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정동의 은밀한 '사업'과 박정희, 그 특별한 관계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유신 쿠데타, 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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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쿠데타, 첫 번째 마당] 여당도 당황케 한 청와대의 '공화국 죽이기' 작전


프레시안 : 유신 쿠데타 세력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걸 내세웠다. 그렇지만 그 골간을 이뤘던 유신 헌법은 민주주의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헌법이었다. 유신 헌법의 주요 특징은 무엇인가.

서중석 : 유신 헌법에 대해 일반 사람들이 '참 나쁜 헌법이다. 민주주의를 유린한 헌법이다', 이렇게는 알고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른다. 물론 대통령 한 사람한테 모든 권력이 집중된 헌법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해보라고 하면 대개 잘 못한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대통령 한 사람한테 권력이 집중됐는지 유신 헌법의 내용을 들여다보자.

우선 형식면에서 권력 쪽에서는 이걸 개정이라고 했다. 5.16쿠데타 이후 헌법을 만들 때도 개정이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어받는다는 뜻으로 그런 것이지만, 실제로는 제정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헌법에 쓰여 있던 절차에 따라 개정된 게 전혀 아니지 않나. 절차상 있을 수 없는 친위 쿠데타에 의해 이러한 헌법을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하지 않았나. 그건 5.16쿠데타 후 최고회의에서 의결한 것하고도 상당히 다르다. 최고회의에서는 그래도 상당한 토론, 논란이 있었고 복잡한 절차를 밟았는데, 비상국무회의에서는 그런 것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처리했다. 대통령이 서명하고 국무위원들이 부서하는 데 몇 시간도 안 걸렸다. 그러고 나서 국민 투표로 다 끝내버렸다.

5.16쿠데타를 일으킨 자들이 만든 제3공화국 헌법을 유린하고 만들었다는 점도 유신 헌법의 특징 중 하나다. 자신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 민정으로 가기 위해 만들었던 헌법마저 유린하면서 만든 것이다.

주권재민도, 3권 분립도 부정하고 국회를 무력화한 박정희

프레시안 : 내용면에서는 어떠한가.

서중석 : 유신 헌법은 민주공화국을 부정하는 헌법이었다. 얼마 전(2015년 7월) 유승민 의원이 새누리당 원내대표에서 사퇴하면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한 것도 떠오르는데, 어쨌건 주권재민의 원리가 부정되고 '통대'가 주권적 수임 기구로 엄연히 유신 헌법에 명시돼 있었다. 아울러 민주공화국이라고 하면 3권 분립으로 다들 이해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이 3권 분립이 부정됐다. 대통령한테 모든 권력이 집중된 형태로 국회를 무력화하고 사법부도 대통령에게 상당 부분 종속되게 하는 헌법 체계였다.

국회와 관련된 유신 헌법 조항을 보면 우선 국회의원을 뽑는 방식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2인 선거구제를 만들었다. 이걸 그 사람들은 중선거구라고도 불렀는데, 한 선거구에서 두 명씩 뽑는 방식이었다. 이런 2인 선거구제를 왜 만들었느냐. 이유는 아주 뻔하다. 대도시의 각 선거구에서 1인씩 뽑으면 야당에서 또 당선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2인 선거구제를 하면 국회 의석의 3분의 1은 공화당이 확고히 차지할 수 있다는 구도가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중앙정보부가 통제를 했을 것이다.

이 2인 선거구제와 결부해 무소속 출마를 허용했다. 이건 2인 선거구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5.16쿠데타 후 새 헌법과 정당법을 만들 때 무소속 출마를 금지했다고 전에 얘기하지 않았나. 그랬다가 유신 쿠데타 후 무소속 출마를 허용한 건 또 다른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다. 뭐냐 하면 2인 선거구제를 통해 여당은 3분의 1을 확고히 차지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머지 3분의 1을 하나의 야당이 확보하는 식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머지 3분의 1은 나눠먹게 해야 한다, 이것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야당이 여러 개 있어야 하고 또 무소속으로 여러 명이 나오면 야당은 3분의 1을 도저히 차지할 수 없다, 이 말이다. 그런 식으로 국회 의석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무력한 야당이 되도록 무소속 출마를 허용한 것이다.

