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폭력·IMF…그러나 그녀들은 무릎 꿇지 않았다

[프레시안 books] 최현숙 <막다른 골목이다 싶으면 다시 가느다란 길이 나왔어>

여성 구술 생애사에 대한 기획으로 출판된 책은 여전히 드물다. 그래서 이 책 <막다른 골목이다 싶으면 다시 가느다란 길이 나왔어>(이매진, 2014년 12월 펴냄)는 무조건 반갑다.

보통은, 책으로 나왔다고 해서 모든 얘기를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인터뷰는 역사적 사건이나 공식적인 노동 담론 등 어떤 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게 마련이다. 여성에게 성, 가족, 욕망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금기시되고 있다. 어떤 이야기는 가치 있고 어떤 이야기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라는 편견 때문에 표현되지 않은 이야기가 여전히 많다. '가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는 사적인 것이므로 공적인 노동 이야기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다', '정상 가족이 아닌 가족 형태에 대해서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 소소한 일상사는 큰 의미가 없다' 같은 편견이 건재하다.

저자인 최현숙 씨는 '15소녀 표류기' 시리즈 1, 2권을 내면서 그러한 편견들을 보기 좋게 뛰어넘었다. 사회 속에서 억압당하고 스스로 생존해낸 여성들의 목소리를 복원했다. 그녀의 책에 등장한 이들은 다른 책에서는 만나기 힘든 이들일 것이다.

나는 이전에 '15소녀 표류기'의 첫 책인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를 인상 깊게 읽었다. (프레시안 북스 해당 서평 바로 가기)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쟁의 세월 속에서 소리 없이 살아낸 여성들이 있다. 기지촌에서 미군과 살림을 차리며 생존한 여성, 부당하게 매독에 걸려 삶을 혼자 꾸릴 수밖에 없었던 여성, 심지어 저자의 어머니까지 등장해 가정 폭력에 대해 진솔하게 토로하는 모습이 다른 책에서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그녀들은 오롯이 자신의 노동과 노력으로 끈질기게, 용기 있게 살아남았다. 저자는 인터뷰 중간에 서슴없이 끼어들어 인터뷰이를 격려하고 긍정해주며 자신의 아픈 과거까지 드러내면서 서로 성장하기 위해 애쓰는 진솔함을 보였다. 노동을 겁내지 않는 사람들, 이 세상의 어떤 울타리도 없이 기어이 생존해낸 여성들, 삶을 책임지고 떠맡겨진 것들을 감내해온 여성들의 목소리가 그 속에 있었다.

요양 보호사이며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도 한 최현숙 씨는 일회적인 인터뷰가 아니라 시간을 통해 쌓인 친밀함 속에 철저히 인터뷰이의 편이 되었다. 노동의 가치, 여성을 임파워먼트(empowerment) 하는 것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며 속 깊은 인터뷰를 풀어갔다. 그래서 이 인터뷰 책에는 저자의 인생 또한 오롯이 녹아 있다. 사람을 보는 관점, 그리고 날것의 희망까지 속속들이 배어 있다. 섹슈얼리티와 노동, 가족, 역사를 아울러 여성 삶의 진실에 육박해 들어가려는 저자의 노력은 독보적인 것이라 해도 좋겠다.

폭력과 학대에도 굴하지 않은 여성들의 생생한 목소리

ⓒ이매진
'15소녀 표류기' 첫 번째 책이 70∼80세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면 이번에 나온 두 번째 책 <막다른 골목이다 싶으면 다시 가느다란 길이 나왔어>의 주인공은 50∼60대의 여성들이다. 이 세대는 베이비부머에 속한 이들로서 사회가 이전보다 부유해지고 있다고는 하나 이들은 여전히 만연한 여성에 대한 봉건적 차별, 불평등한 가족 관계 속에서 고통을 받았다. 또한 결혼한 후 아이를 기르면서, 그 후에는 최저임금을 받는 서비스직 여성으로서 버텨내야 했다. 책은 그녀들이 삶에서 중요하게 여긴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그 시간을 버티어내었는지 묻는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이른바 역사적 사건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여성에 대한 억압과 잘못된 결혼, 가정 폭력과 학대였다.

