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전라도와 경상도의 투표 편차
한국의 성인 가운데 "지역주의", "지역감정", "지역균열", "지역구도", 등등의 문구를 한번도 안 써본 사람이 있다면, 정치에 관해서는 아예 말을 안 하는 사람일 것이다. 한국에서 정치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으레 "지역OO"가 큰 문제라고 걱정을 한다. "망국병"이라는 소리가 지금은 비록 전처럼 많이 사용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이 지역문제라는 것이 한국정치의 고질병이라는 데에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확히 무엇이 문제일까? 이 질문을 물을 필요도 없다고 보는 것이 지역주의를 병폐로 보는 유행담론에서 나타나는 기이한 특징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이를 성토하는 사람들이 문제가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은 채, 다만 "문제가 있다"는 데서부터 항상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에, 논의를 위해 문제라고 할 만한 것을 한번 재구성해 보자. 대략 세 가지 정도가 후보로 떠오를 수 있을 것 같다. 선거에서 나타나는 지역간 편차, 주요 정당들이 특정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집권하면 관직이나 이권을 독점하는 현상, 그리고 공동체 전체와 관련되는 무수한 의제들을 보지 못하고 단지 지리적 경계만으로 선호를 결정하는 향리주의, 등이 그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이 세 가지가 모두 같은 문제로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들은 모두 크게 다른 문제들이다. 서로 다른 문제들을 혼동하면서 "지역주의" 또는 "지역감정", 등등, 모호한 문구에 뭉뚱그려 버리니 문제의식이 개탄 이상으로는 도무지 한 걸음도 나아가지를 못하는 것이다.
우선 선거 때 지지율의 편차부터 살펴보자. <표4>는 1971년부터 2007년까지 대통령선거에서 전라도와 경상도의 각 행정구역에서 1위를 차지한 후보의 득표율을 모아놓은 결과다. 몇 가지 눈에 띄는 점들을 열거해 본다. ① 전라도에서 1987년부터 2002년까지 90%를 넘는 표결집이 일반적으로 발생했다. ② 경상도의 표결집은 전라도에 비해 20%포인트 이상 정도가 덜하고, 선거의 구체적인 사정과 지역에 따라 차이가 상당히 있다. ③ 특정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했지만 낙선한 경우, 다시 나올 때에는 지지율이 더욱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김영삼, 김대중, 이회창의 경우에 모두 공통된다.
두 지역 사이에 투표 성향의 편차가 이토록 상반된다는 것은 확실히 괄목할 만한 현상이다. 그러나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일이 곧 병폐인 것은 아니다. 튀어나 보이면 곧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르쿠제(Herbert Marcuse)의 용어를 빌리면 "억압적 평등주의"의 일종으로서, 익숙하지 않은 현상이나 대상에 대해서 이해해서 적응하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하고 공포 속으로 침잠해버리는 비겁한 폐쇄성에 불과하다. 현상으로 나타나는 편차의 정도가 아무리 심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병폐라고 간주하기 전에 먼저 그 일이 어떤 일인지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일에 관해서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을지, 취해야 할지 분간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데에는 공통의 가치보다는 공통의 적이 효과적이다. 천재지변과 같은 불가항력의 위기 또는 전쟁이나 경기침체와 같은 인위적인 위기에서 사람들은 평소의 차이들을 잊어버리고 공동 생존을 위해 협동할 자세를 더 많이 가진다. 선거에서 70% 이상의 몰표가 나온다면 먼저 찾아봐야 할 것이 지지보다는 반감이다. 부정적인 차원의 반감이라는 요소를 식별한 다음에야 비로소 긍정적인 차원의 지지라는 요소를 포착할 수 있다. 위의 표를 보면 최근 20년 또는 40년 동안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반감과 지지가 어떤 식으로 작용했는지에 관해 대략적인 윤곽이 보인다.
전라도 유권자들의 경우 '71년 선거에서 박정희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보다 8년전 '63년 선거에서, 관권개입이니 부정선거니 하는 논란은 모두 무시하고 공식 집계만 볼 때, 박정희는 전라도에서만 33만표를 앞서서 윤보선에게 승리할 수 있었다. 그해 전국 집계에서 차이는 불과 15만 6천표였기 때문에,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전라도의 지지 덕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후 4년 뒤, '67년 선거에서는 윤보선이 전라도에서 앞섰지만 차이는 47.4% 대 43.7%에 불과했다. 즉, '71년에 전라도에서 김대중이 받은 60%대의 지지는 박정희에 대한 실망이 섞이기는 했겠지만 적대감까지는 아니었고, 그보다는 김대중에 대한 기대가 표현된 결과로 봐야 한다는 말이다.
