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와 '위선자 맨하트'

[기자의 눈]'국기 모독은 종북'이라는 논리가 '국격 훼손'

여권의 차기 대권 선두주자로 꼽히는 김문수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장은 늘 '총리 후보'로 거론된다. 박근혜 정부 들어 불과 3년만에 여섯번째 총리를 뽑아야 하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지난 22일 지역 중견언론인 모임인 '세종포럼' 초청강연에 김 위원장이 참석하자 다양한 질문이 쏟아진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민감한 질문들을 유연하게 빗겨나가는 솜씨를 보였던 그가 보수 진영에 확실한 어필을 하려는 듯 한 가지 질문에 대해서는 확신범 수준의 답변을 했다고 한다.

바로 '북한인권법'에 대한 것이었는데, "북한인권법 통과를 반대하는 사람은 종북이다"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답변 과정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종북'이라는 단어를 쓰면 '수구꼴통'이라고 하는데 종북이야말로 수구꼴통"이라면서 "(얼마전 세월호 추모집회 때) 태극기를 태우는 사진 봤나?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반정부 종북세력이 그만큼 많고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고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18일 세월호 1주기 추모 집회에서 한 남성이 태극기를 불태웠고 몇몇 언론이 이를 보도하면서 논란이 커졌고 "경찰은 '국기모독죄'를 적용해 빨리 이 자를 잡으라"는 보수 진영의 여론이 들끓고 있는 중이다.

국격을 훼손하는 죄는 누가 묻나?


김문수 위원장이 "태극기를 불태운 자는 종북"이라고 단언했다고 하니, 바로 며칠 전 미국에서 화제가 된 '성조기 모욕 사건'이 겹쳐 떠올랐다.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던 흑인 학생들이 성조기를 밟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여자가 성조기를 수호해야 한다면서 빼앗아 간 사건이다. 흥미로운 것은 경찰이 출동해 흑인 학생들을 잡아간 게 아니라 '절도죄'로 이 여자를 체포했다는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미국은 미국 법이 있고, 한국은 한국의 법이 있다"면서 대한민국은 일제에 짓밟혔던 치욕의 역사와 '북한 괴뢰 집단'이 호시탐탐 노리는 분단국가에서 다 필요하니까 '국기 모독죄'가 엄연하게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기 모독죄'를 규정한 대한민국의 형법을 떠나서, 국기를 모욕하고 훼손하는 것을 통쾌하게 보는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법대로 처벌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주한미국대사를 공격하면 '종북'이고, 태극기를 모욕하면 '종북'이라는 논리를 대한민국의 현 대통령과 차기 유력 대권주자가 공개적으로 단언하는 것은 일종의 '현상'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형법 105조의 '국기.국장 모독죄'는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으로 국기 또는 국장을 손상, 제거 또는 오욕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7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되어있다.

사법당국이 이 법이 애매모호해서 태극기를 불태운 자의 '목적'을 입증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보수진영에서는 태극기를 불태운 것 자체가 '대한민국 모욕'의 목적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뭐냐고 주장한다. 이 논리에 서 있으면 그 연장선으로 "국기 모독은 종북"이 성립되는 것이리라.

이들에게는 민주화 운동으로 삭제된 '국가모독죄'가 아쉬울 뿐일 것이다. 그런데 이 조항은 1975년 신설될 때부터 야당 탄압을 목적으로 했기에 폐지가 된 것이었다.

법이 형평성 있게 적용되는 사회라는 믿음이 있다면, '국가모독죄'이건 '국기모독죄'이건 법의 취지를 살려 적용을 잘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세월호 1주기 집회에 등장한 '차벽 봉쇄'는 헌법재판소가 일찌감치 내린 위헌 결정을 무시한 행위다. 같은 장소에서 태극기 불태운 자는 반드시 잡아서 처벌해야 하고, 아예 위헌 행위를 한 경찰은 처벌하지 않는 사회라면 '국기모독죄'라는 것은 살아있는 권력이 '종북 몰이'에 악용하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미셸 맨하트ⓒ플레이보이
"성조기가 상징하는 미국 헌법이 허용"


미국 연방대법원이 1989년 '1984년 성조기 소각 사건'에 대해 '정치적 의사 표현'이라며 무죄 판결을 내린 취지는 '분단국가 한국'에서 최소한 '국기 모독은 종북'이라는 논리만큼은 자제하는데 참고가 될 듯하다.

당시 윌리엄 브레넌 대법관은 "언론 자유의 참된 기능은 청중들로부터 불안과 불만을 야기하는 표현, 청중들을 자극하는 표현을 과감히 허용하는 것"이라면서 "미국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성조기에 대한 모욕적인 표현조차도 허용돼야 한다. 성조기의 신성함을 지키고자 정치적 의사의 표현으로서 성조기를 소각하는 행위를 형사처벌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나아가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 역할도 겸하는 연방대법원은 의회가 이 사건에 대비해 급조한 '성조기 보호법'도 위헌 결정을 내렸다. 성조기가 상징하는 미국의 헌법 자체가 국가의 상징조차 의사표현의 도구로 쓸 자유를 보장한다는 이유다. 이게 바로 '국격'이 아닐까?

연방대법원이 이렇게 확고하게 정립한 판례를 알고나면, 왜 성조기가 훼손돼서는 안된다며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로부터 성조기를 빼앗은 전직 여군이 오히려 체포됐는지 이해가 된다.


사건 장소였던 조지아 주 발도스타 주립대의 총장도 점잖게 한마디 했다. 윌리엄 맥키니 총장은 "시위대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지만 시위할 권리도 보호돼야 한다"면서 "자유롭게 말할 권리에는 국가의 상징을 존중하지 않을 권리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사족을 붙이자면, 체포된 이 여자는 미셸 맨하트(39)로, 군 복무 중이었던 지난 2007년 성인잡지 <플레이보이>에 성조기로 하반신을 가린 포즈로 누드모델로 나섰다가 물의를 일으켜 이듬해 전역한 전력의 소유자다.

맨하트의 '성조기 탈취'에 환호하던 미국의 보수 진영은 맨하트 자신이 표현의 자유로 성조기를 '아랫도리 가림막'으로 썼던 바로 그 여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고개를 떨궜다는 후문이다. 맨하트의 '성조기 탈취'는 '관심종자' 같은 위선적 행위라는 비판에 보수진영에서도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국기모독은 종북'이라는 논리를 펴는 살아있는 권력들이 '위선자 맨하트'와 동급으로 취급될까봐 우려된다. 이참에 '국격 훼손죄'를 신설해야 하지 않을까? '국기모독죄'처럼 '목적'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유난히 이 죄의 혐의를 받을 지도자들이 많은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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