그리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은 '통대'에서 뽑게 돼 있었다. 그런데 '통대'는 말이 국민 주권 수임 기관이지 허수아비 기구 아닌가. 이건 대통령이 다 임명하는 것이었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은 대통령에게 추천권이 있다고 헌법에는 돼 있지만 사실은 추천권이 아니라 임명권을 가졌다고 그 당시에 누구나 보지 않았나. '통대' 대의원 임기는 6년, '통대'에서 뽑은 국회의원의 임기는 3년으로 했다. 이렇게 뽑힌 국회의원들이 구성한 교섭 단체가 유신정우회(유정회)인데, 그 임기를 3년으로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대통령이 사랑한 사람, 부려먹을 사람, 여러 이유로 자리를 줄 필요가 있던 사람들에게 임기를 6년으로 해서 줘버리면 너무 길지 않나. 그러니까 3년씩으로 해서 되도록 많은 사람을 대통령이 충복으로 삼아 일을 시킬 수 있도록, 그들이 유신 체제를 수호하는 앞잡이로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었다. (유정회 의원들과 달리 국민이 총선에서 직접 선출한 국회의원들의 임기는 6년이었다. <편집자>)

이와 함께 대통령은 국회 해산권을 가지고 있었다. 일방적이었다. 국회는 정부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어떤 권한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국정 감사권을 삭제해버렸다. 국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를 없앤 것이다. (유신 쿠데타가 일어난 시기는 마침 국정 감사가 한창인 때였다. 유신 쿠데타로 국정 감사는 즉시 중단됐다. 국정 감사권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부활한다. <편집자>) 또 국회의 회의 일수를 팍 줄였다. 임시 회기는 30일, 정기 회기는 90일을 넘길 수 없게 했다. 이런 식으로 해서 1년간 국회 개회 일수를 150일 이하로 단축시켰다. '국회의원들, 쓸데없이 모이지 말아라', 이런 이야기인 셈이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광범위한 긴급 조치권을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입법부의 역할이 상당히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긴급 조치를 할 수 있지 않았나.


▲ 유신 쿠데타는 주권재민의 원리도, 3권 분립도 부정했다. 사진은 유신 쿠데타 이듬해인 1973년 2월 27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투표하는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딸 박근혜(현 대통령). ⓒ연합뉴스


고려·조선 국왕보다 훨씬 막강했던 유신 대통령

프레시안 : 사법부도 상당 부분 대통령에게 종속되게 한 헌법이라고 지적했다. 어떤 장치를 통해 그렇게 했나.

서중석 : 법관 추천 회의제가 이 헌법에 의해 폐지됐다. 모든 법관을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법원장의 제청에 의해 대통령이 임명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그건 형식이었다. 재임용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법관 임명권이 대통령한테 실질적으로 귀속됐다고 여러 책에 쓰여 있다.

유신 쿠데타 이전에 대법원이 그래도 좀 힘이 있고 최고 3부 중 하나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한 것 중 하나가 위헌 판결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데서는 대개 헌법재판소가 갖고 있지만 제3공화국에는 그게 없지 않았나. 그래서 대법원이 위헌 판결권을 갖고 있었던 것인데, 그 위헌 판결권도 폐지해버렸다. 유신 헌법은 위헌 법률 심사 제청권만 사법부에 부여했다. 위헌 법률 심사 결정권은 헌법위원회라는 데로 이관했는데, 헌법위원회라는 건 제대로 있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있으나 마나 한 기구였다.

구속 적부심 제도도 폐지했다. 법원의 중요한 권능 중 하나인데 그렇게 됐다.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라면 어느 나라든 고문 등에 의한 자백을 근거로 처벌할 수 없게끔 법률에 돼 있지 않나. 그런데 고문 등에 의한 자백을 근거로 처벌할 수 없다는 조항을 삭제해버렸다. 재판을 받을 때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제도를 없애버린 것이다. 그만큼 권력이 자의적으로 재판에 개입 내지 관여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긴급 조치도 마찬가지다. 이것도 법원의 권한을 굉장히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나.

