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도 당황케 한 청와대의 '공화국 죽이기' 작전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08> 유신 쿠데타, 첫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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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박근혜 정권 탄생을 전후해 '유신 망령의 부활' 이야기가 곳곳에서 나왔다. 그런데 젊은 세대의 상당수에게 유신 쿠데타는 먼 얘기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1990년대 중반 대학에 다닐 때 해방, 한국전쟁 등에 대해 '중요하지만 나와는 거리감이 상당한 사안'이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요즘 20대의 상당수는 해방, 한국전쟁은 물론 유신 쿠데타에 대해서도 그와 비슷한 거리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는 '유신 망령의 부활' 우려를 지나친 걱정으로 치부할 수 없는 상태로 한 걸음씩 내디뎌왔다. 그런 의미에서 유신 쿠데타를 찬찬히 되짚었으면 한다.


서중석 : 유신 체제 성립과 그 배경을 다루는 것이 이번 인터뷰 중심 과제인데, 이번 인터뷰는 그동안 했던 어떤 인터뷰보다도 길 것 같다. 한일협정 체결 이후, 그러니까 1966년부터 유신 쿠데타가 일어나는 1972년까지 역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쭉 살펴보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1966∼1967년에서 1972년 연말까지의 역사가 다 들어간다. '현대사 이야기'에서 그간 1961년 5.16쿠데타부터 1965년 한일협정과 국교 정상화까지를 두 차례 이상에 걸쳐 다뤘는데, 이번 인터뷰에서 살피는 시기는 그 기간보다 더 길다. 1.5배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기에 사건도 많이 일어난다. 그래서 자연히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유신 체제의 성립과 그 배경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 이유가 충분히 있다.

프레시안 : 그러한 역사적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1972년 10월 17일 유신 쿠데타가 일어난 후 그 아류 내지 유신 체제의 서자라고 볼 수 있는 전두환 신군부 체제가 1987년 6월항쟁으로 크게 바뀔 때까지 15년 걸렸다. 15년은 우리 현대사에서 엄청나게 긴 기간이다. 1945년부터 1987년까지를 놓고 보면 더더욱 긴 기간이다. 그 15년간 철권, 강권, 폭압, 그리고 민주주의 헌법을 유린한 통치가 이뤄졌다. 전두환 신군부 통치는 유신 쿠데타의 연장 아닌가. 그 전체가 다 1972년 10월 17일에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한다. 자유와 민주주의 측면에서 볼 때는 1910년대 일제의 무단 통치에 비견할 만한 암흑의 15년이 1972년 10월 17일부터 1987년 6월 29일까지 계속됐다. 그렇게 지독한 폭압 정치가 있게 된 배경, 그 성립 과정을 자세히 안 볼 수가 없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뭐냐 하면 1990년대 중반부터, 그러니까 1995년경에 시작돼 특히 IMF 구제 금융 위기 때부터 막 퍼져 나간 박정희 신드롬 문제다. 박정희 신드롬은 민주주의는 물론 남북 관계, 한반도 평화 같은 것에도 굉장히 위협적인 요소이고 균형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하는 것도 아주 힘들게 만드는 요인이다.

한 번 생각해보자. 박정희가 대통령을 할 때 국민적인 지지를 받았나? IMF 위기 이후 박정희를 거의 신처럼, 또는 경제 대통령 비슷한 식으로 그 사람만 다시 출현하면 우리 경제가 되살아날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한때는 있었다. 그런데 과연 박정희 집권 18년 시기에 다수의 국민들이 박정희를 경제 대통령이라고 봤느냐 하면, 꼭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1963년, 1967년, 1971년 대선 표를 분석해보면 도무지 그렇게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유신 시대에 딱 하나, 일반인들의 의사가 그래도 어느 정도 들어간 선거라고 볼 수 있는 것은 1978년 12.12총선인데 이 선거에서도 여당이 야당한테 득표율에서 졌다. 유신 체제 말에 박정희가 그렇게 큰 지지를 받았다면, '정말 경제 대통령이다. 이 사람 없으면 우리나라 큰일 난다'고 국민들이 생각했다면 그런 선거 결과가 나왔겠나.

