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 이수인은 어떻게 노조를 조직했나

[드라마 <송곳>에서 말하지 못한 이야기 ④]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할 수밖에 없었죠."

김경욱 씨는 까르푸 중동점에 자기를 포함해 4명의 조합원이, 그리고 그들 모두가 자기 부하직원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후부터 본격적인 싸움을 준비해야 했다. 제일 처음으로 중동점 지부를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

달랑 4명으로는 지부를 설립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노조원을 늘리는 게 급선무였다. 조직력이 있어야 노조에도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조원 조직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직원들이 김경욱 씨를 싫어하는 이유도 컸다. 부하직원이 노조에 가입할 정도로 김경욱 씨를 싫어했으니 말 다한 게 아닌가.

상황도 좋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노조에 가입한다는 게 더 어려웠다. 조직력이 약한 노조에 가입하는 순간, 불이익을 받을 수 있고, 자칫 해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조합원을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머리도 굴렸다. 하나하나 계기를 만들면서 사람들을 조합원으로 끌어들였다.

ⓒJTBC

한 번은 수산과 주임 한 명이 회사 징계위원회에 회부하는 일이 발생했다.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해고하려 한 것. 김경욱 씨는 그 직원이 잘못은 했지만 그렇다고 해고는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그 직원은 김경욱 씨의 부하 직원인 이모 씨의 친동생이었다. 김경욱 씨는 이모 씨를 설득했다. 징계 자체가 부당하기 때문에 부당징계 구제신청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거기에 노조원을 징계하면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까지 할 수 있고 형사고소도 가능하다고 설득했다.

무엇보다 징계 자체를 무산시킬 수 있는 단체 행동을 하려면 노조에 가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비노조원이 단체 행동을 하면 불법이지만 노조원의 단체 행동은 정당한 노조활동이므로 해볼만 하다는 취지로 설득했다. 이모 씨가 노조에 가입하자 야채청과 남자 직원들과 수산과 남자 직원들이 대부분 노조에 가입했다.

수산과 주임에 대한 징계는 이제 노조와 회사의 싸움으로 커졌다. 김경욱 씨와 이모 씨 등 조합원들은 '징계는 부당하다'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매장을 돌아다녔다. 까르푸 중동점에서의 최초 시위였다. 매장이 발칵 뒤집혔다. 매장 내 피켓 시위는 징계 저지를 위한 것이었지만 노조 홍보 효과도 컸다. 중동점에 노조가 생겼다는 사실을 그때 안 직원들이 많았다. 조합원들의 피켓 시위는 기대 이상의 효과를 가져왔다. 회사가 수산과 주임의 징계 수위를 '해고'에서 ‘경고’로 낮췄다. 노조의 작은 승리였다. 분노와 함께 사기가 오른 조합원들은 다른 직원들에게 노조 가입을 적극적으로 권유하면서 조직이 점차 커져갔다.

수산과 주임에 대한 징계 저지 투쟁은 노조가 직원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준 사건이었다. 이후부터는 '회사가 징계하려 해도 노조가 보호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노조를 조직했다.

징계건 이후에도 노조원을 조직하기 위해 여러 일을 했다. 까르푸 사측은 직원들이 물건을 슬쩍 가져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퇴근하는 여성 직원 가방을 자주 검사했다. 그것의 부당함을 지적했다. 여성 가방에는 생리대 등 사적인 물건이 들어 있었다. 인권침해였다. 반면, 과장, 부장 등 관리자 남성 직원 가방은 검사하지 않았다. 차별이었다.

'가방 검사를 하려면 다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말단 직원은 도둑이고, 부장은 아닌가. 부장, 과장 등이 경품 등을 가져간 것을 본 것만 한두 번이 아니다'

ⓒJTBC

그런 내용을 글로 쓴 뒤, 인쇄해서 직원들이 옷 갈아입는 곳, 직원휴게실, 식당 등에 두었다. 출근하는 직원들에게도 나눠줬다. 김경욱 씨는 노조가 노동자에게 도움을 주는 조직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노조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게 통했다. 회사가 가방 검사를 안 하기로 결정했다. 노조의 두 번째 승리였다.

회사가 허술했다. 가방 검사를 안 하니 '이것 봐라, 변화가 있네' 이런 기류가 형성됐다. 그간 무뚝뚝하게 노조를 바라보던 직원들이 우호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김경욱 씨는 직원들에게 '과장'이 아니라 '노조원'으로 인식됐다. 그러면서 조합원들도 점차 늘기 시작했다.

김경욱 씨는 사실 이후부터 우후죽순으로 노조 가입이 늘어날 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노조 가입자는 크게 늘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계속 사람을 만나고 다녔다. A4용지에 직접 쓴 가입서를 시도 때도 없이 돌렸다. 그런 김경욱 씨를 직원들은 떨떠름하게 바라봤다.

가장 조직이 안 되는 곳이 계산대(케셔) 쪽이었다. 계산대 직원 중엔 아는 이가 없었다. '맨땅에 헤딩' 식으로 부딪쳤다 한 사람당 10번 이상씩 가입서를 들고 가서 설득했다. 밥 먹으러 식당에 가면 주문하기 전, 서 있을 때도 노조 가입을 부탁했다.

