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캠핑장'과 대지진 이후의 폐허, 그 속에 가능성의 씨앗이?

제럴드 코헨의 <이 세상이 백 명이 놀러 온 캠핑장이라면>

제럴드 코헨(제럴드 코언)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 시절 사회학 수업에서였다. 당시 한국 학계에는 무척 생소했던 '분석 마르크스주의'라는 사조를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분석 마르크스주의'란 영어권의 몇몇 철학자, 사회과학자들이 주류 사회과학의 방법을 동원해서 마르크스주의 사회 이론을 옹호하고 그 토대를 새로 놓으려 한 시도를 일컫는 말이다. 철학자인 코헨도 이러한 흐름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코헨은 이 흐름 안에서도 좀 유별난 존재였다. 코헨을 제외한 다른 동료들(욘 엘스터, 존 로머 그리고 로버트 브레너 등)은 사회의 지속과 변화를 개인의 합리적 선택의 결과로 설명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행위자의 중요성을 지워 버리고 구조 중심의 설명에 치중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혁신하려 했고, 그 대안으로 주류 경제학으로부터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빌려왔다. 헤겔식 변증법이나 구조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 보통의 경제학자들이 쓰는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더라도 계급투쟁의 존재와 역할을 설명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것, 이게 이들의 공통된 목표였다.

<카를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 : 역사유물론 옹호>(제럴드 코헨 지음, 박형신·정헌주 옮김, 한길사 펴냄). ⓒ한길사
하지만 코헨은 달랐다. 분석 마르크스주의의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그는 오히려 정통 마르스주의를 옹호하는 데서 출발했다. 흔히 역사유물론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 명제, "생산력 발전이 역사의 원동력"이라는 명제를 논증하는 게 그의 두꺼운 첫 저작의 주제였다. 몇 년 전 우리말로도 번역돼 나온 이 책(<카를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 : 역사유물론 옹호>(박형신·정헌주 옮김, 한길사 펴냄)은 무려 700여 쪽에 달한다.

이 책에서 코헨은 역사유물론의 '생산력' 중심 해석을 색다른 방법으로 논증한다. 그의 동료들이 마르크스주의에 주류 경제학 방법론을 들여왔다면, 그는 영미권 주류 철학을 끌어들였다. 20세기에 영국의 대학 철학과를 지배하던 분석 철학을 도입한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 철학 박사인 코헨은 카를 포퍼가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데 동원한 바로 그 철학 방법론으로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강력히 옹호했다.

이것이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코헨에 대해 내가 기억하는 것의 전부였다. 솔직히 내게는 재미없는 인물일 뿐이었다. 세계와 인간에 대해 커다란 이야기들을 쏟아내는 독일이나 프랑스 쪽 철학과 달리 논리학이나 자연과학 방법론의 궤도를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 영어권 철학 자체가 내 관심권 바깥이었다.

더구나 마르크스주의의 여러 측면 중 하필이면 생산력주의에 그토록 관심을 집중한다는 것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생산력 발전으로 역사를 설명하는 것은 느슨하게 해석할 경우에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상식적 내용일 수 있지만, 정색하고 옹호하게 되면 상당히 번잡한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기도 하다. 수백 쪽짜리 대작을 써서 공들여 논증해야 할 주제는 아니라는 게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러다 몇 달 전 코헨의 유작이라는 짧은 책 한 권이 번역돼 나온 것을 보게 됐다. "이 세상이 백 명이 놀러 온 캠핑장이라면"이라는 다소 긴 제목을 단 이 책(원제는 간명하게 "Why not Socialism?"이다. 이하 <캠핑장이라면>(조승래 옮김, 이숲 펴냄))은 문고본 크기인데도 본문 분량이 70쪽도 안 된다. 서평을 잘못 썼다가는 원래 책보다 더 길어질 위험이 있을 정도다.

한데 코헨의 첫 저작과 이 유저가 서로 대비되는 게 700쪽과 70쪽의 분량 차이만은 아니다. 코헨의 마지막 책을 손에 잡자마자 나는 이내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다소 특이한 방법을 동원한 훈고학자라는 기억은 참으로 부끄러운 단편적 인상일 뿐이었다. 뒤늦게 부음을 접한(2009년 졸) 이 철학자는 깊이 있고 치열한 사회주의 사상가였다.