그런데도 1995년경부터, 특히 IMF 위기 이후 박정희 신드롬이 폭넓게 퍼졌다. 그러면서 묻지 마 선거까지 출현한 것 아닌가.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후보의 경우 점검해야 할 것이 참 많았는데도 성장 제일주의가 횡행하면서 '그런 걸 뭘 따지느냐' 하는 식으로 선거가 치러져버렸다. 2012년에는 50대에서 70대가 대거 투표장으로 향했는데 이분들의 상당수는 유신 때 초·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녔거나 또 문화생활을 주로 저녁밥 먹고 TV 중심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분들이다. 그래서 유신 시대에 이뤄진 교육이나 TV를 통해 많은 영향을 받은 세대인데 이 세대의 상당수가 묻지 마 선거를 한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지를 놓고 보면, 박정희 신드롬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한국에 미래가 있을 수 있겠나? 민주주의도 그렇고 인권도 그렇고 자유도 그렇고 남북 관계, 한반도 평화, 바람직한 경제 발전 어느 것을 봐도 그렇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역시 박정희를 제대로 보는 것이 필요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유신 쿠데타가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그 배경까지 쭉 훑어보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도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의 문제적 인물이다. 사진은 지난 2011년 8월 27일 경북 청도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성역화 사업 준공식에 참석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이날 공개된 박 전 대통령 동상에 손을 대며 활짝 웃는 모습. ⓒ연합뉴스

그야말로 돌연히 일어난 친위 쿠데타, 암흑의 15년을 열다

프레시안 : 유신 쿠데타의 그날, 어떤 일이 벌어졌나.

서중석 : 1972년 10월 17일 그야말로 돌연히 친위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날 오후 6시경에 탱크 부대가 중앙청, 이젠 없어졌지만 경복궁 쪽이던 그 중앙청으로 가고 계엄군이 태평로, 중앙청 일대에 포진했다. (조선총독부 건물이던 중앙청은 해방 후 미군정청, 중앙청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1995년 철거됐다. 편집자) 태평로에는 국회 의사당이 있었다. 요즘엔 잘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예전엔 국회 의사당이 거기 있었다.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있는 동아일보사, 조선일보사까지 다 접수한 계엄군은 조금 지나서 공화당사도 접수했다. 이때 정일권이 공화당 의장 서리를 맡고 있었는데, 그 정일권이 했다는 이야기가 당시 상황을 얘기해준다. 계엄군이 진주하고 공화당사까지 접수하니까 정일권은 침통하게 "국회도 해산되고 정당 활동도 중지될 모양입니다. 우리 공화당도 어떻게 될지 그 운명을 모르니 여러분 각자 자중자애하시도록…", 이렇게 말하고 그다음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만나게 됐는데, 그전에 '오후 7시에 중대 뉴스가 발표된다'고 예고됐다. 그때는 TV를 가진 사람은 소수였다. 라디오도 아주 많진 않았지만 그래도 상당히 보급돼 있었다. 드디어 오후 7시, 라디오에서 박정희의 특별 선언이 나왔다. 특별 선언 요지는 이랬다.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를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 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일부 효력이 정지된 헌법 조항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에 의하여 수행되며 비상국무회의의 기능은 현행 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한다." 10월 27일, 그러니까 쿠데타 열흘 후라고 날짜까지 정해놓았다. 그때까지 헌법안을 다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전국 일원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 활동 중지, 헌법 개정 등과 같은 비상 조치를 발표했다. 계엄 사령관으로 노재현 육군 참모총장이 임명되고 전후방 및 각 지역 계엄 사무소장 및 분소장들도 쭉 임명됐다. 이어서 계엄 사령부의 포고 제1호가 나왔다. "모든 정치 활동 목적의 옥내·외 집회, 시위를 일체 금한다."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한다는 이야기다.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한다. 각 대학은 당분간 휴교 조치한다. 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를 금한다", 이런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 다음 날인 18일 국방부에서 전군 지휘관 회의가 열려 국민들을 한층 얼어붙게 했다. 유재흥 국방부 장관이 주재한 이 회의에는 노재현 계엄 사령관을 비롯해 계엄소장, 분소장과 주요 군 지휘관 99명이 참석했다. 전군 지휘관 회의가 끝난 후 이들은 청와대를 방문해 자신들의 충성이 변함없음을 굳건히 다짐했다. 계엄 선포 형식으로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니까 군이 역할을 맡은 것이고, 새로운 체제로 가려는 것을 군이 굳건히 지지한다는 걸 그다음 날 확고히 보여준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쿠데타 닷새 후인 10월 22일 비상국무회의라는 게 첫 번째 회의를 열었다. 소위 비상국무회의라는 것에 대해선 1961년 5.16쿠데타 직후 만들어진 국가재건최고회의(최고회의) 그리고 1980년 5.17쿠데타 후 다섯 달 만에 만들어지는 국가보위입법회의(입법회의)하고도 비교가 안 되게 '어떻게 이런 게 중요한 입법을 할 수가 있느냐'라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 유신 쿠데타 소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1972년 10월 18일 자 1면. ⓒ<동아일보> 웹사이트 갈무리


