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남자가 데이트할 때 돈 더 썼다"

[프레시안 books] <데이트의 탄생>

최근 들어 남성 이용자가 주로 몰리는 극우 인터넷 사이트를 중심으로 여성 혐오 발언이 널리 인용됐다. 급기야 문화방송(MBC)은 <PD수첩>을 통해 이와 같은 목소리에 힘을 싣는 방송까지 내보냈다. 방송에서 주로 언급된 건 데이트의 불평등이다. 왜 한국은 남성이 데이트 비용, 혼수 비용을 일방적으로 부담해야 하느냐는 불평이다.

신간 <데이트의 탄생>(베스 L. 베일리 지음, 백준걸 옮김, 앨피 펴냄)은 구체적인 통계 수치까지 제시하며 이런 물음에 간단히 답한다. 원래 그랬다.

<데이트의 탄생>은 미국 출신 저자가 데이트의 기원을 쫓아가며 이를 역사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론적으로 훑어보는 책이다. 책을 읽다 보면 이른바 '남성이 피해를 본다'는 주장이 틀렸음을, 한국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데이트는 원래 남성이 돈으로 권력을 사는 20세기의 새로운 문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데이트는 수천 년간 이어진 현상이 아니다. 자본의 고도화에 따라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생겨난, 20세기 초의 새로운 문화 행태다. 경제 발전에 따라 변화한 사람들의 새로운 행동 양식이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청춘남녀가 만나는 장소는 여성의 집이었다. 여성이 초대하고, 남성은 방문했다. 저자는 이 당시까지 청춘남녀 만남의 주도권은 여성(과 그의 가족)이 쥐고 있었다고 말한다. 여성은 초대한 남성의 행동양식을 살피고, 그의 교양 수준을 파악했다. 부모의 입회하에 안전한(?) 모임이 이뤄졌다.

도시화로 사람들이 대도시에 집결하고, 좁은 집 안에 대가족이 모여 살면서 전통적인 만남 양식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반발을 극복하고) 도시로 나갔다. 가족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익명의 장소에서 해방감을 맞이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데이트가 탄생했다.

▲ <데이트의 탄생>(베스 L. 베일리 지음, 백준걸 옮김, 앨피 펴냄). ⓒ앨피
데이트는 기존의 만남과는 완전히 달랐다. 청춘남녀가 부모의 감시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점이 물론 중요했으나, 보다 근본적 변화의 매개는 돈이었다. 극장에 가고, 식사하고, 공연을 관람하는 데는 돈이 꼭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남성이 돈을 내고 여성은 매력을 '파는' 지금의 데이트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책을 보면 우리도 흔히 인용하는 '더치 페이 문화'는 20세기 중반까지도 미국에서는 지극히 경멸적인 뜻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데이트의 탄생과 함께 남녀 만남의 주도권은 여성에서 남성으로 넘어갔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자본주의 질서가 남녀 만남의 권력 체계를 새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남성은 돈이 주는 권력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돈은 데이트에서 남성에게 우월적 위치를 주었다. 데이트가 자본주의적 새로운 양식이었음을 감안할 때, 여성도 얻는 게 있어야 했다. 여성은 남성이 권력을 쟁취할 때 실리를 챙겼다. (대체로 자본력으로 귀결되는) 실익을 자신에게 줄 수 있는 남성을 찾았다. 그리고 선택 권력을 얻기 위해 여성은 자신을 더 '여성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행위에 투자했다. 책은 50년대 미국 파티장의 사례, 당시 미국 청소년들이 잡지에 투고한 글 등을 통해 다양한 실증사례를 제시한다.

새로운 만남의 질서가 생겨난 만큼, 이를 유지하기 위한 관습도 발전했다. 책은 데이트에서 남성을 더 남성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예를 들어 강인한 남성성과 자동차)이나 여성을 더 여성적으로 만드는 행위(남성이 자동차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는 행위, 비싼 코르사주 경쟁 등) 등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데이트 에티켓'으로 여겨지는 행위들이 생겨난 원인을 따라가고, 이를 통해 이 모든 행동규범이 '데이트'라는 새로운 자본주의 상품을 더 효과적으로 소비하도록 부추기는 질서 체계 아래에 놓여있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베이비붐 세대들의 데이트는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만남이기도 했다. 책은 '무조건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한다'는 부모 세대와 '한 사람을 오래 만나기'에 집중하고 경쟁적으로 데이트에 몰두하는 자식 세대의 갈등, 데이트에 쓰는 과도한 비용이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전쟁 후 유행처럼 캠퍼스 부부가 만들어지는 시대상 등 20세기 초반 미국 청춘남녀의 데이트 변천사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사회의 변화가 데이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그려낸다.

저자는 많은 양의 대중잡지, 논문 등을 조사해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당시 데이트 방식을 다방면으로 정리하고, 20세기 초 청춘남녀 생각의 단서를 끄집어내, 데이트란 기본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각자의 매력을 물물교환하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거래로 발전했다고 정리한다. 옮긴이의 말대로 "사랑은 교감이지만, 사랑의 현실은 교환"이었던 셈이다.

이 책은 우리가 별생각 없이 넘어가는 삶의 소소한 것들(보통의 경우, 데이트란 정치 문제나 경제 위기론보다 중요하지 않다)이 실은 경제적, 역사적, 사회적 변화의 의미를 농축한 중요한 예시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책은 20세기 초에서 1960년대 초까지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그리고 미국의 데이트 문화만을 다뤘다. 책이 다루는 시대는 분명 여권 신장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전의 시대였다. 따라서 이 시대의 데이트가 지금의 데이트와 같을 수는 없다. 이 시대는 남성 권력이 지금보다 훨씬 강하게, 그것도 공공연하게 보호받던 시절이었고, 이 당시에 남성이 권력을 갖는 건 당연하다는 믿음이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더 강화됐다.

한국은 미국이나 유럽의 청년 혁명에 따른 문화 충격을 받지 않은 사회임을 고려하면, 우리의 데이트는 어쩌면 현대 미국의 데이트보다 이 책에 그려진 데이트에 조금 더 가까우리라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우리의 데이트는 오늘날 미국에서보다 급격한 가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자본주의 체제라는 압도적인 가치 규범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상, 책이 말하는 데이트의 근본 속성, 곧 자본주의적 물물 교환이라는 본질은 우리의 혼란 끝에 어떤 대답이 나오든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의 학교 축제 장면이 떠오르고, 기타 여러 미국 청춘물에 등장하는 학생들의 데이트 모습이 연상된다. 그리고 20세기 초의 두 가지 대사건(경제 대공황, 세계 대전)과 60년대의 혁명이 지금 우리 삶을 이전과 얼마나 다르게 바꿨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재미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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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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