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왕, 한 달 만에 한옥 37채를 만들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한 해 동안 170여 채 한옥 건설하기도

일제 강점기 시절 정세권의 건양사가 일반인들에게 인식될 만큼 매우 큰 회사이었음에도, 해방 전 사세가 기울었기에 건양사의 매출, 이익 등 회계 및 기타 사업 자료를 구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건양사의 활동은 신문 자료 혹은 인터뷰 자료를 통해서 가늠할 뿐인데, 특정시기 신문에 소개된 분양/임대 광고는 대략의 사업지와 규모를 추정하게 해준다.

건양사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광고를 게재하였다. 특히 <조선일보>에 1929년 2월 7일부터 1930년 2월 16일까지 총 37회에 걸쳐서 집중적으로 광고를 내보냈다. 그에 비해 <동아일보>에 게재된 광고는 1930년 2차례와 1939년 1차례에 그친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1929년 이전의 광고, 그리고 1930년 이후 <동아일보> 1회 광고 이외에는 다른 시기에 게재된 광고는 찾아볼 수 없다.

아래는 1929년 2월 7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건양사 최초 분양 광고이다.

해당 광고는 매우 다양한 정보들을 제공한다.

방매가(放賣家)는 한자의 뜻대로, '팔 집을 내놓는다‘는 것으로 현재의 아파트 분양과 일맥상통한다. 광고의 맨 마지막에는 건양사의 전화번호가 '광화문1319'라는 기록이 보이며, 건양사의 사업 분야(건축 청부 및 설계, 건축재료 무역, 토지 가옥 매매)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해당 광고에는 7개 지역 소재 방매가를 소개하고 있다. 관철동 120번지 신축 31칸 주택 2동, 낙원동 195번지 신축 31칸 주택 1동, 관훈동 197번지 신축 36.5칸 주택1동, 소격동 98번지 신축 17칸 주택 1동과 봉익동과 재동 소재 가옥에 대한 것이다. 이중, 봉익동과 재동의 개발은 규모가 상당하다. 봉익동 11번지는 열칸 짜리 규모 주택 9채와 재동 54번지는 10칸 내외 주택 9채를 분양하려고 한다. 그리고 창신동 651번지 토지 매각 예정에 대한 기록도 있다.

예전 조병택 집 130칸은 금월 말에 허물어 닦을(훼별 毁撇) 터이오.
그 대지 1157평은 분할 매각 중인 바, 3월 중순이 지나도 매각되지 않는 것은 본사에서 방매가를 건축함.

내용인즉, 조병택 씨(한일은행 창업주)가 소유하였던 130칸의 대저택을 건양사가 매입한 상태인데, 1929년 2월말에 저택을 허물고 전체 대지 1157평을 분할 매각할 예정이다. 즉, 기매입 한 토지를 분할해 일반인에게 분할된 토지를 판매한다는 것으로, 만약 3월 중순까지 토지가 매각되지 않는다면, 건양사에서 한옥 집단 지구를 개발하여 개별 한옥을 판매한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조선일보> 1929년 3월24일자 광고다.


낙원동 195번지와 소격동 98번지 광고가 없는 것을 보면 두 지역의 한옥은 매각되었고, 봉익동 소재 한옥 역시 네채가 매각되었다. 하지만, 관철동, 관훈동, 재동 한옥은 매각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리고 창신동 651번지에 대해서는 다음의 광고를 하였다.

창신동 651 신건 와가 9칸 내지 12칸 37동.
창신동 651 대지 분매 잔여 6백평.

매입한 창신동 651번지 토지(1157평 ) 중 550여 평 부지에 9칸 혹은 12칸 크기의 한옥 37동을 건설하였고, 나머지 부지인 600여 평은 토지를 매각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위의 2 광고가 내포한 함의는 매우 대단하다.

1929년 2월 한 시점에 벌써 서울의 7지역에서 건설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 중 3지역은 10채 내외 혹은 그 이상의 대규모 건축을 진행 중이었다. 봉익동 11번지와 재동 54번지 그리고 창신동 651번지는 근대적 디벨로퍼들의 대표적인 전략 '대규모 부지 매입 후 쪼개어 개발하기'가 그대로 녹아든 사업지다. 대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대저택을 매입하여 토지 자체를 매각하거나, 건물을 건설하여 매각한 것이다.