이처럼 대통령은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실질적으로 임명한다든가 국회 해산권을 갖는다든가 하는 건 물론이고 법관을 임용 또는 재임용하는 데에도 직접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간접적인 면, 그러니까 국회와 법원의 기능이 약화됐으니 그만큼 대통령의 권한이 강화되는 면도 있었다.

거기다가 유신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은 국가의 중요 정책을 국민 투표를 통해 결정할 수 있는 권한, 헌법 개정안을 발안해 국민 투표에 의해 확정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주권적 수임 기구인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으로서 통일 정책의 결정이나 변경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부의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헌법에 그렇게 못을 박아놓았다. 다시 말해 유신 헌법에서 대통령은 국가 지도의 최고 수임자로서 영도자, 퓌러(Führer)의 지위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유신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정했다. 그러나 재선을 제한하는 규정은 없었다. 영구 집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것이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프레시안 :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요즘에도 심심찮게 나온다. 그런데 유신 헌법을 보면 이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 정도가 아니라 제왕을 능가하는 수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유신 체제에서 대통령은 국회 해산권, 법률안 거부권, 긴급 조치권, 그와 함께 헌법위원회 위원장, 대법원장, 국무총리 등 공직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어서 제왕 내지 황제와 같은 권한을 갖고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들을 많이 했다. 그런데 실제로 고려나 조선의 왕보다 유신 체제의 대통령이 훨씬 더 강력했다고 난 본다.

조선의 왕만 보더라도, 고려의 왕은 더 힘이 없었지만, 왕을 견제하는 여러 기구가 있지 않았나. 간하는 기구도 있었고 3정승 제도도, 의정부도 왕권 견제 기구라고도 볼 수 있다. 또 고려에서는 도병마사, 나중에는 도평의사사에서 중요 국정을 의논해 결정했는데, 꼭 다수결만은 아니었지만 다수 의견을 중시했다. 조선의 경우 중기 이후에 비변사가 그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왕이 하고 싶어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무척 많다. 유신 대통령은 그와 달랐다. 명령만 내리면 그걸 수행하는 중앙정보부, 비서실, 특명 기구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신 헌법이 보장하는 강력한 대통령 권한까지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 권한이 강할 수 있게 만든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유신 헌법에 의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극도로 위축되고 제한을 받게 됐는데 특히 대통령이 긴급 조치를 발동함으로써 그렇게 됐다. 그중에서도 1975년 5월에 선포한 긴급 조치 9호는 기본적 자유를 아주 폭넓게 제한하지 않았나. 이렇게 국민들의 기본권이 크게 위축, 제한된다는 건 그만큼 중앙정보부 같은 특수 기구, 특명 기관들이 힘이 있었다는 걸 이야기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렇기 때문에 모든 권력을 대통령한테 집중시킬 수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유신 헌법이 전두환 신군부가 만든 헌법하고 크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오로지 박정희만 대통령으로 선출하도록 설계된 유신 체제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인가.

서중석 : 뭐냐 하면 대통령으로 박정희만 선출하게 돼 있었다는 것이다. 유신 헌법하고 '통대' 선거법 등을 쭉 보면 그렇게 돼 있다. 그 점이 아주 큰 특징이다. 대통령은 '통대'에서 선출하게 돼 있었는데 박정희가 '통대' 의장이지 않았나. 내가 알기로는 부의장도 없었다. 부의장이 누구인지 들어본 적이 없다. 즉 '통대'는 다 의장 말에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의장 말고 누가 대통령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점도 사람들이 떠올릴 수 있지만, 실제 '통대'에서 대통령을 뽑는 것과 관련된 법률 같은 걸 보면 그 점을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유신 체제에서 대통령에 입후보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법을 규정한 법을 보면 "대통령 후보자를 추천하고자 하는 대의원은 국회의원의 피선거권이 있고 계속하여 5년 이상 국내에 거주하고 40세에 달한 자를 대의원 200인 이상의 후보자 추천장과 후보자가 되려는 자의 승인서를 첨부하여 신청하도록 함", 이렇게 돼 있었다. 후보자 승인서를 첨부하라는 건 '난 대통령 선거에 안 나가', 이러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박정희가 나가려고 하는데 이 당시 분위기에서 누가 감히 승인서를 첨부할 수 있었겠나. 또 대통령 후보자를 추천하는 게 매우 힘들게 돼 있었다. 이런 까다로운 조건 속에서 대의원 200명 이상의 후보자 추천장을 누가 받을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랬다.

