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싱글맘', 데이트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프레시안 books] 로리 고틀립의 <그 남자랑 결혼해>

<그 남자랑 결혼해>(로리 고틀립 지음, 나선숙 옮김, 솟을북 펴냄), 원제는 'Marry him'. 표지 결혼식 케이크 위에나 쓸 것 같은 턱시도, 드레스 차림의 남녀 인형. 저자 프로필은 스탠퍼드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타임스>, <애틀랜틱> 등에 칼럼을 쓰는 "외모로도 지적으로도 매력 있는 여성". 덧붙이자면 정자 은행을 통해 낳은 네 살짜리 아들을 키우는 마흔두 살 싱글맘.

제목과 표지, 책날개의 저자 프로필에서 추출한 정보만으로 사실 이 책이 전하는 '말씀'은 끝난 거라고 봐도 된다. 생활면에서 충분히 독립적인(그것도 작가라는 직업이 증명하듯 '언어적'인 독립도 성취한), 그러나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결혼 시장에서 값이 낮아져버린 싱글 여성이 자신보다 어린 여성에게 제발 콧대 세우지 말라고, 지금 옆에 있는 그 남자랑 결혼하라고 권하는 얘기다.

나도 예전엔 잘 나갔어, 하지만 완벽한 조건과 뜨거운 열정이 딱 맞는 순간을 기다리며 결혼을 미루다 보니 이 지경까지 왔어! 나이 드니까 데이트 사이트에선 아버지뻘 되는 남자만 소개시켜 주더라! 안 팔려! 제발 내 말 믿고 지금 그 남자랑 결혼해! 저자는 절규한다.

▲ <그 남자랑 결혼해>(로리 고틀립 지음, 나선숙 옮김, 솟을북 펴냄). ⓒ솟을북
너무 직접적이라 반어법 아닐까 생각했던 제목도 진심이었고, 요새 하나쯤 있어야 어색하지 않은 반전도 없었다. 물론, 저자가 피상적인 조건에 집착했던 과거를 피터지게 반성했음에도 책 말미에 이르도록 함께 할 동반자를 찾지 못했다는 게 반전이라면 반전이다. 자신을 일종의 모르모트로 삼은 저자는 책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은데 대해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는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음주 운전 반대 공익 광고와 같다"고 슬픈 해명을 던진다. 처절한 실패 쪽이 교훈을 주기엔 더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이토록 직설적인 책이므로 그 내용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이 남자와 결혼할까 말까'라는 일생일대의 고민에는 못 미칠지언정,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들의 작은 고민인 '이 책을 읽을까 말까'에 대한 결정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까 하는 기대로, 책을 보기 전 몇 가지 '따지지 말아야 할 것' 기본 전제들을 전하고자 한다. 이것들을 무시할 경우 아주 피곤해질 수 있다. 우린 시간이 모자란 현대인 아닌가.

1. 이 책은 순도 100퍼센트 이성애자들만의 이야기이다.
2. 이 책은 '연애'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결혼'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다.
3. 이 책은 여러 이유로 독신을 결심한 여성들에게 보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결혼'은 결심했는데 그 상대를 찾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보내는 이야기다.

또, 다음과 같은 '딴지'를 걸어선 안 된다.

1. 저자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남녀 성 평등이란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 저자가 묘사하는 결혼 시장은 조건은 갖춰져 있으나 만족 수준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것으로, 물질적인 이유로 많은 커플들이 결혼·출산을 포기하는 한국의 상황과는 갭이 크다.
3. 저자가 의심 없이 뛰어든 현대의 결혼 시장은 기만적인 것 아닌가? 결혼 제도에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가?
4. 여자는 젊을수록 잘 '팔리는' 것은 결국 성적 매력에 따른 것으로, 다분히 남성 중심적인 사고에 동의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이 룰에 따라야 하는가? (진지하게 3, 4번과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들지 않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해 <그 남자랑 결혼해>는 현대의 결혼 제도와 거기서 남녀가 맡아야 하는 기본적인 역할, '스펙'에 따라 급이 결정되는 결혼 시장의 룰 등을 이미 내면화하고 쓰인 책이다. 저자는 '페미니스트'이지만 그녀가 말하는 페미니즘은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을 때 치미는 감정 내지는 여성들이 직업에서의 승진과 아이 돌보기를 자유롭게 병행하려 할 때 사용되는 기계적 논리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굳이 이 책에 정색할 필요도 없는 게, 시중에는 이와 비슷한 유의 책들이 서가 한쪽을 빼곡히 차지하며 하나의 스타일로 평가받고 있다. 도시 여성들의 결혼과 연애에 대한 자기 계발서.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 브래드쇼가 시각적으로도 완성한 바 있는 그 클리셰다.