또 개발 속도가 매우 놀라운데, 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겠으나, 2월과 3월 광고를 문맥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창신동 651번지 나대지에 불과 한 달 사이 37채의 한옥을 건설한 것이다. 이는 대형 디벨로퍼로서 건양사의 회사규모가 어마어마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서울 시내 여러 곳에 동시다발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관리하는 능력과 더불어 매우 짧은 기간에 상당한 양의 주택을 공급하는 능력은 매우 놀랍다. 이는 경제학적 분석으로 규모의 경제를 이룬 것이라 볼 수 있고, 건양사의 경쟁력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규모의 경제를 이룩한, 즉 대량 생산이 가능한 사업 구조가 주는 이점은 비용 절감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두 명의 디벨로퍼가 각자 개발하는 주택에 한 채당 한 개의 화장실, 세면대를 매입해 시공해야 한다고 가정하자. 집 한 채를 개발하는 디벨로퍼와 동시에 일곱 지역 60여 채 가옥을 개발하는 디벨로퍼의 세면대 매입가격은 확실히 다르다. 대량으로 구입하는 경우, 가격 할인을 요구할 수 있고 당연히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는 종국적으로 건설 비용 인하효과로 직결된다.

대저택 매입이 가능한 거대한 자본력을 갖춘 대형 디벨로퍼, 건양사는 대량의 주택공급을 통한 규모의 경제를 창출하였고, 이는 비용 절감를 통한 가격경쟁력 확보로 이어졌으며, 다른 디벨로퍼를 넘어서는 경쟁력으로 이어졌다.

1929년에 신문에 실린 지역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관철동, 낙원동, 관훈동, 소격동, 봉익동, 재동, 창신동, 사간동, 수송동, 체부동, 안국동, 익선동, 계동 일대이다. 이 중에는 한두 채 건설도 있었으나, 크게는 10채에서 45채에 이르는 개발지들이 존재한다. 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1929년 한 해 170여 채의 한옥을 건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 1929년 한 해 건양사에서 개발한 지역과 해당 지역의 주택수 추정치.
당시 매년 공급된 주택은 대략 1700여 채였다.(<매일신보> 1931년 2월 21일자 '경성건물로 본 입체적 성장. 소화원년부터 오년 동안 신축가옥 7712동' 기사에 의하면, 1927년부터 1930년 사이 평균적으로 1700여 채의 주택이 신규 건설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헐리는 한옥들 위에 건설된 주택의 절반 이상은 일인 주택이었다.(<일제강점기 도시화 과정 연구>(손정목 지음, 일지사 펴냄, 1996년) 그렇기에 한인들의 주택 부족은 일인들보다 항상 심각했다. 신규 한옥의 건설 추정치는 850채 이하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1929년 건양사의 추정 개발주택수(170여 채)는 경성 전체 주택의 10%, 그리고 전체 신규 한옥의 20%이상을 차지하는 규모다.

당연히 수많은 일꾼이 필요하였고 이를 관리해야 했다.

"부친께서는 매우 부지런하셨어요. 잠을 3시간밖에 안 주무셨어요. 명동 조지아백화점(구 미도파백화점, 현 롯데영플라자) 건너편 명동 입구에 '호라이아'라는 일본 빵집이 있었는데, 새벽 6시에 거기 가셔서 빵을 잔뜩 사오셨어요. 우유와 빵을 자신 후, 건양사 본사 건물 앞에 모인 200여 명 일꾼에게 너는 종로 몇 번지에 가서 미쟁이를, 너는 어디가서 뭐하고 이런 식으로 일을 직접 시키셨어요." (정세권 선생 친족 인터뷰, 2013년 10월)

건축왕 정세권은 그렇게 경성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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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부동산/도시계획) 취득 후,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환경대학원)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부동산 금융과 도시/부동산개발이며, 현재는 20세기 초 경성의 도시개발과 사회적기업과 경제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Urban Hybrid (비영리 퍼블릭 디벨로퍼)의 설립자겸 고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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