제럴드 코헨(1941~2009). ⓒOxford

자유주의 윤리학 비판을 통해 사회주의의 토대를 다시 쌓다

역시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코헨의 사색은 현실 사회주의권 붕괴를 전후하여 크게 변화했다. 그가 한창 왕성히 활동하던 때는 역사상 사회주의 사상가에게 가장 혹독한 시련기였다. 첫 저서 <카를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이 나온 게 1978년인데, 1년 뒤 영국에는 마거릿 대처 정권이 들어서서 시장 지상주의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10년 뒤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졌다.

이 무렵 코헨은 이제까지 확신하던 역사유물론 체계에 회의의 칼날을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 마냥 이게 우파로 전향할 채비는 아니었다. <캠핑장이라면>의 부제 "어느 사회주의자의 유언"이 분명히 보여주듯이, 죽을 때까지 그는 자본주의는 결국 극복되어야 하며 인류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신념을 전통적 용어법에 따라 계속 '사회주의'라 칭했다.

다만 그가 더 이상 확신하지 못하게 된 것은 자본주의 아래서 생산력 발전이 무르익으면 필연적으로 노동 대중의 계급의식이 성숙해서 사회주의로 나아가게 된다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도식이었다. 지난 역사는 그런 계급의식의 발전을 쉽게 기대할 수 없음을 웅변한다. 적어도 생산력 발전의 결과만으로 그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코헨은 자신의 필생의 과제를 발견한 것 같다.

더 이상 사회주의를 노동 대중의 계급의식의 발전으로 환원할 수 없다면, 그래서 그런 의식을 지닌 집단의 권력 장악('프롤레타리아 독재')으로 단순화할 수 없다면, 이제 이런 익숙한 도식 없이도 사회주의를 정의하고 설명하는 게 중대한 과제가 된다. 사회주의를 보수주의, 자유주의와 근본적으로 대조되는 독자적인 삶의 태도나 사회 조직 방식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보수주의나 자유주의에 비해 얼마나 더 바람직하며 또한 충분히 실현 가능한지 따지고 들어야 한다. 코헨이 새로 시작한 게 다름 아닌 이 과업이었다.

그래서 1990년대 이후 코헨의 사색은 윤리학에 집중됐다. 그는 다양한 조류의 자유주의 윤리학을 비판하고 이들에 맞선 대안적 사회 윤리로서 사회주의의 토대를 재구축해나갔다. 대처식 시장 지상주의와 연계된 로버트 노직의 자유 지상주의도 비판했고, 현실 사회주의 실패 이후 진보의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과대평가된 존 롤스의 분배 정의론도 비판했다. 이 모두가 지금 우리에게 시급히 소개돼야 할 근본적이면서도 시의적절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신)자유주의의 '바깥'이 존재함을 탐색한 선구적인 사색이자 개입이기 때문이다.

코헨의 작업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이러한 사색을 더 없이 명료한 언어로 수행했다는 데 있다. 그는 영미권 철학자다. 더구나 분석 철학의 언어로 역사유물론을 재정식화하려고 시도한 '분석 마르크스주의자'다. 이것이 후기의 윤리학 논쟁-탐구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는 노직이나 롤스와 같은 지평에서 논쟁할 수 있는 철학 방법론을 통해 사회주의의 윤리적 기초를 다져나갔다.

그래서 그가 남긴 글들은 지극히 명징하다. 지나치게 논리적인 서술이 익숙지 않아서 당황할 수는 있을망정 장황하거나 난해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유럽 대륙 쪽 저자들과는 분명 다르다. <캠핑장이라면>은 코헨의 이런 강점을 오롯이 드러낸다. 누구나 다 몇 시간이면 숙독하고도 남을 분량에 중대한 문제의식들을 집약해 놓았다.

