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통일 대박'을 버려야 하는 이유

[한반도 브리핑] 흡수 통일은 없다

드디어 남북 당국 회담의 틀이 마련됐다. 장관급이 아니라 차관급이고 장소도 서울과 평양이 아닌 개성이지만 8.25 합의에 따른 남북 간 당국 회담 개최가 가능하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2007년 노무현 정부 하에서 21차 장관급 회담을 마지막으로 남북의 정례적인 고위급 대화 채널은 중단되었다. 이명박 정부 이후 돌발 사안이나 돌출 이슈를 논의하기 위해 남북 당국이 마주앉은 적은 있지만 제도화되고 안정적인 당국 대화는 재개되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개성공단 폐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실무 회담과 이산가족 상봉 등과 관련한 고위급 접촉 그리고 휴전선 긴장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2+2 회담이 열렸지만 이슈 중심의 일회성 회담에 그쳤고 지속적이고 정기적인 당국 회담의 틀은 시작하지 못했다. 비록 차관급이지만 8년 만의 당국 회담 재개가 반가운 이유다.

애초에 우려했던 회담 대표의 '격'(格)과 관련해서 남북 모두 차관급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2013년 장관급 회담의 결렬을 반면교사로 삼아 우회로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남측이 통일부-통일전선부 라인을 고집하는 것도 무리고 그렇다고 북측이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을 계속 내세우기도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단 하에 남북 모두 차관급을 대안으로 제시함으로써 대표의 격문제로 인한 실무 접촉의 결렬을 피하고자 한 셈이다.

또한 8월의 2+2 회담이 사실상 대표 사이의 협상을 넘어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제1위원장의 간접 협상으로 진행되었던 전례를 비추어보면 굳이 격문제 때문에 불필요한 갈등을 초래할 필요가 없다는 실용적 분석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측의 신경전이 예상되었던 회담 의제와 관련해서도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현안 문제'로 표현함으로써 사실상 의제를 구체적으로 합의하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의제를 지나치게 고집함으로써 실무 접촉이 결렬되는 위험을 피하고 일단 당국 회담 자체가 성사되는 것에 의미를 둔 남북의 현실적 타협책으로 해석된다. 오랜만에 마련된 대화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국 회담의 판 자체를 깨지는 않겠다는 남북 양측의 현실적 고려가 읽히는 대목이다.

사실상 회담 의제를 차후 당국 회담으로 넘기는 방식으로 의제 논란으로 인한 결렬 사태를 피하고자 고심한 것이다. 이른바 '합의하지 않기로(agree to disagree)' 합의하는 현명한 외교 전술이 남북 모두에게 수용된 셈이다.

▲ 지난 11월 26일 남북은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 당국 회담 개최를 위한 실무 접촉을 진행했다. 사진은 남측 대표인 김기웅(오른쪽) 남북회담본부장과 북측 대표인 황철(왼쪽)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장이 악수하는 모습. ⓒ통일부

이번 실무 접촉의 합의는 결과적으로 남북이 서로 대화에 대한 의지를 확인하고 어렵게 마련된 당국 회담의 판을 먼저 깨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예상되는 장애물과 이견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로 '8.25 국면'은 이어가겠다는 남북 양측의 노력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여름의 8.25 합의는 매우 극적이었다. 목함 지뢰 도발과 확성기 방송 재개가 맞물리면서 남북의 군사적 긴장은 일촉즉발의 전쟁위기로 고조됐다. 포 사격과 맞대응이 교환되었고 48시간의 통첩이 지나면 남북 모두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까지 다다랐다. 막판에 극적인 협상이 시작되고 지루한 마라톤 협상 끝에 도출된 8.25 합의는 그래서 위기를 기회로 만든 훌륭한 성과였다.

긴장 고조 끝에 얻어진 8.25 합의는 지금까지 남북 관계를 이끄는 주요 동력이 되고 있다. 합의에 따라 북측의 유감 표명과 준전시 상태 해제가 이루어졌고 우리는 확성기 방송을 중단했다.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됐고 각종의 사회문화 교류가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번 실무 접촉의 합의에 따라 향후 당국 회담이 열린다면 남북 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8.25 국면'이 지속성과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주요한 기회가 마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남북 관계의 '8.25 국면'이 '8.25 동력'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맞게 된 셈이다.

때문에 남북 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증진을 위해서는 향후 당국 회담이 가시적인 성과를 냄으로써 명실상부한 8.25 동력으로의 발전이 필요하다. 다행히 지금 남북 관계의 객관적 환경은 그리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당국 회담 성공의 관건을 쥐고 있는 북한 측 요인이 긍정적이다. 내년 5월로 예정된 이른바 '당대회 국면'이 북한의 전략과 정책 기조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북은 적어도 당대회 이전까지는 대회 환경의 안정적 관리를 필요로 하고 있다.

