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 사학 비리 키우는 든든한 숙주"

[상지대 민주화 일기 ⑩] 김문기와 교육부의 합작품

2010년 사분위 정상화를 전후한 시점부터 지난 5년간 교육부가 보여준 태도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쫓겨난 비리 재단을 옹호하면서 구재단의 복귀를 조장하고 구재단의 횡포를 방치하면서 상지대를 파국으로 몰아간 교육부의 처사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일련의 상황은 상지대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젊은 사업가 김문기가 상지대 임시이사로 파견되어 상지대를 무상으로 인수한 후 온갖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던 시절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역사가 20년 만에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1. 김문기의 상지대 인수는 교육부의 작품이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첫 만남이 악연이 되었다. 상지대의 전신은 원주대이고 법인은 청암학원인데 원주대에 임시이사를 파견하고, 김문기를 임시이사로 추천하고, 임시이사회의 이사장으로 만들고, 김문기가 청암학원을 인수하도록 계획하고 추진한 것은 문교부였으며, 문교부 장관은 김문기 평생의 멘토였던 민관식이었다. 당시 강원도의 두 사립 대학이었던 원주대와 관동대 중에서 김문기는 고향에 가까운 관동대 인수를 희망했지만 관동대가 명지학원으로 운영권이 넘어가자 원주대 인수를 추진했고 민관식 장관의 지시를 받아 김수근 강원교육감이 적극 지원했다. 상지대는 이렇게 김문기 수중으로 넘어갔다.

2. 1970~1980년대 내내 교육부는 김문기의 보호막이었다

김문기는 개교 직후 강의 과목이 없다는 이유로 교수 5명을 해임하고, 다음 해에는 전체 교수 13명 중 9명을 재임용 탈락시켰다. 당시 상지학원은 갓 설립된 상지대, 원주실업전문학교, 신입생 모집이 중지된 원주대 등 세 개의 대학을 운영하면서 등록금은 두 배로 올린 반면 교육 환경은 말할 수 없이 열악해서 학생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지역 유지들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1980년 이후에는 전조영 교수를 사상범으로 몰아 해직시키고, 전문대 교수 3명을 납치 감금하여 파면하고, 학생 150명을 간첩으로 몬 상지대 용공조작 사건이 발생하고, 거의 매년 입시 부정이 자행되었지만 교육부는 모르는 척했다. 교육부가 김문기의 사학 비리를 은폐하고 비리를 키우는 든든한 숙주 노릇을 한 것이다.

▲ 김문기 씨. ⓒ상지대학교비상대책위원회

3. 교육부는 김문기의 설립자 불법 변경을 용인했다

1981년 김문기는 정관 변경 과정에서 원홍묵으로 되어 있는 설립자를 김문기 본인으로 불법 변경했다. 사학에서 설립자는 변경 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문기는 불법으로 설립자를 본인으로 변경했고 교육부는 모르는 척 눈감아주었다. 1999년에 이 불법의 전모가 드러나 김문기가 교육부를 기망하는 방식으로 설립자를 변경한 것으로 정리되었지만 설립자가 변경 불가능한 조항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기망이 아니라 교육부와의 공모 혹은 교육부의 묵인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이다. 당시는 군사 독재 시절이었고 교육부가 민관식 라인으로 포진해 있는 데다가 대학정책실장을 지낸 모영기 등 김문기를 비호하는 세력들이 교육부 안에 포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런 정도의 공모나 묵인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4. 김문기가 구속된 상황에서도 교육부는 봐주기 감사에 그쳤다

1993년 3월 31일 문민 정부 사정 개혁으로 김문기가 구속되었다. 교육부는 검찰이 김문기를 구속하기 위해 대검 중수부가 예고없이 상지대를 방문한 3월 27일 상지대에 대한 실태 조사를 시작했다. 이날은 토요일이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실태 조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교육부가 급하게 움직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4월 1일까지 6일간, 실제로는 사나흘 간의 짧은 겉핥기 실태 조사를 한 후에 김문기가 구속 수감된 후인 6월 4일에 이사 해임 조치를 내렸다. 이어 6월 12일에는 실태 조사 결과 처분서를 발송했다. 교육부가 이사들을 해임하고 처분을 요구한 내용을 보면 당시 언론에서 보도하고 검찰에서 조사한 부정 입학, 공금 횡령, 회계 부정, 용공 조작, 인사 비리 등 온갖 사학 비리 혐의는 대부분 누락되었다. 교육부는 겨우 이사회 운영상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사후적으로 김문기와 그 하수인들을 해임하는 선에서 그쳤다. 교육부는 뒷북을 친 것도 아니고 뒷북치는 흉내만 낸 것이다.

