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박정희 대선 승리 매우 수상해" 美 CIA 보고서

CIA, 케네디·존슨 대통령에 올린 극비 보고서 2484건 공개

미 중앙정보국(CIA)이 작성해 매일 아침 미국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기밀 정보보고서 9년치가 한꺼번에 공개됐다. 1961년 6월 이 보고서가 최초 작성됐을 당시부터 1969년까지 1월까지의 분량이다. 미국으로서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때부터 린든 B. 존슨 대통령 때까지로, 베를린 장벽 건설, 베트남 전쟁, 중국의 첫 핵실험, 통킹만 사건 등의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때다.

한국으로서도 역사적 시기다. 첫 보고서가 작성된 1961년 6월 17일은 5.16 군사정변 한 달 뒤다. 1969년 1월까지 한국에서는 5.16 군사정부의 민정이양과 1963년 대선, 1965년 한일수교, 1967년 대선, 1968년 김신조 일당의 1.21 사태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에서 일어난 이들 사건은 하루 이틀 정도 후 바로 CIA에 의해 미국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CIA "박정희, 윤보선이 때때로 앞섰는데 수상하게 우위 지켜"

한국 관련 내용 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1963년 한국 대선 다음날인 10월 16일 케네디 대통령에게 CIA가 올린 보고서다. 이 보고를 받고 한 달여 후 케네디는 암살됐다. CIA는 이 보고서의 '한국' 항목에서 "최신 보도에 따르면, 야당 후보였던 윤보선이 박정희 장군에게 선거 패배를 인정했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의 진정한 태도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다"며 "선거는 표면적으로 매우 치열(very close)했고, 박 장군의 표 우위는 5만 표 미만이었다(실제로는 15만 표 차였다. 편집자)"라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CIA는 "윤보선은 때때로 (박정희 후보에게) 앞섰고 이길 것처럼 보였지만, 매우 수상하게도, 박 장군이 뒤집기를 거듭했다(Yun was at times in the lead and appeared to be gaining, but, curiously enough, Pak kept pulling back ahead)"고 표현했다. '수상하다'는 표현은 부정 선거를 암시한 것이라는 풀이도 가능하다. (☞10.16 보고서 원문 보기)

CIA는 이틀 뒤인 10월 18일자 보고서에서는 "야당 지도자들에 대한 보복은 없을 거라는 공언에도 불구하고, 박 당선자의 주된 정적인 윤보선이 투옥될 거라는 시사점(hint)들이 있다"며 "(박정희) 정권은 그런 체포가 일어난다면 미국이 그를 강하게 비난할 것임을 알게 됐다"고 적었다. CIA는 "좌우간에, 박 당선자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11월 26일 총선에서 여당의 승리를 확실하게 할 더 극단적인 수단을 취하라고 그를 강하게 압박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10.18 보고서 원문 보기)

미국, 5.16 두 달 만에 "박정희 실패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이득"

그러나 2년 전, 5.16 정변 두 달여 후인 1961년 7월 19일자 보고서에서 CIA는 새뮤얼 버거 당시 주한대사의 판단이라며 "반란(revolt. 5.16을 지칭)의 동기는 애국주의, 민족주의, 반공주의다. 혁명 지도자들 가운데 기회주의자, 공산주의 잠복세력이 있을 수 있으나 박정희는 이 범주에 들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이 날짜 보고서의 '주한 미대사관의, 새 정권(5.16 군사정부) 내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 평가' 항목에서 버거 대사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이득이 될 가장 커다란 위험은, 내부의 분파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거나 경제적 문제에 봉착해 이 정권이 실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5.16 군사정변 두 달 만에, 군사정부의 실패가 북한 등 공산주의 진영에 이득이 될 것이라며 박정희 지도부를 지지해야 한다는 판단을 전한 셈이다.

CIA는 또 5.16 직후 군사정변을 이끈 세력들 간의 알력도 세세하게 보고했다. 1961년 7월 7일자 보고서는 박정희 소장이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지지파를 제거하고 지도부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려 한다는 동향을 담았고, 1962년에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자신의 측근이자 처조카인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견제하기 위해 송요찬 내각 수반 겸 외무부 장관에게 힘을 실어줬다는 보고가 올라갔다.

한편 CIA는 1968년 1.21 사태에 대해서는 같은 달 23일 자 보고서에서 "북한 잠입자들이 박 대통령 관저를 공격한 대담한 시도는 겨우 시작일 수 있다"며 북한의 추가 도발 가능성을 우려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보고서 첫머리에는 23일(한국시간) 북한 연안에서 발생한 푸에블로 호 사태가 놓였다.

CIA의 대통령 일일보고서 공개, 어떻게 이뤄졌나?

한국 관련 내용도 내용이지만, CIA가 이들 보고서를 공개한 것 자체야말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킬 만한 일이다. CIA는 홈페이지를 통해 보고서를 공개하면서(☞원문 보고서 전체 목록 보기) "이 보고서는 일요일을 빼고 매일, 오직 대통령만을 위해 작성된 것"이라며 "케네디 대통령이 1961년 6월 17일 버지니아주 고향집에서 첫 보고서를 받았다"고 유래를 소개했다.

CIA에 따르면, 케네디 대통령이 처음 보고를 받기 시작할 때 이 보고서는 '대통령 정보 체크리크스(The President's Intelligence Checklists. PICLs·피클스)'라고 불렸으나, 케네디가 1963년 11월 암살당한 뒤 1964년 1월 존슨 행정부 때부터는 '대통령 일일 보고(The President's Daily Briefs. PDBs)'로 개칭됐다.

현재 홈페이지에는 1969년 1월 20일 자 보고서까지 총 2484건이 올라와 있으며, CIA는 다음 달 중으로 수천 건을 더 공개할 계획이라고 미 의회 전문지 <더 힐>이 전했다. 오바마 정부는 내년 중에는 닉슨 행정부와 포드 행정부 당시의 PDB 2000건 가량을 추가로 공개할 예정이다.

당시 소련과 함께 세계 최강대국 중 하나였던 미국 대통령에게 매일 아침 보고되는 국제 정보 보고서는 당연히 극비로 취급됐으며, 현재 공개된 보고서 가운데도 일부 부분은 지워져 있다. 과거 조지 테닛 CIA 국장은 지난 2000년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아무리 오래되고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해도 PDB는 절대 공개하면 안 된다"고 했을 정도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의 정보 공개 강화 방침에 따라 결국 역사적인 PICLs와 PDB 자료가 공개되게 됐다. 존 브레넌 CIA 국장은 16일(현지 시각) 텍사스에서 "PDB는 가장 높은 수위의 극비 문서이고 정부 문서 중 가장 민감한 것"이라며 "역사를 배우는 학생들은 기밀 해제된 보고서를 보고 왜 대통령들이 국정을 운영할 때 여러 선택지 중에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브레넌 국장은 그러면서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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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훈

프레시안 정치팀 기자입니다. 국제·외교안보분야를 거쳤습니다. 민주주의, 페미니즘, 평화만들기가 관심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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