어쨌건 대통령 선거를 위한 통일주체국민회의 집회 공고일로부터 선거일 전날까지 사무처에 등록을 신청하고, 후보자 등록이 있을 경우 통일주체국민회의 사무총장은 지체 없이 이를 공고하게 돼 있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거할 때는 대통령 후보자에 대한 토론 없이 무기명으로 투표용지에 후보자 한 사람의 성명을 기재하는 것으로 투표가 끝난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359명이 모여 찬반 토론 같은 걸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이미 등록한 사람의 이름을 써넣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실제로 어떻게 됐는가를 보자. 내가 쭉 살펴보니까, 12월 23일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한다는 공고가 1972년 12월 18일에 났다. 시간을 닷새밖에 안 준 것이다. 그 상황에서 대의원 200명 이상의 추천장을 받아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한 사람밖에 받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날부터 대통령 후보 등록을 하게끔 돼 있었는데 12월 22일 곽상훈 등 515명이 박정희를 대통령 후보로 추천해 등록했다. 12월 22일은 대통령을 뽑기 바로 전날이다. 그러고 나서 그다음 날 2359명이 전원 출석해, 뭔가를 잘못 써서 무효표가 된 2명을 빼놓고는 다 박정희를 찍어버렸다.

이런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가 대통령 후보로 추천을 받기도 힘들지만 어떻게 등록을 할 수 있었겠느냐, 이 말이다. 선거 과정을 보면 며칠 내로 오직 한 사람만 등록하고 '통대'가 그 사람에게 투표하는 방식이 될 수밖에 없게 돼 있었다. 그러니 이건 대한민국에서는 자동적으로 단 한 사람, 즉 박정희만 뽑게 돼 있었던 것이다. 전두환 신군부 정권 때는 그렇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래도 여러 명이 나오도록 돼 있었다. 하여튼 제도 및 그 구체적인 운용 과정을 보면 대통령 박정희 한 사람만이 '통대'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게끔 돼 있었다.

프레시안 : 곽상훈은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때 이승만 정권에 밉보여 국제 공산당으로 몰렸던 그 곽상훈인가?

서중석 : 맞다. 그 사람이다. 극우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고 보통 반공 투사가 아니었는데, 부산 정치 파동에서는 국제 공산당으로 몰려 구속되는 기막힌 일도 겪었다. 민주당 정부 때 국회의장(민의원 의장)을 지내기도 하는데, 5.16쿠데타가 난 후에는 청와대에 들락거렸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평은 괜찮았다. 그러니까 민의원 의장도 한 것이다. 이 사람은 자유당하고도 말이 잘 통했다. 그런 점에서 특이한 사람인데, 극우 반공 체제를 유지하는 데 굉장한 공로를 세운 인물 중 하나다. (곽상훈의 이름은 1978년 두 번째 체육관 대통령을 만들 때도 등장한다. 이때 박정희를 단일 후보로 추천·등록한 것은 곽상훈 등 507명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었다. <편집자>)

어쨌건 이렇게 선거 과정, 투표 과정을 보면 박정희 한 사람만 뽑게 돼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신 체제가 대통령으로 박정희 한 사람만 뽑도록 돼 있었다는 건 박정희가 죽은 다음 전개된 상황에서도 잘 알 수 있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박정희가 10.26으로 죽고 나서 며칠 후인 1979년 11월 2일 <뉴욕타임스>는 서울 특파원 발 기사로 "한국 군부의 고위 장성들이 10월 29일과 30일 양일간 국방부에서 비밀 회합을 하고 유신 헌법을 폐기하기로 비공식 합의를 봤다"고 보도했다. 1972년 10.17쿠데타에 동원됐고 그다음 날에는 전군 지휘관 회의를 열어 박정희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던, 유신 체제를 떠받쳐온 군부 아닌가. 그런 군부가 박정희가 죽은 지 3일밖에 안된 시점에 '유신 체제는 박정희에게만 맞는 옷이다'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도 11월 6일 "제3공화국 헌법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면 된다면서 빠른 시일 내에 헌법을 개정하자고 역설했다. 그 후 정승화 계엄사령관 등 군부의 의견이 포함된 정치 일정이 나온다. 박정희 장례를 치르고 나서 일주일 후인 11월 10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은 유신 헌법에 따라 새 대통령을 선출하되 새 대통령은 "잔여 임기를 채우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빠른 기간 내에 헌법을 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했다. 박정희 한 사람만 대통령이 될 수 있던 유신 헌법은 이제 안 된다는 걸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도 분명히 한 것이다.