5. 1993년 임시이사 파견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었다

교육부는 김문기 구재단 이사들을 해임하고 임시이사를 파견했다. 김상준 전 교육부 차관이 이사장이 되었고 고화영 원주시의회 의장, 원제윤 원주시 번영회장, 서효원 원주시 교육장, 김대호 원주전문대학장, 장윤 대성학원 이사장, 김영중 강원도 교육청 관리국장 등이 임시이사에 포함되었다. 이들 중 다수는 김문기를 지지하는 인사였으며 감옥에서 출소한 후 김문기는 자신이 임시이사 선임에 개입했다고 실토했다. 임시이사도 김문기 편이었다. 정권 출범 초기에 김영삼 대통령의 사정 개혁 의지가 서슬 퍼렇게 작동하는 상황이라 교육부는 어쩔 수 없이 흉내는 냈지만 뒤로는 여전히 김문기 숙주 노릇을 한 것이다. 이 불완전한 가짜 임시이사 체제는 임시이사들이 김찬국 총장을 부당하게 해임하는 사태가 발생한 이후에야 자신의 본색을 드러냈고 결국 모두 해임되고 새로운 임시이사들로 재편되었다.

6. 김영삼 정부의 청와대, 김문기 복귀를 추진

김영삼 정부의 임기는 1993년 3월부터 1998년 2월까지였다. 임기 첫해인 1993년에 사정 개혁 과정에서 김문기를 구속하여 상지대에서 축출한 문민 정부는 임기 마지막 해인 1997년에 김문기를 상지대에 복귀시키기로 했다. 청와대에서는 김문기 복귀로 결정을 내리고 교육부에 지시했다. 이 결정 과정에 청와대와 교육부 관료들이 개입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교육부 장관은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출신의 안병영 장관이었고 장관의 거부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 숨겨진 사건은 문민 정부 사정개혁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 한계는 문민 정부의 경제수석을 역임했던 한이헌이 그 후 구성원의 추천으로 정상화 과정에서 상지대 정이사가 되었음에도 구성원을 배신하고 김문기를 지지한 사건을 통해서 재차 입증되었다.

7. 김대중 정부의 교육부 장관이 직접 김문기 복귀를 추진

김영삼 정부에 이어 김대중 정부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김대중 정부 두 번째 교육부 장관으로 김덕중 아주대 총장이 임명된 것은 1999년 5월이었다. 김 장관은 장관 취임 두 달 만에 장관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대형 사고를 쳤다. 그해 7월 29일 김장관은 상지대 이상희 이사장과 김찬국 총장을 교육부로 불렀다. 영문도 모르고 참석한 자리에 김문기도 와 있었다. 이 자리에서 김장관은 "사립대학에는 주인이 있어야 발전할 수 있고, 그 주인은 설립자이다. 상지대도 설립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며 예의 유명한 '사립대 주인론'을 거론했다. 김 장관은 이 발언이 빌미가 되어 결국 취임 7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났지만 민주주의와 개혁을 강조한 김대중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이 앞장서서 김문기 복귀를 주장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8. 노무현 정부, 사학분쟁조정위원회 설립 추진

노무현 정부 중반인 2005년에 사립학교법이 전향적으로 개정되어 사학 재단에 대한 공적 통제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2007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황우여 교육위원장이 중심이 되어 사립학교법을 후퇴시키는 재개정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사학분쟁조정위원회 신설 조항이 포함되었는데 한나라당의 요구를 참여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수용한 결과였다. 당시 열린우리당 김진표 정책위 의장이 주도한 사립학교법 재개정은 열린우리당 내부 논의나 국회 교육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 절차를 생략하고 국회의장 직권상정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이것은 열린우리당이 참여 정부가 추진하던 로스쿨 도입을 위해 한나라당이 요구하는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수용하는 정치적 거래 방식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열린우리당 교육위원들은 법개정 조항도 확인하지 못한 채 법안을 통과시켰다.

마지막 세 사례는 권력의 논리가 교육을 망칠 수 있다는 사례이다. 김문기를 구속한 김영삼 정부는 구속 영장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김문기 복귀를 추진했고, 김대중 정부에서는 교육부 장관이 앞장서서 김문기 복귀를 주장했으며, 노무현 정부에서는 청와대와 여당이 함께 사학분쟁조정위원회 설립을 추진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민주주의와 개혁을 표방하는 권력이 교육 문제에 취약하다는 증거인 동시에 권력에 대한 사학 재단의 로비가 매우 막강하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김문기 등장 이후 상지대 40년사는 사학 비리와의 투쟁사이고 김문기와의 투쟁사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상지대는 대학을 밥벌이로 간주한 김문기의 무한 욕심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교육부가 있었다. 상지대는 김문기의 무절제한 욕심과 교육부의 잘못된 정책판단과 무능함으로 인해 파국적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그 피해는 오로지 교수와 학생 등 구성원들에게 전가되었다. 김문기와 교육부는 과거는 물론 지금까지도 상지대 사태를 야기한 공동정범이며 교육부는 비리주범 김문기의 충실한 숙주로 존재하고 있다.

교육부에는 교육이 없고 철학이 없고 정책이 없다. 그러므로 교육부는 맹탕이다. 교육부는 국민과 교육을 위해 존재하는 정부부처가 아니라 권력에 기대어 재단에 기생하는 숙주에 불과하다. 세상에 둘도 없는 역사 국정교과서를 강행하고 합법적으로 선출된 국립대 총장 후보의 임명 제청을 거부하는 교육부에 사학 비리 척결을 요구하는 것이 언필칭 가당키나 한 일인가? 우리는 상지대 역사에서 교육부가 더 이상 존속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발견한다. 교육부 자체가 문제의 화근이기 때문이다. 교육부 폐지를 위한 국민적 토론이 다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