완장 차듯 '비상' 자 붙이고 1인 독재 발판 법안 양산한 비상국무회의

프레시안 : 어떠한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어쨌건 최고회의는 쿠데타를 일으킨 군 최고 실력자들이 모였던 곳이고 전문가들이 그걸 뒷받침해준 것으로 돼 있다. 각 상임위도 있고 그랬다. 군인들에 의한 일종의 국회와 비슷한 것으로, 국회와 행정 양쪽을 동시에 통할했던 기구다. 예컨대 헌법 하나 만들 때에도 여러 절차를 많이 밟았다. 내부에서도 절차를 밟고 전문가 의견을 수렴하는 형식도 갖추고 그랬다. 입법회의도 어쨌거나 이름 자체에서 국회의 기능을 맡았다는 냄새를 풍겼고,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끌어왔다. 물론 어용 세력들이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직능이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넣었다.

그런데 이 비상국무회의라는 건 그런 것도 아니었다. 국무회의가 이미 있었는데, 아 그 앞에다가 '비상' 자만 붙여놓고 헌법 개정안 의결까지 포함해 모든 중요한 입법 기능을 거기에 부여해버린 것이다. 이건 말이 안 된다는 수준을 넘어 도대체 어떻게 이런, 기구도 아닌 것을 가지고 일을 처리하려고 한 것이냐, 이 말이다. 며칠 내로 모든 걸 처리하려다보니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0월 22일 비상국무회의는 비상국무회의법, 국민 투표에 관한 특례법 및 시행령, 선거관리위원회에 관한 특례법 및 시행령 등을 통과시켰다. 그로부터 5일 후인 10월 27일, 10.17 특별 선언에서 이야기한 대로 비상국무회의에 올라온 헌법안에 박정희가 서명하고 김종필 국무총리와 전 국무위원이 부서했다.

그러고 나서 국민 투표에 부치게 되는데, 비상국무회의에서는 그것들 말고도 많은 법을 만들었다. 12월 27일 대통령이 취임식을 하며 '체육관 대통령'이 나오지 않나. 그런데 그 이후인 1973년 1월 31일 비상국무회의는 유언비어죄를 포함해 45건의 법안을 무더기로 통과시켰다. 2월 2일에는 국정 감사권 폐지 등 국회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걸 어떻게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하여튼 이것도 의결했다. 2월 6일에는 방송법 개정안도 의결했다. 1인 독재를 하는 데 당장 필요하다고 볼 수 있던 법 같은 것들을 비상국무회의라는, 아주 신속하게 통과시킬 수 있는 기구를 통해 통과시킨 것이다.

최고회의에서는 1961년 5월 19일에서 1963년 12월 16일(대통령 취임식 전날)까지 1008건의 법안을 통과시킨 것으로 돼 있다. 그런데 이 최고회의보다 불법성이 더 강한 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17일부터 그다음 해 3월 12일까지 불과 5개월 동안 270건의 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전두환 신군부의 입법회의에서는 189건의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한 자료에 나와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압도적 다수가 유신 헌법 지지? 그렇게 보기 어려운 이유


