다. 연구가 상대적으로 최근이기에 그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줄이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역사에 대한 획일적 해석을 유도하는 국정화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국정화의 시대, 대한민국이 인정한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에서 애국지사 칭호를 받은 민세 안재홍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하고 기억해야 하나?

그의 북한 행적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다는 이유로 혹은 하나의 잣대로 그를 평가할 수 없다는 이유로, 폭압의 일제 강점기 동안 9번이나 투옥 당한 독립운동가는 역사 속에서 지워져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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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부동산/도시계획) 취득 후,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환경대학원)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부동산 금융과 도시/부동산개발이며, 현재는 20세기 초 경성의 도시개발과 사회적기업과 경제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Urban Hybrid (비영리 퍼블릭 디벨로퍼)의 설립자겸 고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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