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합의문에 이런 행간이?

[시사통] 이슈독털 8월 25일

남북 고위당국자 접촉에서 합의가 도출됐습니다. 오늘 새벽에 전해진 낭보인데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철야 마라톤 접촉이 이어져 난항을 겪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지만 오히려 예상을 뛰어넘는 큰 틀의 합의가 도출됐습니다.

물론 합의문 문구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2% 부족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북측은 '지뢰 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했지만, 지뢰 폭발이 누구 소행인지는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남측은 확성기 방송을 오늘 12시부터 중단하기로 하면서도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이라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점을 키워 합의를 폄하할 이유는 없습니다. 남북 관계의 경험칙을 환기하면 부족한 2%를 채우는 건 해석도 분석도 아닌 의지니까요. 부족한 2%를 역주행의 빌미로 삼기보다는 진전의 발판으로 삼아야겠죠.

그런 점에서 더욱 눈길을 줘야 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총 6항의 합의문 가운데 1항과 6항에 담긴 문구인데요. 1항은 '당국회담을 서울 또는 평양에서 빠른 시일 내에 개최하며 앞으로 여러 분야의 대화와 협상을 진행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내용이고, 6항은 '다양한 분야에서 민간 교류를 활성화하기로 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종합하자면 남과 북이 여러 분야의 대화 채널을 가동해 다양한 분야의 민간교류를 활성화하겠다는 합의입니다.

하지만 불가능합니다. 5.24조치가 유지되는 한 '다양한 분야의 민간교류'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5.24조치는 북한 선박의 남측 해역 운항, 남북 교역, 대북 신규 투자 등을 전면 금지하고 있습니다. 대북 지원사업도 원칙적으로 보류돼 있고, 인도적인 지원사업도 정부와의 사전협의 없이는 할 수 없도록 돼 있습니다. 그런데도 남측은 북측과 '다양한 분야에서 민간 교류를 활성화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또 이를 위해 '당국회담을 서울 또는 평양에서 빠른 시일 내에 개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럼 이런 합의가 뭘 뜻하겠습니까? 5.24조치 해제 외에 다른 뜻으로 읽을 여지가 있을까요?

이런 분석은 다른 대목에서도 방증됩니다. 남과 북은 '올해 추석을 계기로 이산가족 상봉을 진행'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헌데 이에 상응하는 다른 합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통례로 보면 이산가족 상봉은 북측의 '주는 카드'였습니다. 그래서 그에 상응하는 '얻는 카드'를 챙겨왔죠. 헌데 이번 합의에선 '얻는 카드'가 없습니다. 유감 표명과 확성기 방송 중단처럼 짝을 이루는 카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습니다. 굳이 찾자면 6항의 '민간교류 활성화' 외에는 없습니다. 5.24조치 해제가 선행돼야만 하는 그 '민간교류 활성화'입니다.

그럼 왜 남과 북은 이산가족 상봉과 5.24조치 해제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카드로 명시하지 않고 반쯤은 숨은 그림으로 처리했을까요? 그것이 실제로는 '거래용 카드'이지만 표면적으로는 '인도주의 사업'으로 치장해야 하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런 점도 있겠지만 다른 사정도 있을 겁니다.

5.24조치를 해제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을 풀어야 합니다. 이른바 '천안함 폭침'에 대한 북측의 인정과 사과입니다. 하지만 요원합니다. 지금까지의 북측 태도로 봐서 순순히 고개 끄덕이고 숙일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방법이 따로 없습니다. 벽이 두터우면 뚫는 게 아니라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가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여건이 성숙돼야 합니다.

이산가족 상봉은 시간을 갖고 여건을 성숙시킬 매개일 겁니다. 이 행사를 통해 남북 사이에 훈풍을 불어넣으면 5.24조치 해제에 대한 남측 내 보수세력의 반감을 어느 정도 희석시킬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전부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반감이 있을 겁니다. 이건 박근혜 대통령의 위세로 희석시킬 수 있을 겁니다.

합의문 발표와 동시에 청와대가 자화자찬에 나서지 않았습니까? 김관진 안보실장이 제 입으로 지뢰 폭발에 대한 북측의 유감 표명은 "정부가 (…) 일관된 원칙을 가지고 협상한 것에 대한 결과"라고 평하지 않았습니까? 보수세력 내에서 이런 자평에 대한 공감도가 커지면 박 대통령의 행동반경은 넓어집니다. 설령 5.24조치를 해제하더라도 북측에 끌려다닌다는 인식이 퍼지는 걸 제어할 수 있습니다. 금상첨화로 이산가족 상봉이나 '여러 분야의 대화와 협상'이 원만하게 진행된다면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주도하는 모습을 부각시킬 수 있고, 이렇게 끌어올린 위상으로 통 큰 결정을 주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최악의 경우도 상정할 수 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이 무산되는 경우입니다. 그래도 타격은 별로 없습니다. 이산가족 상봉 무산에 상응해 '민간교류 활성화'를 위한 대화와 협상을 중단시킨 후 또 다시 박근혜 대통령의 '일관된 원칙'을 부각하면 되니까요.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남북 고위급접촉 합의문구에는 의미심장한 행간이 깔려 있는 듯한데요. 이런 행간에 굳이 정치적 색칠을 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다른 문제는 몰라도 이 문제에 관한 한 박 대통령에 대한 호오나 정파의 유불리가 잣대가 돼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잣대는 오직 하나, 항구적 평화에 도움이 되느냐 여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부족한 2%를 채우는 건 의지라는 얘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의지를 구성하는 핵심 내용은 항구적 평화입니다.

(이 기사는 <시사통> '이슈독털'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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