프레시안 :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한 유신 헌법은 1972년 11월 21일 국민 투표를 거쳐 확정된다. 그런데 이때 투표율과 찬성률이 모두 90퍼센트를 넘었다. 맥락을 생각하지 않고 숫자만 놓고 보면 압도적인 찬성이라고 할 수 있는 수치다. 독재 정권 시절 실시된 국민 투표에는 요식 행위 측면이 많았다고들 이야기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나 쏠린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투표 자체가 공정하게 이뤄졌다고 보기 어려움을 감안하더라도, 이런 결과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체육관 대통령'을 선출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경우 지지표를 찍을 사람들만 조직해 모아놨으니 99.9퍼센트 지지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게 이해가 되지만, 국민 투표에는 유신 쿠데타를 비판한 상당수 국민이 참여했을 텐데 반대표가 10퍼센트에도 못 미쳤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서중석 : 이 국민 투표에서 투표율은 91.9퍼센트였고 찬성이 91.5퍼센트, 반대가 7.6퍼센트로 압도적인 찬성률을 기록한 것으로 발표됐다. 이렇게 높으면 압도적 다수가 유신 쿠데타, 유신 헌법을 지지한 것 아니냐고 많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면이 참 많다.

우선 투표율 91.9퍼센트, 찬성률 91.5퍼센트라고 하면 반공 교육을 받은 사람은 북한이 생각나게 마련이다. 이거 북한하고 똑같은 것 아니냐,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투표율과 찬성률이 나온 것이다. 아울러 국민 투표는 대개 가부를 묻는 방식 아닌가. 서유럽을 제외하면 그러한 국민 투표에서 지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가, 상당히 높은 찬성률로 이기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나,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그런 것과 함께 이 국민 투표가 어떤 상태에서 치러졌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계엄을 선포한 10월 17일부터 국민 투표일이던 11월 21일까지 계엄하의 살벌한 분위기에서 모든 매체가 '유신만이 살길이다. 유신 아니면 우리나라는 이제 안 된다'고 역설했다. 신문이건 지상파건 그걸 계속 홍보하고 선전했다. 그게 아주 강렬하게, 한 달 넘게 계속됐다.

언론인 김해식이 쓴 글을 보면 개헌안이 공고된 10월 27일부터 국민 투표가 실시될 때까지 신문의 많은 지면, 방송의 많은 시간은 당국에서 배급한 새 헌법에 관한 해설 기사와 할당된 연사들의 출연으로 차 있었다고 돼 있다. 10월 27일부터 12월 말까지 모든 신문의 1면과 7면에는 "통일 위한 구국 영단 너도나도 지지하자", "새 시대에 새 헌법 새 역사를 창조하자", "뭉쳐서 헌정 유신 힘 모아 평화 통일" 등 문공부에서 정해준 표어가 날마다 6단 크기로 실렸다고 김해식은 썼다. 10월 17일부터 11월 21일까지 방송에서 유신 지지와 관련해 단독 해설이 218회나 나갔고 좌담이 398회, 유신과 관련된 비전 제시 특별 프로그램이 58회나 있었으며 유신을 내용으로 한 스폿 드라마(spot drama)가 1268회에 이르렀다는 자료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유신 헌법안 찬반 행위가 금지됐다. '국민 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져야 한다', '아니다. 반대표를 던져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못하게 돼 있었다. 다만 유신 헌법 내용에 대해 지도, 계몽만 할 수 있도록 돼 있었다. 그리고 중앙정보부가 '국민 투표 지지율 95퍼센트를 달성해야 한다'고 각 분실에 지시했고 '그건 무난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자기들끼리 한 것으로 어떤 자료에는 나와 있다. 어쨌건 일방적인 지지만 할 수 있게끔 규정 자체가 그렇게 돼 있었다. 이 국민 투표만이 아니라 나중에 유신 체제에서 실시되는 다른 국민 투표도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

투·개표를 지키는 참관인 문제도 있었다. 과거 선거에서는 이걸 정당 참관인이 했는데 이 국민 투표에서는 정당 참관인제를 폐지해버렸다. 사회 인사로 한다고 돼 있었는데 이게 어떤 사람들이었겠는가. 그러니 (사실상 권력 쪽에서) 어떤 식으로 투표를 진행해도 되는 것 아니었느냐, 이런 이야기다.

이런 일도 있었다. 국민 투표를 앞둔 11월 3일 새마을 사업 지원금 3686억 원을 확정했다. 11월 7일에는 박 대통령이 '1980년에 1인당 국민 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11월 16일에는 병역 기피자 1만7334명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유신 체제가 얼마나 좋은 체제가 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청사진으로 이런 것들을 제시한 것이다.