사회주의 : 평등, 더 많은 평등 그리고 시장보다 위에 선 공동체

<이 세상이 백 명이 놀러 온 캠핑장이라면>(제럴드 코헨 지음, 조승래 옮김, 이숲 펴냄). ⓒ이숲
가뜩이나 얇은 책인데, 굳이 서평에서까지 내용을 상세히 반복할 필요는 없겠다. 그래도 이 서평을 읽는 분들을 위해 책의 전반적인 구도만 소개하면 이렇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 책의 원제는 "사회주의는 왜 안 돼?"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직답이 국역본 제목인 "이 세상이 백 명이 놀러 온 캠핑장이라면"이라는 가정이다. 캠핑장에서는 "계급도 서열도 없고" "개인의 소유물이라 하더라도 캠핑장에서 함께 생활하기 위해 모두 공동으로 통제"하며 "공동의 관심사에 대해 서로 협동"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평등을 극도로 반대하는 사람조차도 평등과 상호 호혜의 규범을 받아들이고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캠핑장에서 사적 소유나 시장 교환을 강조하는 사람은 따돌림이나 당하기 십상이다.

그렇다. 캠핑장에서는 그러하다. 캠핑장에서 이게 가능하다면 더 확대된 사회에서라고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이것이 <캠핑장이라면>의 출발점 역할을 하는 가정이다. 물론 코헨이 "캠핑장에서 가능하니 다른 어디서든 가능하다"는 식의 억지를 부리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캠핑장과 사회 전반 사이에 왜 차이가 나타나는지 물으며 논지를 이끌어간다.

하지만 '캠핑장 가설'이 단지 이야기의 운을 떼기 위한 수단인 것만은 아니다. 이를 통해 코헨은 사회주의가 인간 본성에 위배되기 때문에 실현 불가능하다는 익숙한 반론을 절반쯤 무장 해제시키고 출발할 수 있다.

캠핑장에서 인간이 평소와는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항상 '이미' 자본주의 사회 구조에 지배받고 있는 일상을 떠나면 인간의 행동 양식은 이런 '캠핑장 유형'으로 변화한다. 그렇다면 성선설, 성악설 따위로 사회주의의 실현 가능성 여부를 따지는 것은 일단 어불성설이다. 인간은 캠핑장 유형으로 행동할 수도 있고 일상에서처럼 행동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코헨은 캠핑장 상황의 유추로부터 사회주의의 두 가지 기본 원리라 할 만한 것을 뽑아낸다. 그 중 하나는 평등이다. 낯익은 이야기다. '사회주의' 하면 누구나 '평등'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코헨은 여기에서 '평등'은 '기회의 평등'이지 '결과의 평등'은 아니라고 못 박는다. 그리고 기회의 평등을 세 가지 수준으로 다시 나누면서, 이 세 가지 기회 평등을 모두 추구하는 것이 (자유주의와 구별되는) 사회주의만의 특성이라 설명한다.

그 첫 번째는 '부르주아적 기회 평등'이다. 이것은 "잘못된 권리의 배분과 편파적인 사회적 편견이 낳은 기회에 대한 제약을 제거"하는 것이다. 가령 양반과 상민, 노비의 구별을 철폐하거나 흑인과 백인의 차별을 없애는 일이다.

두 번째는 이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간 '자유주의 좌파의 기회 평등'이다. 이것은 위와 같은 형식적 장애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의 제약적 효과"까지 제거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모든 아동이 학교에 가도록 보장할 뿐만 아니라 가난한 집 아이들이 제대로 학습할 수 있도록 추가적으로 지원하는 일이다.

코헨에 따르면, 이 두 수준을 넘어서는 더 적극적인 기회 평등의 추구가 '사회주의적 기회 평등'이다. 이것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모든 불리한 여건을 수정하려고 한다." 말하자면 자연적 능력이나 사회적 역량처럼 개인이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불평등을 낳을 수 있는 차이까지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과의 불평등은 오직 개인의 선호 차이에 의해서 나타날 때에만 인정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의 불평등은 어떤 식으로든 교정되어야 한다.