▲ '63년 선거에서, 관권개입이니 부정선거니 하는 논란은 모두 무시하고 공식 집계만 볼 때, 박정희는 전라도에서만 33만표를 앞서서 윤보선에게 승리할 수 있었다. ⓒ연합뉴스 |
하지만 1987년 이후는 90%를 넘는 지지가 일반적이고 심한 경우는 97%를 넘기도 했다. 이것은 적대감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무엇에 대한 적대감일까? 당연히 1980년 5월 광주학살에 대한 적대감이다. 학살도 학살이지만, 그 후에 이어진 은폐와 왜곡과 억압과 물타기가 직접 피해를 당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에게까지 정권에 대한 혐오를 심어서 90%를 넘는 표결집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정권교체를 향한 강력한 열망으로 이어져서, 현실적으로 당선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김대중에게 몰표를 줬다. 1987년부터 1997년까지 지지율 추이를 보면, 90%를 줘도 안 되니까 97%까지 표를 몰아준 셈이 된다. 노무현과 정동영에 대한 몰표는 광주의 진상과 책임이 확실히 규명되지 못하고 넘어간 데에 따른 불안감과 한국정치의 기본구조에 대한 변화욕구가 계속 특정정파에 대한 반감의 형태로 남아있다는 의미와 함께, 지난 20년 동안 습성화된 투표 성향이 상당기간 지속되리라는 의미를 가진다.
경상도의 경우에도 60% 대의 지지까지는 정책이나 노선 및 연고에 따른 기대와 지지가 반영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지만,, 표결집이 70%를 상회하게 되면 어떤 특정 현상이나 대상에 대한 적대감을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이는 위 표만으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최근 2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경상도의 표는 보수진영의 후보 분열로 자주 분산되었기 때문이다.
<표5>는 경상도의 유권자들이 무엇을 경계하고 어떤 세력을 배제했는지 엿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표4>에서 보이듯이, 1971년 선거에서 경상도에서는 70%를 넘는 표 결집이 나타났다. 당시 그 지역에서 박정희의 인기가 매우 높았으리라는 점은 당연하지만, 70%를 넘는 표결집은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63년 선거(경북 55.6%, 경남 61.7%), '67년 선거(경북 64.0%, 경남 68.6%)에 비교해도 현저히 높은 결집도이기 때문이다.
시선을 군단위로 좁히면 이 현상은 더욱 뚜렷해진다. '71년 선거에서 선산군은 90.8%, 청도군은 88.3%, 고령군은 84.4%의 몰표를 박정희에게 줬다. 선산군은 박정희의 출생지라서 으레 전국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그 점을 감안해도 90.8%란 '63년 77.8%나 '67년 82.1%에 비해 두드러진 결집이다. 청도군과 고령군은 각각 '67년 71.3%, 67,9%, '63년에는 63.0%, 64.3%로 '71년의 표결집이 얼마나 현저한지를 잘 보여준다. 그만큼 김대중의 당선을 경계하는 정서가 일어났다는 얘기가 된다. "김대중이 집권하면 경상도는 망한다"는 두려움이 이례적인 표의 결집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경계심이 1980년 이후 지속되었거나 강화된 것이 틀림없다. 단, 1987년에 노태우와 김영삼이 합해서 얻은 90% 이상의 득표가 모두 그런 경계심의 반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당시 김영삼 지지자 중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민주화 세력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 <표6>을 보면, 김영삼의 정치노선이 확실히 보수 쪽으로 이동한 1992년에 김대중에 대한 지지가 경상도에서 조금씩 회복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노무현이 2002년에 경상도에서 얻은 득표는 김대중이 1971년에 얻은 득표율에 육박한다. 물론 40년이 넘는 시차가 있기 때문에 직선적인 연결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치구도의 근본적인 변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없다고 가정했을 때, 영남의 유권자들이 잠재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정치적 지향성을 엿보는 실마리는 된다.
지금까지 논의를 통해서 부각된 요점들을 정리해보자.
첫째, 60%대 정도의 표결집은 상대후보나 정당에 대한 다양한 이유의 실망 또는 지지후보 또는 정당에 대한 다양한 유형의 기대 또는 호감의 결과로서 선거판에서 대단히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는 결과다. 다양한 이유와 다양한 유형이란 어떤 이념이나 장단기 이익에 대한 합리적 고려도 포함되지만, 정서적 연고적 기타 온갖 종류의 비합리적이거나 심지어 모순적이기까지 한 형태들을 가리킨다. 반면에 70%를 넘는 지지율이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된다면 지지후보에 대한 기대에 덧붙여 모종의 적대감이나 경계심에서 비롯되는 배타적 동류의식이 바탕에 깔려있기 쉽다.