군대에서 이뤄진 투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대목이 있다. 국민 투표 3일 전인 11월 18일 국방부는 '군 부재자 투표 100퍼센트'라고 밝혔다. 여기는 100퍼센트였다. 도대체가 아파서 투표장에 못 갈 사람도 있었을 텐데, 100퍼센트로 돼 있었다.

당시 한 사병은 국민 투표 때 반대표를 찍으려고 했더니, 중대장이 붓두껍을 뺏어버리고는 "네가 아무리 반대표를 찍어도 사단에 가면 모두 찬성표로 바뀐다"고 하면서 자신이 그냥 표를 찍었다고 한다. 나도 그 당시 모 전방 사단에 있었는데, 투표하러 간 내게 그러더라. "자네도 이렇게 찍을 거지?" 그러고는 찬성표를 찍은 걸 내게 보여주더니만 바로 함에 집어넣어버리더라. 중대장에게 붓두껍을 빼앗겼다는 사병의 사례가 내 경우하고 비슷한 것이다. 그때 많이 생각난 게 있다.

대리 투표, 무더기 투표 고백한 어느 농촌 공화당원의 일기

ⓒ오월의봄
프레시안 : 어떤 것인가.

서중석 : 내가 군대에 있을 때 투표를 두 번 했다. 그중 하나가 1971년 4월 27일 대통령 선거였다. 박정희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격돌한 그 선거였는데 그때 육군 1군 사령관이 한신 대장이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장병들에게 영외로 나와서 투표하라고 했다. 한마디로 공정하게 투표할 수 있게 하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나는 심지어 '펀치볼'(punch bowl, 한국전쟁 때 격전지였던 강원도 양구 해안분지)에 있었는데도 몇 백 리 떨어진 원통까지 나가서 투표했다. 정말 공정하게 투표할 수 있었다. 세상에, 당시 군인들이 어떻게 그런 선거를 할 수 있었나 싶다. 그 시절 군인들이 한 투표 중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이게 유일할 것이다. 투표 결과는 말할 것도 없었다. 군인들의 다수가 젊은 사람들이니까 김대중 후보를 압도적으로 많이 찍었다. 내가 속했던 사단 말고 그 옆 사단에 있었던 사람 말을 들어봐도 거기도 말할 것도 없이 그랬다고 그런다. 이것 때문에 한신이 윗선에 아주 밉보였다.

한신 장군은 군에서는 전설적인 존재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사병 급식 같은 것을 떼먹지 못하도록 하면서 철저히 훈련하게 했다. 그러면서 장교들, 특히 장성들의 비리, 부패 같은 건 아주 엄격하게 다스렸다. 시쳇말로 그런 장군들의 '쪼인트 까는' 걸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그렇게 무서운 장군이었다. 그런데 정말 제대로 된 투표 한 번 하려고 했다가 이 양반이 참모총장이 못 됐다. 박정희하고 육사 2기 동기인데, 그때 영외에 나와서 투표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 아니겠느냐는 이야기가 들리더라. 합참의장으로 끝났고, 군복을 벗은 후에도 상동광산으로 대표되던 대한중석광업 사장 정도밖에 못 했다. 군에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는데 투표 한 번 제대로 하려고 하다가 그렇게 돼버린 것이다.

프레시안 : 군인들은 국민 전체를 놓고 보면 특수한 존재다. 다수의 일반 국민들은 이때 투표와 관련해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일반 국민들은 어떻게 투표했느냐. 나도 그게 참 궁금하다. 전두환 신군부 때 있었던 투표도 그와 마찬가지로 항상 궁금했던 사항이다.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해 한국인 측이 상당히 관계가 됐을 텐데도 자료가 남아 있는 걸 찾기 힘들듯이, 예컨대 1960년 3.15 부정 선거 같은 것도 신문에 난 것 정도를 빼놓고는 당사자가 고백한 게 참 적다. 1972년 국민 투표와 관련해서도 그런 자료가 아주 적은데, 다만 김영미 교수가 한 농촌 새마을 지도자의 일기를 공개한 게 있다.

