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6.15를 살려내야 하는 이유

[한반도 브리핑] 남북, 15년 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6.15 남북공동선언 15주년이 허망하게 지났다. 기대를 모았던 남북공동행사도 무산됐다. 물론 정부 차원의 기념행사는 애초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2000년 당시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6.15 공동선언이 합의될 때만 해도 15년 뒤라면 한반도는 평화와 통일의 큰 문턱을 지나고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막상 15주년을 맞는 지금 6.15는 실종됐고 한반도는 대결과 갈등으로 치닫고 있다. 북은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 실험에 나서고 남은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에 열을 올린다. 대화 제의는 오가지만 상대방에 대해 "진정성이 없다"며 불신하고 거부한다. 냉전 시대의 적대를 뒤로 하고 화해와 협력의 남북관계를 열었던 6.15 공동선언이 15년 만에 사실상 사라진 것이다.

6.15를 복구하고 재가동하기 위해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2000년 당시 6.15가 가능했던 조건과 상황을 살펴보고 지금 국면은 왜 불가능한지를 비교하면서 이제라도 6.15를 되살리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꼼꼼히 살펴보겠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찾은 김대중(오른쪽) 대통령을 영접하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연합뉴스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이 가능했던 요인에는 당시 북한, 미국 그리고 한국 요인이 상호 선순환적으로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이 유훈통치를 마치고 권력승계를 마무리하면서 식량난으로 어려웠던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수습하는 상황이었다. 사상 최대의 정치·경제적 위기를 모면한 상황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남북관계를 통해 체제 안정을 꾀하고 동시에 남측으로부터 경제적 지원과 협력을 얻으려는 의도가 강했다. 장차로는 남북관계 개선을 넘어 북·미 관계 개선도 기대할 만했다.

당시 북한은 남북관계를 긴장상태에 두는 것보다 원만한 관계로 푸는 것이 훨씬 유용했다. 이를 감안해보면 지금 김정은 체제는 굳이 남북관계를 풀어야 할 절박함이 그리 많지 않다. 이명박 정부를 지나면서 이미 북은 남북관계 없이도 경제적 지원과 협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됐고 사실상의 핵보유와 핵·경제 병진 노선에 따라 북·미 협상에도 과거처럼 목매달고 구걸할 필요가 없어졌다. 박근혜 정부의 드레스덴 선언과 대화 제의에 북이 시큰둥하는 이유다.

미국 요인 역시 당시와 지금은 확연히 다르다. 클런턴 정부는 1998년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와의 조율을 통해 대북 포용(engagement)을 정책 기조로 정했다. 금창리 의혹도 북·미 협상에 의해 해소했고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은 직접 방북해서 북한과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물론 2차 북핵 위기 이전이고 제네바 합의가 가동 중인 상황이기도 했지만 당시 클린턴 정부는 북핵 문제와 북한 문제를 적극적 관여전략으로 해결하려는 입장인 것은 분명했고 여기에는 김대중 정부의 대미 설득이 핵심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지금 오바마 정부는 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협상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에 회의감이 지배적이고 북한 문제 역시 미국 대외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다. 미국 대통령에게 북한 문제는 정치적 무덤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른바 '전략적 인내'라는 이름으로 북핵 문제는 오히려 중국에 '아웃소싱'하는 분위기다. 6.15가 가능했던 당시 클린턴 정부의 대북 관여전략과 비교하면 지금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는 당연히 한반도에 6.15 정신이 실종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기도 하다.

더욱이 박근혜 정부는 오바마 정부의 소극적 대북정책을 수정하도록 설득하거나 요구하기보다 오히려 한미동맹의 명분 아래 대북 압박과 군사적 억지력 확보에 열을 올리는 형국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페리 조정관과 클린턴 대통령에게 대북 포용정책이 불가피함을 설득하는 모습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사실 6.15가 가능했던 데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라는 한국 요인이 가장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오랫동안 평화공존과 햇볕정책을 준비해온 김대중 대통령은 정부 출범 이후 대북포용정책을 기조로 무력도발 불용, 흡수통일 배제, 화해협력 추진을 강조하면서 남북관계 개선과 신뢰형성에 공을 들였다.

탈냉전과 북한체제의 위기라는 대외환경은 김대중 정부로 하여금 자신감있게 화해협력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교류와 접촉, 화해와 협력이 장기적으로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끌고 상호 인정과 공존이 한반도를 평화통일로 이끌 수 있음을 믿었다. 취임하자마자 대북 비료지원을 위한 차관급 회담을 인내심을 갖고 개최했다. 비료지원과 이산가족 상봉을 연계하면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대북 지원의 진정성을 북에게 확인해줄 수 있는 계기였다.

또한 김영삼 정부가 북·미 협상과 북·미 관계 개선을 반대했던 것과 달리 김대중 정부는 북한과 미국의 직접협상과 관계개선을 적극 지원하고 지지했다. 가장 결정적으로는 현대아산의 금강산 관광 프로젝트를 직간접으로 지원하면서 민간차원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당국 간 신뢰를 형성했다. 정부 출범 2년 동안 대북 신뢰를 쌓아가고 정주영 회장의 소 떼 방북과 금강산 관광 개시라는 민간차원의 획기적 협력을 토대로 김대중 정부는 남북관계 개선의 가능성을 높여갔던 것이다. 2000년 역사적인 정상회담 성사와 6.15 공동선언이 도출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김대중 정부의 일관된 포용정책과 화해협력의 추진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비교해본다면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여전히 대북포용의 일관성보다는 북한의 선(先)신뢰 조치를 요구하는 측면이 강하다. 북이 주장하는 정치군사회담에는 손사래를 치고 거부하면서 우리가 제안한 드레스덴 선언에 북이 나서라고 요구한다. 상호 비방·중상을 합의해놓고도 대북 전단 중단에는 소극적이다. 흡수통일 반대를 공식화하라고 해도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가 북핵 상황을 악화시키고 한반도에 출구 없는 군비경쟁을 촉발시킴에도 불구하고 한미정상회담에서 미국을 대북포용 기조로 돌아서게끔 설득하려는 노력은 시작도 못 하고 있다. 지금 15주년을 맞는 6.15가 한반도에서 사라지고 있는 이유도 그것이다.

다시금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화해와 협력의 남북관계, 인정과 공존의 남북관계, 평화의 한반도를 위해 우리는 6.15 공동선언의 정신을 다시 복원해내야 한다. 6.25의 뼈아픈 동족상잔을 6.15의 극적인 화해협력으로 바꾸는데 자그마치 반세기가 걸렸다. 6.15의 정신이 적대와 대결의 남북관계로, 긴장과 전쟁의 한반도로 역행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어렵고 힘들지만 다시 6.15를 살려내야 한다. 결국 그 길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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