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왕국' 엘사처럼 '나쁘고 착한' 여자들, 그 삶에 눈물이

[프레시안 books]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대체 이 책은 누굴 읽으라고 쓴 것일까? 이렇게 읽기 힘든 책을 왜 썼을까? 읽으면서 몇 번이고 책을 덮었다. 하도 기가 차고 눈물이 나서 다 못 읽을 뻔했다. 읽는 동안 자꾸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다. '한 나이든 여자가 울고 있다.' 그 이미지다. 할머니와 손잡고 앉아서 "할머니 울지 마세요." 이러다가 "할머니 같이 울어요." 이렇게 말하게 된다.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최현숙 지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이 책에는 세 할머니가 등장한다. 역사책에는 단 한 줄도 기록되지 않을 무명의 할머니들이다. 할머니들은 고향이 어디인지, 몇 년도에 태어났는지, 부모 형제는 어떤 사람인지, 몇 년도에 결혼했는지, 남편은 어떤 사람인지, 시어른은 어떤 사람인지, 자식은 몇을 뒀는지, 자식들 먹여 살리려고 어떤 일들을 하면서 살았는지를 시원스레 훌훌 털어놓았다. 그녀들이 거쳐 온 직업은 다 따라가기도 숨 가쁘다. 대체 이 고생은 언제쯤 끝나려나 묻게 만들만큼 서럽고 억울한 일들이 많았다. 그녀들의 이력은 전쟁, 이농,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나 수출, 수해, 화폐개혁, 쌀 파동, 유류파동, 밀가루 파동 등 한국사와 겹쳐진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것만 말한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을 말했다.

이 책의 저자 소개 첫 줄은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다. 무슨 뜻일까? 이 책에 등장하는 할머니들이 '나쁜 여자' 혹은 '착한 여자'란 말일까?

우리에게는 여성을 둘러싼 수많은 신화가 있다. 효녀 신화, 현모양처 신화. 수출역군 신화, 국가 발전 원동력 신화. 위대한 모성 신화. 착한 여자 신화. 이 신화들이 어떻게 우리 귀를 통과해 가슴 속으로 들어왔는지까지는 그녀들도 우리도 완전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들은 그 신화에 충실했다. 그 신화들이 자부심의 원천이었고 모진 고난과 희생까지도 견디게 해주는 힘이기도 했다. 그 신화들은 서서히 서서히,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오직 혼자만 아는 개인의 역사 깊숙한 곳에 드리워졌을 것이다. 혼자만 아는 수많은 질문과 대답의 순간, 결단의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들이 신화에 충실했던 이유, 진실은 이것일 것이다. 착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 구실하고 싶었고 경우와 염치를 아는 인간이고 싶었다.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기대에 충실하고 싶었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은혜를 갚고 싶어 했고 모질게 군 사람이 있어도 나중엔 어찌어찌 헤아리고도 싶어 했다. 나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지만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었다. 할머니들은 나쁜 여자가 아니라 착한 여자였기 때문에 어디든 훨훨 자유롭게 가지 못했다. 때리는 남편을 피해서 도망갈 때도 자식들을 업고 손잡아 끌고 갔다. 먹고 사는 문제와 자식새끼에 매여서 어디든 가지 못했다. 수도 없이 주저앉았다. 할머니들은 어디든 간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는 착한 여자로 천국에 갈 것이다.

할머니들이 온갖 연대기들과 함께 말한 것, 그것은 그녀들의 마음이었다. 어떤 공식적인 역사책에도 기록된 적 없는 그녀들의 '마음의 역사'엔 섭섭함, 죄책감, 후회. 미안함. 한, 서러움이 폭포처럼 흘러넘친다.

첫 번째에 등장하는 김미숙 할머니의 아들, 며느리는 목사다. 아들은 새벽기도 때 통성기도를 한다.