'여사님, 노조 가입하세요' 이러면 '밥이나 드세요'라는 시니컬한 반응이 돌아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날 점심 때면 다시 가입서를 돌렸다. 그 다음날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는 통했다. '주세요' 하고는 무표정하게 가입서를 작성해 돌려주는 이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김경욱 씨는 그렇게 ‘낱알 줍기'식으로 노조원을 조직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렇게 노조를 조직할 때는 중동지부도 안 세워졌을 때였다. 까르푸 중앙노조에서 이렇다 할 직함을 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왜 이렇게 노조 가입, 즉 노조 조직화에 매달렸을까.

"다른 이유는 없었다. 노조는 조합원수가 많아야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노조에 가입한 이유는 직원들을 해고하려는 중동지점장과 싸우기 위해서였다. 중동지점장이 나에게 부하직원 해고를 지시하지 않았나. 이를 거부하자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나가든지, 그에게 굴복하든지, 아니면 싸우든지,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더는 나가기 싫었다. 군대도 그렇게 나왔었다. 그렇다고 굴복하기는 더 싫었다. 남는 건 싸우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혼자 싸울 수는 없었다. 조직이 필요했다. 저쪽은 대기업 점장 아닌가, 노조에 가입한 뒤 노조에서 싸울 준비를 한 것이다. 싸울 준비라는 게 거창한 게 아니었다. 노조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일이 내게는 싸움의 준비였다. 조직력 약한 노조가 회사와 싸우면 100% 진다고 생각했다."

ⓒ프레시안
주목할 점은 김경욱 씨는 이 과정에서, 즉 파업을 준비하면서 비정규직도 조직화했다는 점이다. 비정규직을 조직한 이유는 매우 우연한 계기였다. 김경욱 씨가 중동점에 지부를 세우고 파업을 준비할 때였다. 구내식당에서 조합원들과 파업을 어떻게 진행할지 논의하는 자리였다. 한창 논의 중인데 소리 없이 생선코너에서 일하는 여성 직원이 다가왔다.

김경욱 씨는 얼굴만 아는 분이었다. 그 여성 직원은 천천히 다가와서는 '저도 파업하면 안 돼요?' 하면서 파업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비정규직이었다. 자기도 노조에 가입하고 싶다고 했다. 당시 중동지부는 설립됐지만 비정규직 가입은 허용되지 않을 때였다. 노조 규약에는 비정규직도 가입대상이었으나 단체협약에는 금지돼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경욱 씨는 비정규직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 눈에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황했다.

"여사님, 안 돼요. 노조 가입하면 계약해지 될 수 있어요. 그리고 파업하면 바로 잘립니다. 안 돼요. 우리가 해고를 책임지기 어려워요."

거절했다. 김경욱 씨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말이 무척 부끄럽다고 했다. 정규직 노조에서 비정규직 조합원을 받지 않는 이유를 똑같이 말했던 셈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가 한 말이 김경욱 씨의 마음을 건드렸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똑같아요. 나도 내 목소리라도 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그렇게 하다가 잘려도 노조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나도 같이만 하게 해 주세요."

자기도 말할 기회를 달라는 부탁이 김경욱 씨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비정규직 직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그런 말이 나오니 깜짝 놀랄 수밖에.

'이 사람들도 기회와 공간만 열어주면 싸울 수 있는데 그 기회를 우리가 봉쇄하고 있는 게 아닌가'.

욕심도 생겼다. 파업에 참여하는 숫자가 매우 적었다. 이 사람들을 받아들이면 숫자가 늘어나지 않을까. 가입시켜 파업 참여 인원을 늘리자고 생각했다. 김경욱 씨는 그녀의 제안을 받았다.

"좋습니다. 노조 가입을 받겠습니다. 같이 파업합시다. 다른 약속은 못하지만 이 약속은 드리겠습니다. 만약 파업하다 해고된다면 우리 노조가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복직시켜주겠다는 게 아닙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약속하겠습니다."

결코 저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자 그녀도 '그러겠다'고 했다.

이후 그녀와 함께 비정규직 노동자 3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나머지 2명은 노조 가입도 하지 않고 파업에 참여했다. 그동안 당한 설움과 억울함을 풀어낼 자리가 필요했다. 정규직 관리자였던 김 위원장도 파업 전에는 몰랐다고 했다. 그 사람들의 비참함, 그리고 고단한 노동의 삶….

70일 파업 후 체결한 합의사항에 파업에 참여한 직원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고 명시했다. 그 비정규직 세 사람을 위해 노조가 요구한 사항이었다. 나중에 알았다. 이들을 파업에 참여시킨 게 이랜드 싸움의 첫 단추였다는 것을.

* 이 기획은 현재 미디어 다음 '스토리펀딩'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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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환주

2009년 프레시안에 입사한 이후, 사람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기사를 썼다. 2012년에는 제1회 온라인저널리즘 '탐사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2015년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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