자유주의(가장 '진보적인' 자유주의라 할지라도)와 달리, 사회주의는 이 세 수준의 기회 평등을 모두 추구한다. 여기에서는 기본 개념만 제시하느라 딱딱하게 서술했지만, 코헨 자신은 캠핑장의 비유를 들어 훨씬 더 생생하게 논의를 풀어간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평등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말한다. 또 다른 핵심 원칙으로서 공동체 원리, 즉 상호 호혜가 필요하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를 코헨은 '사회주의적 기회 평등'조차도 개인의 선호 차이에 따른 결과 불평등은 치유할 수 없다는 데서 찾는다. 개인이 살아가며 반복한 선택들의 결과로 개인들 사이에는 불평등이 나타날 수 있다. 특히 끊임없이 승패가 결판나는 장(場)인 시장이 존재하고 이것이 삶의 상당 부분을 지배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코헨이 시장 사회주의에 비판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장이 여전히 경제 활동의 주 무대 역할을 하는 시장 사회주의에서는 시장에서의 성패에 따라 개인들 사이의 결과 불평등이 누적되게 된다. 그에 따라 나타나게 될 사회의 모습은 현존 자본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자본주의를 넘어서자면 시장 원리와는 상반되는 원칙이 작동해야 한다. 그것을 코헨은 '공동체 (원리)'라 칭한다. 그 핵심은 "사람들이 서로 관심을 보이고, 서로 돌보고, 또 유념하여 서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요청"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적 기회 평등이 보장되는 경우에조차 나타나게 될 또 다른 불평등을 억제하면서 동료 인간에 대한 배려를 통해 사회 전반의 만족을 높여야 한다.

칼 폴라니는 '교환'과 '호혜'를 서로 대비시킨 바 있는데, 코헨은 이것을 '시장적 상호 호혜' 대 '공동체적 상호 호혜'라 표현한다. 코헨은 다른 글에서 사회주의의 열망이란 곧 "시장 원리를 넘어 공동체 원리를 경제 생활 전체로 확대하려는 것"이라고 정식화하기도 했다("Back to Socialist Basic", New Left Review, Sep/Oct. 1994). 그러면서 공동체 원리가 시장 원리를 제압한 사례로 복지 국가의 무상 공공 의료를 들었다. 코헨이 보기에는 이게 보건의료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로 확장되는 게 곧 사회주의다.

<캠핑장이라면>의 후반부는 이러한 "평등, 더 많은 평등+공동체적 상호 호혜"로서의 사회주의가 결코 바람직하지 않거나 실현 불가능하지 않은데도 아직껏 실현되지 못한 이유를 찾는다. 코헨의 답은 "그것을 작동시키는 장치를 어떻게 고안할지" 인류가 아직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관건은 '기획'과 '고안'이다." 이제까지의 기획은 모두 실패한 게 분명하지만, 앞으로의 기획 여하에 따라 상황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캠핑장에서와는 달리 사회 전반에서는 '아직' 답을 찾지 못한 것뿐이다.

우리는 어떻게 캠핑장에서처럼 행동할 수 있게 될 것인가?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덧붙이면, 코헨의 논의가 윤리학에 집중됐다고 해서 그가 좁은 의미의 '윤리적 사회주의'로 회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타심에 호소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자는 식은 아니다. 그는 사회주의의 제도적 토대로서 '사적 소유 폐지'와 '시장의 극복'을 여전히 강조한다. 이 점에서 그는 아주 강한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는 입장이다.

코헨은 다만 '윤리'를 '계급의식'으로 치환한 후에 한 동안 경시해온 사회주의의 윤리적 기초에 다시 주목하고 이것을 재정초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만년에 사회주의의 두 뼈대로 제시한 두 원칙, "평등, 더 많은 평등"과 "공동체적 상호 호혜"에는 분명 강한 설득력과 타당성이 있다.

사회주의의 역사적 등장 자체가 이 두 원칙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공감을 확산시키는 과정이었다. 18세기 말, 부르주아지와 연합해 프랑스 대혁명을 이끈 파리의 민중('상퀼로트'라 불렸던)은 부르주아지가 혁명의 과실을 독점하자 '평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자유'와 대립되는 의미의 '평등'이 아니라 '자유의 평등', 즉 '평등한 자유'였다. 이러한 집단적 각성은 코헨이 말한 '사회주의적 기회 평등' 원칙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파리 민중의 의사를 대변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던 집권 자코뱅파 지도자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민중의 요구를 새 헌법에 정리해 담으려 했다. 이를 위해 그가 작성한 <인권 선언> 수정안은 다음과 같은 낯선 문장을 선보였다.