12.12쿠데타로 신군부라는 다른 세력이 등장하지만 그런 전두환 신군부 세력조차 '유신 체제는 좀 변형해야 한다. 한 사람만을 위한 체제는 안 된다'고 보고 서로 나눠먹기식으로, 그러니까 전두환이 먼저 대통령을 한다는 식으로 되지 않나. 그 점에서 유신 체제와 적잖은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유신 체제는 박정희 한 사람을 위한 절대 권력 체제, 박정희 1인 독재 체제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유신 헌법을 만들 때 일반 사람들한테 알리거나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 1979년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 밀실에서 10.26사건이 일어난다. 그렇게 유신 체제는 1972년 유신 헌법 작업이 은밀히 진행됐던 그곳에서 처참하게 막을 내렸다. 사진은 10.26사건 다음 날인 1979년 10월 27일, 비상 계엄 상태에서 중앙청 앞에 자리 잡은 탱크. ⓒ연합뉴스


유신 체제가 막을 내리는 궁정동 밀실에서 은밀히 탄생한 유신 헌법

프레시안 : 유신 헌법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나.

서중석 : 박정희는 나중에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 밀실에서 죽지 않나. 바로 그 궁정동 안가 밀실에서 유신 헌법을 비밀리에 만들어냈다. 거기서 유신 헌법의 골자를 은밀히 만들어낸 과정에 대해서는 이경재, 김충식, 이상우, 이 사람들이 쓴 글이 자세하기 때문에 그 세 사람 글을 참고해 이야기하려 한다.

우선 이 글들을 보면 유신 헌법을 만든 이들이 언제부터 궁정동 별실에 드나들었느냐 하는 것에 대해 1972년 5월 초라는 설도 있고 5월 중순부터라는 설도 있다. 5월 중순이 더 사실에 맞지 않겠나, 난 그렇게 생각한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그해 5월 2일 북한에 가서 5일에 돌아오지 않나. 박정희로서는 이후락이 어떤 선물을 안고 내려오느냐에 따라 구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굉장한 선물을 가지고 오느냐, 그와 달리 대단한 건 못 가지고 오느냐를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후락이 정말 굉장한 선물을 안고 오지 않았나. 그건 나중에 일정한 과정을 거쳐 7.4남북공동성명으로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해 7.4남북공동성명 같은 빅뉴스로 국민들이 통일 문제에 쫙 빠지게 할 수 있는 굉장한 선물을 가져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5월 중순경 유신 체제로 나중에 알려지는 유신 헌법 체계를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프레시안 : 훗날 유신 체제가 처참하게 막을 내리는 그곳이 다름 아닌 유신 헌법을 만든 곳이라는 사실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누구를 중심으로, 어떤 단위에서 유신 쿠데타 계획을 그토록 은밀하게 추진한 것인가.

서중석 : 유신 헌법을 만드는 데 또는 유신 체제의 골격을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자들이 누구냐. 이것을 가지고도 논자에 따라 한두 명씩 차이를 보이기도 하는데, 핵심은 세 사람이다. 박정희가 총지휘자이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부지휘자, 그리고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이 세 사람이 면밀히 밑에 일을 시키고 거기서 올라오는 보고 같은 걸 검토하면서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결정해나간 것 아니냐, 이렇게 파악된다.