이 사람은 공화당원이기도 했고 이장도 몇 년 하는, 그러니까 청장년 가운데에는 활동적이고 유력한 사람이었다. 유신 헌법에 대한 국민 투표가 실시된 11월 21일 이 사람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국민 투표일. 투표라야 하나 마나 결정적이다. 선거관리위원회 종사원급 참관인 모두 절대 지지자이다." 정당 참관인을 없앴다고 앞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나. "기권 없이 하라는 바람이(바람에)", 투표장에 다 나가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뜻이다. "한 사람이 몇 명식(명씩) 하는가 하면 무덕이(무더기) 누표가 있으며 반대가 있을 수 없다. 나 역시 찬표(贊票)를 했으나", 이 사람은 공화당원이었으니 찬성표를 던진 것 아니겠나. "공명 투표가 아닌 데서야 불쾌했다. (…) 나 역시 대곡부(경기도 평택 대곡마을) 기권자을(기권자를) 적당히 찬표을(찬표를) 하고", 이 사람도 다른 사람 표를 찬성으로 해서 찍어준 것이다.

대리 투표가 있었고 무더기 투표 비슷한 것도 있었다고 일기에 고백한 것이다. 이런 것들이 과연 이 사람이 살던 지역에서만 있었던 특수한 일이었을까? 전국적인 현상 아니었겠나. 정리하면 일방적인 선전, 홍보에 더해 정당 참관인제가 폐지된 상태에서 대리 투표 같은 것이 부지기수로 이뤄지는 등 투·개표도 엉망이었기 때문에 투표율도, 찬성도 아주 높게 나온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지지율 99.9퍼센트…북한 연상시키는 '통대'의 체육관 대통령 만들기

▲ 1972년 12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체육관 대통령' 취임식. ⓒ연합뉴스
프레시안 :
비상 계엄 선포(10월 17일), 비상국무회의에서 유신 헌법 의결(10월 27일), 국민 투표(11월 21일)를 거쳐 통일주체국민회의가 탄생한다. 체육관 대통령을 선출한 바로 그 기구다. 그러한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것이 국민을 대표한다고 볼 근거가 있긴 했나.

서중석 : 국민 투표에서 압도적인 찬성률을 기록했다고 발표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된다. '통대'라고 불린 이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무시무시한 기구였다. 유신 헌법에 따르면 '통대'는 주권적 수임 기구였다. 헌법에 그렇게 돼 있었다. 민주공화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어디에나 나와 있지 않나. 그런데 국민 대신 '통대'가 주권을 수임한 것이었다. 대통령을 '통대'에서 선출하니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휴교한 지 1개월여 만인 12월 1일 대학들이 개교를 했다. 그다음 날(12월 2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후보 등록이 마감됐다. 5876명이 입후보해 2.49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그런데 대의원으로 입후보할 때 중앙정보부의 통제를 받은 걸로 알려져 있다. 이 선거를 12월 15일에 했는데 그 이틀 전(12월 13일)에 비상 계엄을 해제하기는 했다. 15일 선거 결과 1630개 선거구에서 2359명이 당선됐다. 투표율은 70.4퍼센트로 국민 투표 때보다 20퍼센트포인트 넘게 낮았고 그전에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 투표율보다도 낮았다. 특히 서울의 경우 57.0퍼센트로 현저히 투표율이 낮았다. 77.6퍼센트를 기록한 경남과 76.6퍼센트였던 경북, 그리고 강원도, 제주도가 투표율이 높은 지역에 들어갔다.

대의원 후보로 나올 사람을 중앙정보부에서 이미 통제를 해놓은 상태에서 이뤄진 투표였는데도 투표율이 국민 투표 때보다 낮았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건 대의원 개개인에 대한 투표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리 투표라든가 투·개표 조작이 국민 투표 때보다는 상대적으로 어려웠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프레시안 : 그렇게 해서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박정희를 체육관 대통령으로 옹립한다. 그런데 이때 '통대'의 표결 결과는 정말 북한을 연상시킨다. 유신 헌법에 대한 국민 투표의 투표율(91.9퍼센트)과 찬성률(91.5퍼센트)은 저리 가라 할 수준이었다.