강간을 당하고 그 상대와 결혼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풍토나 사생아를 낳았다고 말할 수 없는 억압적 분위기가 토로된다. 학대를 견딜 수 없어 뛰쳐나가 신 내림을 받았다거나, 죽으려고 한강 다리에 서 있다가 구해준 남자와 같이 살게 되었다거나, 시댁을 위해 일평생 며느리로서 착취당한 삶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그녀들은 솔직하게 말한다. 평생 노동한 인간으로서, 요양 보호사로서 자기 삶을 꾸리고 남들을 보살피고 협력하기까지 자신이 어떤 모멸과 고통을 온몸으로 거쳐서 생존자로 남았는가에 대한 고백이다.

이 책에서 구술한 장기태(1941년생)는 경기도에서 유복하게 자라났고 일본 연수까지 다녀와 전문직 여성으로 살 수 있었지만 유부남의 강간으로 인해 고통스런 시간을 겪게 된다. 무자격 약사, 뜨개질, 행상, 간호보조원, 하수도 토관 일, 신문 배달, 다방, 구멍가게, 간병을 거쳐 요양 보호사로 일하게 된다. 이기순(1946년생)은 살림 밑천 맏딸로 억척스레 노동하며 살다가 결혼하고, 남편과 시어머니의 지독한 가정 폭력 속에서 고통을 당하다 신 내림을 받고 남들을 구하는 무속인이 된다. 과일 행상, 시장 좌판, 포장마차 일을 했고 친정어머니와 같은 무속인이 된 후 작두를 탔으며 지금은 요양 보호사 일을 한다. 이윤숙(1959년생)은 풍요로운 청년 시절을 보냈지만 결혼 후 경력 단절이 됐다가 남편이 IMF 위기 이후 일할 수 없는 상황을 맞아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며 노동한다. 월마트, 홈에버, 세이브존, 이마트, 킴스클럽, 롯데마트, 롯데슈퍼에서 그녀는 식료품을 팔았다. 시급 5210원을 받으며 유통, 청소, 식당, 사회 서비스, 돌봄 같은 '아줌마 노동'을 하고 있다. 그녀는 우울하지만 그것을 감내하면서 온몸으로 노동하며 생존해간다.

이들은 일상적인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는 여성들이다. 한국 사회의 발전이라는 것이 그녀들의 희생을 도외시하고 그 위에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낙태 생각은 안 해봤어. 낙태를 해보지도 않았고. '낙태는 죄'다, 이런 거는 아니야. 다만 그 시절 내 생각에 처녀성을 잃은 게 너무 중요했던 거지. 그러니까 남들 보기에는 영 아닌 그 김 씨를 그저 좋게만 생각하려고 한 거지. 그렇게 생각해야 위안이 되니까. (…) 지금 생각하면 그 언니고 나고 당하기만 한 건데 말이야. 그깟 처녀막이 머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그랬나 몰라." (62쪽)

"그해에 눈이 징그럽게 왔제. 그르니 남자가 가지를 못허고 우리집서 사흘 밤을 자게 된 거여. 우리 어무이는 그때 신이 나려서 집 옆에 만든 법당에서 노상 기도를 혀고, 나는 아랫방에서 동상들허고 자고 아부지는 멀리 장사를 나갔고 없는디, 그 남자가 나를 덮친 거여. 그 사람도 떨면서 나를 덮친 건데 나도 얼결에 당한 거제. 그르니 빼도 박도 못허고 어쩌지를 못하고 있는 거제. 나는 이상하게 그 남자가 무슨 크다란 짐승모냥 무섭더라구." (163쪽)

"결혼 전 직장에서 같이 일하던 같은 또래 남자들은 그 경력을 바탕으로 결혼하고 나이 들수록 더 높은 자리에 더 많은 월급을 받는데, 왜 여자들은 다르냐는 말이야? 고위직이나 돈 많은 남자들한테 넘어간 여자들도 돈은 당장 한몫 잡았는지 모르지만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손가락질 받으며 숨어 살고 있고, 나처럼 결혼한 여자들은 애 낳아 키우면서 지네들 사회에서 사라진 거지. 남편이나 애들한테 원망은 없지만, 결혼하고 아이 낳았고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점점 밀려나잖아. 심지어 유통도 오십이 붙으면 땜빵밖에 없어. 늙은 여자라 이거지." (326쪽)