3차 핵실험과 장성택 처형으로 정점에 달한 북-중 관계 악화가 최근 들어 관계 정상화의 징후를 보이고 있는 점도 마찬가지다. 36년 만에 열리는 당대회를 '승리의 대축전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남북 관계의 안정적 관리가 필요하고 이는 결국 남북 대화의 지속과 긴장 고조 자제로 나타나게 된다. 남북 당국 회담의 성패를 좌우할 북한 측 요인이 그리 부정적이지 않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박근혜 정부도 당국 회담의 성공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중국과 미국과 일본 등 굵직한 양자 외교를 마무리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 정책의 밑그림이 어느 정도 그려진 상황에서 이제 남북 관계의 개선과 관리가 화룡점정의 과제로 요구되고 있다. 특히 8.25 합의 도출에서 보듯이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한반도의 긴장을 관리하면서 북한을 대화의 장에 나오게 했다는 박 대통령의 자신감도 남북 관계 개선의 적극성을 가능케 하는 배경이 될 것이다. 내년 4월로 예정된 총선의 정치적 자산으로도 남북 관계 진전은 박근혜 정부에게 일정하게 필요할지 모른다.

중국이 남북 대화를 방해할 이유도 없다. 미국 역시 전략적 인내 방침은 변화가 없지만 대선 국면을 앞두고 남북 대화가 한반도의 긴장을 관리한다면 크게 반대할 이유가 없다. 내년 상반기까지 남북관계의 대외적 환경은 그리 나쁘지 않은 셈이다.

관건은 우호적 대외 환경을 활용할 수 있는 우리의 적극적 노력과 전략적 접근이다. 어렵사리 마련된 남북 당국회담의 기회가 남북 관계 개선의 지속적 동력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하려면 무엇보다 통일 대박론과 8.25 국면의 상충성을 해소해야 한다. 지난해부터 대통령이 강조하고 있는 '통일 대박론'은 적어도 북한에게는 흡수 통일과 제도 통일의 우려로 전달되었다. 대통령의 진정성을 담은 드레스덴 선언마저 북이 거부하는 속내는 바로 박근혜 정부의 흡수 통일 시도에 대한 의심이었다.

결국 통일 대박론의 흐름과 8.25 합의 이후 남북 관계 개선의 흐름이 서로 상충되거나 북에게 서로 다른 시그널로 인식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북 당국 회담으로 8.25 동력이 활성화되고 남북 협력이 가속화되길 원한다면 적어도 통일 대박론에 대한 북한의 우려를 불식시켜줄 수 있는 대통령 차원의 '흡수 통일 배제' 표명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또 남북 당국 회담의 성공을 위해서는 우리 정부가 의제의 포괄성이라는 전향적 입장을 견지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원하는 의제만을 고집하거나 북이 관심 갖는 의제를 묵살한다면 당국 회담의 진전은 기대하기 힘들다. 드레스덴 선언 구상이나 3대 통로 의제들을 논의하면서도 동시에 북이 시종일관 제안하고 있는 금강산 관광 재개나 5.24 해제도 일단은 협상 테이블에 올려야 한다.

지난해부터 북이 국방위 중대 제안과 특별 제안을 통해 제의한 바 있는 정치·군사 아젠다에 대해서도 우리가 언제까지 소극적으로 거부할 이유가 없다. 정치 군사 의제를 놓고 우리가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북핵 문제와 군사적 도발 문제를 제기하면 될 것이다.

또한 비핵화와 향후 남북 대화 국면을 연계시키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비핵화가 우리의 정책 목표이긴 하지만 이를 남북 대화의 전제 조건이나 연계 사항으로 자리매김하는 순간 어렵게 마련된 남북 당국 회담은 사실상 한 발짝도 나가기 힘들다. 오히려 남북 대화를 진전시키고 화해 협력과 교류 접촉을 증대시키면서 북한의 변화를 추동하고 국제 사회로의 편입을 이끌어냄으로써 북핵 해결을 위한 6자 회담과 북-미 협상의 우호적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현실적인 접근 방법이다. 비핵화가 남북 대화의 조건이 아니라 남북 대화와 교류 협력을 통해 비핵화의 환경을 조성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남북 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에 역사적 업적을 남길 수 있을지 드디어 시험대에 올라섰다. 당국 회담의 개최가 8.25 국면에서 8.25 동력으로 발전하고 결국은 평화로운 통일의 초석을 쌓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 과제인 '평화적 통일 기반 구축'은 '통일 준비'라는 구호가 아니라 한반도 평화를 실제 일궈내고 남북의 화해 협력을 증진시키는 한발 한발의 실천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그 성패는 바로 남북 당국 회담의 성공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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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식

김근식 경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 석·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의 대표적인 남북관계 전문가입니다. 김 교수는 청와대 안보실 자문위원, 통일부 자문위원, 국방부 정책자문위원 등을 역임했고 2007년 특별 수행원으로 남북정상회담에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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