김충식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감나무 잎이 필 무렵인 1972년 5월 중순경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중앙정보부 판단기획국 부국장 김 아무개를 불러 암호명이 풍년 사업인 비밀 작업을 안가에서 숙식하면서 하도록 했다. 김 아무개라는 사람은 프랑스, 스페인, 대만 등지의 헌법 자료를 참조하면서 입법, 사법, 행정 3권이 박정희 한 사람한테 집중되는 권력 구조를 기안해 이후락에게 보고했다. 이 마스터플랜을 궁정동에서 세우는 데 참여한 사람들은 "국회의원들이 반발하고 국민들도 의아해 할 게 뻔하므로 전광석화처럼 작전을 전개하고 긴장을 유발해 새로운 체제에 대한 국민의 기대를 이끌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한 작전으로 구체적인 작업 결과가 나오면 그걸 거의 매주 박정희, 이후락, 김정렴, 이 3인 회의에 넘겼다고 한다. 청와대 정무비서관 홍성철, 유혁인 같은 사람들도 이 작업에 더러 참여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이렇게 실무팀에서 구체적인 작업을 하고 그걸 세 명이 점검하고 때로는 홍성철, 유혁인 같은 사람도 끼어서 했다고 하더라도 기본 방향을 제시하고 감독, 점검한 것의 중심엔 박정희가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상우에 따르면, 유신 헌법 가운데 핵심인 대통령의 긴급 조치권이나 대통령 선출 방법 등에 관해서는 마지막 단계에서 박정희 자신이 직접 조항을 기초하거나 수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신 헌법은 바로 박정희의 정치 철학과 통치 방식을 제도적으로 구현한 산물임을 그 헌법이 구상·제정된 과정에서도 인식할 수 있다는 얘기다.

기획소위원회라고 불린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팀이 이처럼 박정희의 지시, 보완 작업을 거쳐 유신 헌법의 골격을 마련했다. 그 골자를 받아, 10.17쿠데타가 일어나고 계엄이 선포되자 구체적으로 헌법을 조문화, 법제화하는 작업은 법무부의 헌법심의회에서 맡았다고 한다. 헌법심의회는 신직수 법무부 장관을 비롯해 이형호 보사부 장관, 서일교 총무처 장관, 유민상 법제처장, 그리고 한태연, 갈봉근 교수로 구성돼 있었다. 그리고 실무진으로 안경렬, 이영환 대검 검사 그리고 김기춘, 성민경, 김유후 검사 같은 검찰 엘리트 등이 차출돼 참여했다.

신직수는 박정희와 군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인물이다. 박정희가 1군 참모장을 할 때 검찰과장이었다. 5.16쿠데타 후에는 중앙정보부 차장,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같은 요직을 맡았다. 그런 신직수는 박정희의 정치적 구상을 법률로 구체화할 수 있는 적임자였다고 볼 수 있다. 한태연, 갈봉근 이 두 교수는 나중에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들어가 유신 체제의 법률적 자문역을 맡게 되는데 유신 체제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스페인, 대만 등을 직접 돌아다니면서 대만의 장개석식 총통제, 스페인의 프랑코식 총통제, 프랑스의 드골식 대통령제를 쭉 연구해온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로 헌법심의회를 구성해 구체화한 것이다.

김종필도, 여당 최고위층도 따돌림 당했다

ⓒ오월의봄
프레시안 : 젊은 독자들에게도 낯익은 이름이 나왔다. 김기춘. 박근혜 정부 출범 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바로 그 사람이다. 박정희 정권 때는 유신 헌법 탄생에 일조하고 1990년대에는 초원복집 사건으로 많은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김기춘은 21세기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도 정권의 실세로 불렸다. 김기춘이 걸어온 길을 기억하는 많은 국민들에게도, 한국 민주주의에도 참 씁쓸한 풍경이었다. 다시 돌아오면, 당시 박정희 정권의 고위층 중 상당수도 유신 쿠데타가 나기 얼마 전에야 알았던 것으로 돼 있다. 구체적으로 언제 알게 되나.