둘째, 전라도의 경우 1980년 5월 광주학살과 그 사실을 은폐하고 도리어 폭동이었다고 몰아붙인 민정당 정권에 대한 반감이 1985년 국회의원 선거와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뚜렷하게 표출되었다. 1988년의 청문회와 1995년의 특별법, 그리고 1997년의 보상법 등이 있었고, 김대중과 노무현에 의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지만, 전라도 유권자의 정서에서 정치권력의 근본체질에 관한 불신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이 때문에 2002년과 2007년에도 한나라당을 경계하는 투표가 계속되고 있다.
셋째, 경상도의 경우에도 박정희-전두환 시대의 패권에 저항했던 세력이 집권하면 위험할지 모른다는 경계심이 70%를 넘는 표결집으로 나타난다. 단, 1997년과 2002년에 행정부를 내주기는 했지만 단지 2%포인트 이내의 미세한 차이였고, 2004년 탄핵의 역풍을 맞아 일시적으로 국회과반수를 허용했지만 금세 비토권을 회복했으며, 그 외에는 거의 모든 선거에서 보수세력이 유리한 정치환경이기 때문에 선거를 앞두고 분열이 자주 발생하여 외견적인 득표율로는 이러한 경계심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아울러 실제로 전라도에 비해서 경계심의 이유나 과녁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표결집의 정도도 조금은 덜하고 선거의 구체적 사정에 따라 변이하는 폭도 조금은 더 크다.
넷째, 전라도의 표결집은 기본적으로 광주학살의 기억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이 퇴색함에 따라 완화될 수밖에 없다. 단, 미국 남부의 경우 남북전쟁 때문에 발생한 반-공화당 정서가 흩어지는 데에는 대략 100년이 걸렸다. 미국인들이 한국인들에 비해 대체로 과거에 대한 집착이 덜하고, 남북전쟁은 어쨌거나 오늘날 남부주민 대다수조차 반대하는 노예제를 지탱하기 위한 남부의 도발로 시작된 일이지만 광주학살의 경우 누가 도발했는지가 공식적으로 명확하게 가려지지 못한 상태고, 그후 100년간 미국 남부의 투표성향이 전라도에서처럼 철저하게 일관적이지는 않았다는 등, 차이가 있기 때문에 평면적인 비교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남북전쟁 이후 공화당이 주도한 미국 연방정부에서 대대적인 재건의 노력을 기울이며 남부의 원한을 풀려고 애를 썼음에도, 반감이 표결집으로 표출되는 현상이 사라지는 데에는 100여년이 걸렸다는 사실은 충분히 적실성을 가지는 대목이다.
다섯째, 전라도의 경우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지나면서 정치권력 자체에 대한 피해의식이 다소 치유되었고, 아울러 자기편이라고 생각했던 정치인들에 대한 환멸도 발생했다. 그리고 1980년으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그리하여 2007년 선거에서는 전략적 표결집의 정도가 2002년에 비해 15%포인트 가까이 낮아졌고, 보수후보의 득표율도 이명박만 보면 8-9%, 이회창을 합하면 12%를 넘었다. 방어적 표결집의 정도가 일단 한번은 완화된 셈인데, 이것이 추세를 이루어 지속될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만약 현재 이명박 정권이 나타내는 것처럼 인권과 민주주의의 후퇴가 계속된다면, 가장 먼저 전라도 유권자들에게 경각심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
여섯째, 경상도의 표결집 현상이 전라도 표결집의 종속변수인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까지는 90%대의 결집과 70-80%대의 결집이라는 수치 차이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기가 쉽지만, 1971년의 70%대 표결집을 가능하게 만든 방어적 배타성이 흐트러졌다는 증거는 없다. 만약 호남의 표결집이 먼저 완화된다면, 영남의 배타성이 종속변수였는지 독립변수를 확인할 수 있는 실마리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 집권세력이 강권에 의존하는 정치행태를 보인다면, 그런 기회는 없어질 것이다. 따라서 이른바 "산토끼를 포기하여 집토끼를 확보하는" 전략의 일환으로서 "90% 몰표"를 비난하기 위한 빌미를 구한다는 관점에서는, 현정권이 의도적으로 공안통치를 강행할 유혹을 받을 여지도 없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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