"우리 어머니에게 회개의 은혜를 내려주십사"

아들 목사가 어머니에게 회개하라고 하는 이유? 아들은 언젠가 할머니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었다. 미군 부대서 몸 함부로 굴린 거랑 낙태 많이 한 거 회개하세요.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지랄을 하고 자빠졌어. 다른 회개라면 할 거 많아. 난 그 회개는 안 나와. 여자 혼자 벌어먹고 사느라 한일인데 내가 도둑질을 했어 살인을 했어? 그리고 그렇게 임신된 거 다 낳았어봐. 그걸 누가 책임지고 키울 거야? 어린것들이 손가락질 당해서 학교도 못가고 직장도 못 다니고. 나 하나로 끝나면 될 걸 왜 애까지 낳아서 그 설움을 또 만드냐고? 그걸 회개하라니 말이 돼? 그리고 저 목사 만든 돈이 어디서 나온 건데? 저 목사 된 게 내가 양키 물건 장사하고 미군이랑 살림해서 번 돈인데 그게 뭐가 잘못이냐고? 그 돈으로 공부해서 목사된 지가 할 소리냐? 회개를 하려면 에미가 뼈가 빠지게 고생한 돈 갖다 쓰기만 한 거를 회개를 하던가 해야지. 근데 왜 회개를 내가 해? 그 소리 듣기 싫어서 거기가 지옥이야. 지네들 하나님은 어떤가 몰라도 내 하나님은 딱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있는 하느님이야.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을 위해 오신 예수님."

안완철 할머니는 자신의 딸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랑 이런 대화를 나눈다.

"최현숙 : 아버지와의 부딪힘이 나한테는 사회의 모든 관습과 부딪히는 계기이자 과정이었던 거 같아. 난들 그게 쉽게 편하기만 했겠수? 나도 너무 힘들었고 죄책감과 미안함 때문에 스스로 나쁜 년이라고 자책도 많이 했지만 그렇게 죽일 년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었어. 내가 내 삶을 선택하고 싶은데 아버지는 자기가 원하는 삶을 내게 강요한다고 나는 생각했거든.

안완철 : 내가 너 때문에 속이 문드러지면서도 또 젤로 부러워하는거야. 혈육간이든 부녀지간이든 죽일 년이 되더라도 니 판단대로 실행하는 거. 난 그걸 평-생, 한-번도 못했거든. 내 친정아버지와 오빠들한테도 그렇고 남편과 자식들한테도 그렇고."

문제는 다른 신화들처럼 착한 여자 신화도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자기 잘못이 아닌 수많은 수모와 고통을 감내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사회라는 점에서/ 좋지 않은 일은 가해자나 사회 때문이 아니라 착하게 살지 않은 여성들 탓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이고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신화는 우리가 열렬히 되고 싶은 바로 그 모습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괜찮은 인간으로 있는 힘껏 제 역할을 다하며 살다가고 싶다. 그런데 인간성의 밑바탕이라고 할 만한 이런 믿음을 배신하고 이용하기만 하는 '불한당들의 역사' 아래선 '서러운 마음의 역사'로 이어지는 연대기는 계속 될 것이다. 너무나 되고 싶었던 착한 여자가 되느라 자기 자신의 삶은 살지 못한 채 서러움만 쌓인다. 착한 여자이면서 동시에 자기 삶을 살려면 나쁜 여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인터뷰의 깊이에서도 놀랍다. 얼마만큼 애를 썼을지 눈앞에 그려진다. 세상 누구한테도 내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사는 것은 끔찍하게 외로운 일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비슷하다. 할머니들에게도 진정한 위로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살려고 했고 그 와중에 어떤 일인가 벌어졌음을 아주 솔직하게 말해 볼 수 있는 것만큼 마음에 각성과 해방과 위로가 되는 일은 없다. 자기 긍정이라는 것도 이런 솔직한 대면 뒤에야 겨우 올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어디든 가는' 자칭 '나쁜 여자'다. 어디든 가기로 맘먹은 '나쁜 여자'가 천사와도 같은 일을 했다. 어디든 갈 수 있는 나쁜 여자가 가야할 바로 그 곳으로 날아갔다.

이 책의 저자 최현숙. 그의 2008년 선거 출마를 다룬 다큐멘터리 <레즈비언 정치 도전기> 중 한 장면. ⓒ연분홍치마

이 책은 듣지 않으려 하고, 말하지 않으려 하는 우리에게도 용기를 주고 자극이 된다. 왜냐하면 아주 깊게 대화를 나눌 수만 있다면, 아주 깊게 들을 수만 있다면, 아주 깊게 말할 수만 있다면, 그 다음엔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일만 남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한 가지가 궁금해진다.
요새 인기를 끄는 <겨울왕국>에서 엘사는 '왜 더 이상 착한 소녀는 없어'라고 노래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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