그럼 고민은 늘 나에게 꼭 맞는 남자를 찾아 헤매던 <섹스 앤 더 시티> 주인공들이 하던 수준으로 맞추면 되는 것이다. 결코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다. 결혼과 배우자는 더 대단한 걸 고민한다는 이들에게조차 피해갈 수 없는 커다란 물음이며, 어떤 이론으로도 해결 볼 수 없는 가장 정직한 실천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결혼 제도에 의구심을 품은 사람에게라도 독신을 결심한 사람에게라도 언제 어디서 올지 모르는 강력한 유혹이거니와, 한 번쯤 싸워야 하는 숙제다.

자 여기까지의 설명으로 궁금해졌다면 이젠 책을 펼쳐보자. (독서도 연애나 결혼과 마찬가지로 펼쳐보기 전엔 모르는 거니까.) 저자는 20대부터 50대까지 수많은 싱글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굴욕적인 '스피드 데이트'에 나가는 등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과거에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싱글 여성들이 어떻게 '데이트 떨이 상품'이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매우 많은 사례가 나와 있지만 대개의 스토리와 교훈은 이 책 프롤로그에 나오는 유머 한 토막으로 함축 가능하다.

한 여성이 모두 6층으로 구성돼 있으며 한 층씩 올라갈 때마다 상품 가치도 올라가는, 그러나 한 번 올라가면 내려올 수는 없는 '남편 마켓'에 들어선다. 여성은 "좋은 직장에 다니고, 아이들을 사랑하고, 매우 잘생긴 남자" 등 좋은 조건이 하나씩 따라 붙는 1~5층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왠지 더 올라가야 할 것만 같아"서 6층에 들어섰다가 이런 말을 듣는다.

"손님께서는 본 층의 42215602번째 방문객이십니다. 이곳에는 구입하실 수 있는 남자가 없습니다. 6층은 만족을 모르는 여성분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건너편에는 남자들을 위한 '아내 가게'가 있다. 1층에는 섹스를 좋아하는 아내들이 있고 2층엔 섹스를 좋아하며 상냥한 아내들이 있고, 3층에는 섹스를 좋아하고 상냥하며 스포츠를 좋아하는 아내들이 있다. 그리고 4, 5, 6층은 방문하는 손님이 없어 폐쇄되었다.

여성, 특히 젊고 잘 나가는 이들일수록 만족과 안정을 손해라 여기며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그래서 중요치도 않은 걸 시시콜콜 따지다 보니 결국 나이 들어 후회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같은' 로라 고틀립임에도 20대 때 100명의 남자를 선택지로 받아들 수 있었다면, 20년이 흐른 지금 선택의 기회는 너무나 희박해지고 말았다는 잔혹한 이야기다.

그러니 지금 로라보다 젊은 친구들이 영원히 잘 나갈 줄 알고 흔들리는 것을 볼 때마다 그녀가 얼마나 울화통이 터지겠는가. "그렉과 같이 있으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 여자인 것 같다"며 행복해 하던 서른 살 줄리아가 "내가 그렇게 멋진 여자라면 더 나은 남자를 만나야 하지 않을까"라며 그와 헤어졌다고 말할 때, '꽤 괜찮은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정체되어 있는 기분이 들어" 이혼했다는 얘기를 들을 때 그녀의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보라.

사례들에서 많은 이들은, 8을 원하던 자신이 5를 가진 그를 선택하면 더 좋은 기회를 놓친 채 안주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에 사로잡힌다고 말한다. 그러나 로라는 결코 그게 나쁜 의미의 안주가 아니며, 자신에게 닥칠 미래를 합리적으로 객관화시켰을 때 가능한 성숙한 결정이라고 말한다. 이는 부동산에서부터 출장 때 남은 외화에 이르기까지 가격이 변동하는 무언가를 팔아치울 적절한 시기에 대한 고민이라든가, 더 나은 삶이 있을 거라 믿는 3년차 직장인의 심정이라든가 하는, 굉장히 많은 상황에 적용되는 통찰이기도 하다. 환상보단 현실을 좇아라. 욕심과 '자뻑'을 버려라. 그리고 선택은 취하는 게 아니라 버리는 것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잊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마지막으로 하나. 사실 '자뻑' 넘치는 싱글들보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사람들은, 권태기에 시달리는 (아니 그것까진 좋다. 권태를 핑계로 파트너에 대한 기만을 저지르는) 기혼자들이 아닐까. 그것이 일정한 속박과 지루함을 알고 한 선택이라면 말이다. 이 책이 갖고 있는 현실적인 결혼관은, 적어도 관계 폭력을 열정으로 혼동하는 낭만파보다는 인간적이다. "결혼은 열광이 지속되는 축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아주 작고 평범한 비영리단체를 운영해가는 동반자 관계에 더 가깝다."라는 저자의 말이, TV건 문학이건 서사 시장에선 도통 먹히질 않는다는 게 문제겠지만.

물론 그러하기에 책을 덮으며 역시 결혼은 하지 말아야겠다, 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자유다. 저자가 "나도 어릴 때 그랬거든?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란 서두로 말리러 올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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