[프레시안 북스 지난 호 바로 가기]

그녀들의 거친 손에 담긴 고통의 역사와 연대의 힘

가난이 만들어지는 것은 노동조건 때문만은 아니다. 결혼과 가족, 여성에 대한 폭력과 멸시의 문화, 보육과 돌봄의 전담자라는 자리매김, 사회적으로 제공되지 않는 생존과 복지의 울타리가 가난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5000여 원의 시급이라는 싼 바코드가 찍힌 기계 취급을 당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생존해내야 하는 냉혹한 현실을 맞닥뜨리게 된다.

고통도 그녀들의 몫이다. 자식에 대한 회한, 풍요로웠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 잘못된 선택에 대한 후회, 신체의 아픔, 불안한 미래로 우울해하고 자책하고 눈물을 흘린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시간에 대해서, 제대로 선택하지 못한 데 대해서도 자책한다. 잘못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도 어떨 땐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가슴을 친다. 밀실 속에 있는 개인의 눈물을 알아보고 그 눈물의 번쩍임이 자신의 눈물과 같은 색이고, 또 다른 여성들, 무수한 여성들의 눈물과 같은 것임을 드러내는 건 저자의 힘이다. 그래서 저자는 인터뷰를 하다 말고 그녀를 격려한다. 그녀가 머뭇거리면 손을 잡는다. 그녀가 울면 같이 분개한다. 그리고 그녀가 낙담하면 이렇게 말한다.

"선배님은 그저 매 순간에 선배님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을 선택한 거야. 장래에 무슨 일이 닥칠지는 아무도 몰라. 그러니 모두 닥치는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거를 선택하며 사는 거고. 더구나 선배님은 그 선택을 끝까지 책임지고 산 거잖아. 그게 선배님의 성실함이고, 선배님 삶의 값진 의미라고 생각해요, 저는. 선배님이 통제할 수 없는 불행들까지 왜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느냐구?" (76쪽)

최현숙 씨는 그녀들의 삶을 직시하고 드러내 기술할 뿐 아니라 그 삶에 감춰져 있던 빛까지 드러내려고 한다. 그녀들은 착취당하면서도 베푸는 마음을 잊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짓밟혀도 자신과 남을 긍정하며 연대하는 힘을 지켜내었다. 삶에서 즐거운 순간을 기꺼이 누릴 뿐 아니라 젊은 날 지녔던 삶에 대한 긍정, 발랄한 욕구를 되살릴 수도 있다. 그녀들은 노동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책임지며 또한 가난한 삶이 가난한 삶과 어깨 맞대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임을 안다. 어떻게 보면 그녀들의 모습은 저자의 분신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기 삶의 질문에 대해 대답할 이들을 동료 속에서 찾았고 그 답 속에 동시대 여성의 삶을 비추어보았고 그것을 다시 세상에 희망과 믿음의 목소리로 내보냈다. 그래서 이 기록은 사실적인 기록임인 동시에 가치 지향이 뚜렷한 목소리들이며 지나간 일생임인 동시에 우리가 앞으로 함께 가야 할 길에 대해 다시금 다짐할 것을 촉구하는 약속과 같다.

'15소녀 표류기'는 앞으로 계속 나올 책들이다. 다른 세대의 여성들, 변해가는 사회 속의 여성들, 역사 속의 여성들,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이 남아 있고 무엇이 변해가고 있는지를, 우리는 무엇을 바꾸어냈고 무엇을 더 바꾸어야 하는지를, 길이 사라진 것 같은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온몸을 기대고 엮어 용감하게 삶을 지켜내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책의 저자가 인터뷰를 하면서 서로 그렇게 묻고 대답하고, 묻고 대답하며 희망을 잃지 말자고 간절히 약속했듯이 독자도 이 책 속의 여성들이 나란히 내민 거친 손을 잡으며 그 무언가를 약속하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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