서중석 :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8일 후인 12월 23일, '통대'에서 대통령 선거를 했다. 2359명이나 되는 대의원이 전원 참석했다. 놀라운 일이다. 예컨대 국회에서 어떤 표결을 할 때 각 당 총무가 참석을 독려하더라도 대개 몇 십 명은 빠지기 마련 아닌가. 그런데 '통대'에선 2359명이 일사불란하게 다 참석했다. 이건 중앙정보부 내지 다른 기관이 얼마나 강력하게 이들을 통제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가 무효표 2표를 제외하고 지지 표가 2357표나 나왔다. 지지율이 99.9퍼센트였다. 반공 교육 시간에 배운 북한의 모습을 딱 떠오르게 하는 풍경 아닌가? 무효표는 뭔가를 잘못 써서 그렇게 된 것일 터이니 사실상 100퍼센트 찬성인 건데, 표가 이런 식으로 나온 것도 어딘가에서 다 독려했기 때문 아니겠나. 그럴 거면 뭐하려고 이런 식으로 '통대'를 뽑아 투표하게 한 건지 그것도 참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하여튼 그런 식으로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했다.

12월 27일 박정희가 대통령 취임식을 했다. 유신 대통령을 체육관 대통령이라고 하지 않나. 그건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도 뽑고 거기서 취임식도 했기 때문이다. 이날 취임식을 장충체육관에서 한 건 보안 때문이었다고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공개된 장소에서는 대통령 경호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본 모양이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건 특히 유신 체제에 와서 박정희가 자기 목숨을 그렇게 중시한 걸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유신 체제라는 건 박정희 한 사람의 체제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 아니겠나. 쿠데타 대비도 철저히 해서 서울 일대에 어떤 쿠데타 군대도 진입하지 못하도록 사전 조치를 취하기도 하지만, 대통령 취임식도 밀폐된 장소에서 한 건 그런 것과 관련 있다고 볼 수 있다.

장충체육관에서 12월 27일 취임식을 할 때 '통대' 요원하고 극히 제한된 인사만 초청했다고 한다. 장소 때문에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신 대통령으로서 국민들에게 과시하는 것이 제대로 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날 인상적인 일이 일어났다. 박정희가 취임 선서를 마치고 취임사를 낭독하는데, 단상 옆에 세워둔 큰 국기 게양대가 우지끈하면서 흔들흔들하더니만 탁 꺾이고 태극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사태가 났다고 한다. 박정희는 취임사를 낭독하다가 깜짝 놀라서 몸을 피했고 장내는 잠시 아수라장이 됐다고 그런다. 바람 한 점 없는 밀폐된 실내 체육관에서 취임식을 했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자기 책에 담은 이경재 기자가 옛날에 나한테도 그 점을 강조하고 그러던데, 유신 체제의 운명을 말해준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다.

프레시안 : 해방 후 최초로 체육관 대통령이 탄생한 후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된다. 1971년 총선에서 204석 중 89석을 차지하며 약진했던 신민당은 유신 쿠데타 후 치러진 이 선거 결과 의석수가 대폭 줄어든다. 박정희로선 눈엣가시이던 야당을 약체로 전락시키고 국회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 셈이다. 이런 상태로 이어진 이 총선 결과는 구체적으로 어떠했나.

서중석 : 12월 29일 비상국무회의에서 국회의원 선거법, 정당법 개정안을 의결하고 1973년 2월 27일 국회의원 선거를 했다. 지역구가 146석이었는데 딱 절반인 73석을 여당인 공화당이 차지했다. 이 선거는 한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을 2명 뽑는 방식으로 치러지지 않았나. 다시 말해 73개 전 지역구에서 공화당이 한 명씩 당선된 것이다. 나머지를 야당 쪽에서 나눠먹었는데 신민당 52석, 민주통일당 2석, 무소속 19석이었다.

권력 쪽에서 바라던 방식대로 된 것이었다. 여권은 전체 219석 중 146석을 확보했다. 지역구에서 당선된 공화당 의원 73명뿐만 아니라 대통령이 사실상 임명한 유신정우회 의원 73명도 있지 않았나. 이렇게 여당 쪽에서 3분의 2를 확고히 차지하고 나머지는 야당들이 나눠먹는 방식, 즉 그렇게 해서 야당을 분열시키는 방식으로 선거가 이뤄졌다. (이 선거에서 공화당은 38.7퍼센트, 신민당은 32.5퍼센트를 득표했다. 득표율 차이는 6.2퍼센트포인트였다. 그러나 여당 쪽과 신민당의 의석은 각각 146석과 52석으로 아주 큰 차이가 났다. 투표 결과와 의석수 사이의 이 엄청난 괴리는 유신 체제의 기괴함을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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