서중석 : 비밀리에 만들었기 때문에 이경재 기자에 따르면 총리였던 김종필조차 3일 전에야 알았다고 한다. 그 시기에 대해 약간 다르게 나오는 자료도 있다. 유신 체제와 비슷한 것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그보다 조금 앞서 알았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을 언제 알았겠느냐, 이게 문제일 것이다. 국무위원들의 경우 유신 헌법 작업에 참여한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는, 이경재 기자에 의하면, 10월 17일 오후 6시 청와대에 소집된 국무회의 자리에서 알게 됐다고 한다. 쿠데타의 성격에 대해, 그러니까 왜 군이 출동해 서울 한복판에 들어온 것인지를 그때서야, 그러니까 당일 그것도 특별 선언 1시간 전에야 공식적으로 들었다는 말이다. 정일권 공화당 의장 서리, 백두진 국회의장도 17일 당일 청와대에 불려가 통고를 받은 것으로 나와 있다.

청와대 특보들과 비서진, 이 사람들은 어땠느냐. 17일 오전 대통령이 '집무실로 모여라'라고 해서 이 사람들은 거기에 갔다. 박 대통령은 유인물을 보여주면서 한 번씩 읽어보고 각자 의견을 말해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게 바로 특별 선언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이경재 기자의 표현에 의하면 너무도 엄청난 일에 모두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질문을 하거나 의견을 말해보라고 박정희가 지시했지만, 그 상황에서 아무도 입을 떼지 않으려 했다고 그런다.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한, 정말 놀라운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프레시안 : 다른 기관은 어땠나.

서중석 : 중앙정보부가 유신 체제를 책임진다고까지 하기는 뭐할지 몰라도, 유신 체제를 맞이하면서 중앙정보부처럼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된 데가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만큼 혹심하게 유신 체제에 대한 반대 세력을 탄압해야 하는 곳 아니었나.

그러면 풍년 사업을 진행한 이들 말고 중앙정보부의 여타 고위 간부들은 언제 알았느냐. 중앙정보부 국장들은 10월 17일 비상 계엄을 선포하기 일주일 전쯤 알게 된 것으로 돼 있다. 그래도 일찍 알려준 편이다. 김충식 기자에 따르면 이때 국장단을 소집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말 그대로 비상한 조처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공식 발표 때까지 절대 보안을 강조하고 나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번 특별 조처는 냉전 시대에서 남북 대화 시대로 넘어가기 위한 체제 강화가 목표입니다. 헌법도 바꾸고 거기에 따라 국회도 해산해버리고 새로 구성하는 것입니다." 국장들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어안이 벙벙했고, 엄청나고도 충격적인 사태가 온 것이어서 중앙정보부 각 부서의 임무가 아주 복잡해질 게 분명하다고 느꼈다고 돼 있다. 이들 중 한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식으로 헤쳐가야 할지 아득하기만 했다고 그런다.

중앙정보부장 다음 직위라고 볼 수 있는 보안사령관 강창성은 9월 2일 박정희한테 직접 통고를 받았다. 상당히 빨리 알려준 셈인데,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질 나쁜 야당 의원 몇 명을 달아매야 한다'는 걸 알려주려고 그런 것이다. '때가 되면 바로 이런 작업에 착수하라'고 이야기하려니까 그 날짜를 일찍 알려준 것이다.

여기서 유신 체제의 특이한 성격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 1인 체제라는 점도 있지만 유신 체제는 경제 상황을 포함해 정치적, 사회적 위기의 산물로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워낙 특수한 정치 권력으로서 유신 체제의 성립도, 붕괴도 박정희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독특한 체제가 나타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유신 체제에는 굉장히 중요한 모순이 있었다.

프레시안 : 어떤 모순인가.

서중석 : 뭐냐 하면 10월 17일 쿠데타 이전까지 한국에서는 서구적 민주주의를 하고 있지 않았나. 그렇기 때문에 유신 체제에서도 복수 정당제 또는 야당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복수 정당제를 인정했고 국회의원의 3분의 2는 선거로 뽑았다. 불완전한 파시즘 체제라고 할 수도 있는 그런 체제는 박정희 1인 체제와 모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에 따라서, 그리고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경제 실패까지 겹치면서 유신 체제가 1978년 말 제2기로 넘어간 후 채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열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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