"사회는 그 사회 구성원에게 일자리를 조달하거나, 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생존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해주어, 구성원의 생계를 공급해야 할 의무가 있다."

사회는 그 모든 구성원을 돌볼 의무가 있다. 다름 아니라 코헨이 제시한 공동체 원리, 그것이다. 경쟁에 의해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시장과는 전혀 다른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자코뱅파의 이상적 공화주의자들은 현실의 불평등에 대한 파리 민중의 문제 제기에 답하자면 이러한 반시장적 원리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사회주의>(장석준 지음, 책세상 펴냄). ⓒ책세상
잘 알려져 있듯이, 자코뱅파 자신은 이러한 최초의 발견을 실현할 운명이 아니었다. 그들이 부르주아지의 쿠데타에 밀려난 뒤에 이들의 횃불을 이어받은 것은 그라쿠스 바뵈프(프랑수아노엘 바뵈프)가 이끌던 '평등파'였다. 그들은 대혁명의 최종 결과물인 부르주아 공화국을 넘어 '평등 공화국'을 건설하는 새 혁명에 착수하려 했다. 물론 평등파의 시도도 결국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의 기억을 발판으로 19세기 유럽에서 비로소 근대 사회주의 사상-운동이 시작됐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 대한 보다 자세한 소개로는 <사회주의>(책세상 펴냄)를 참고할 수 있다.)

<캠핑장이라면>에서 코헨은 오랫동안 사회주의자들 자신조차 단지 흐릿하게만 기억하던 이 역사적 각성을 사회주의의 두 가지 핵심 원리로서 새삼 확연히 일깨워준다. 두 세기 전 초기 형성 과정에서 그랬듯이 지금도 (신)자유주의에 맞설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은 이 두 원리다. 이것이 사회주의자 코헨이 우리에게 꼭 남기고자 한 '유언'이다.

물론 코헨이 해법까지 우리에게 다 전수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삶에서 이 두 원리를 실현해갈 수 있을지는 남은 자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다만 '캠핑장'이라는 비유가 생각보다 꽤 많은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만은 눈여겨 볼만하다. 물론 요즘 한국 사회에서 아무리 캠핑 열풍이 뜨겁다 하더라도 이로부터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까지 엿볼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코헨의 비유는 애초 분위기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 캠핑의 핵심은 일상을 떠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캠핑처럼 스스로 즐기려고 일상을 떠나기도 하지만 갑자기 강제로 일상과 유리되기도 한다.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재난의 경우가 그렇다.

흔히 재난 상황이라고 하면, 폭력과 약탈을 떠올리곤 한다. 특히 할리우드 영화들이 이런 인상을 깊이 심어 놓았다. 그러나 레베카 솔닛은 역작 <이 폐허를 응시하라: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정해영 옮김, 펜타그램 펴냄)에서 전혀 다른 그림을 제시한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레베카 솔닛 지음, 정해영 옮김, 펜타그램 펴냄). ⓒ펜타그램
솔닛에 따르면, 20세기 벽두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나 2001년 9·11 참사 직후에 나타난 광경은 약탈과 살육의 광란이 아니라 코헨의 '캠핑장' 비유와 같은 상황이었다. 일상을 느닷없이 중단시킨 재난 앞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공동으로 꾸려가며 서로를 돌보는 삶을 만들어갔다. 코헨 책의 국역본 제목을 따서 제목을 "이 세상이 갑자기 재난 현장이 된다면"으로 바꿔도 좋을 정도로,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코헨의 '캠핑장' 비유를 보완할 또 다른 풍부한 사례들을 제시한다.

그렇다고 대재난에 따른 인간의 집단적 변화에 모든 기대를 걸 수야 없는 일이다. 자본주의 문명의 성숙이 이제는 부패 단계에 이르러 후쿠시마 같은 대재앙에 이미 친숙해져 버린 시대에 진입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 모두는 어쨌든 그런 묵시록적 계기 이전에 혹은 그것 없이도 우리 자신이 변화해갈 것을 꿈꾸고 또한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코헨이 이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한 것은 아니다. 사실 그가 복지 국가나 시장 사회주의를 비판한 것은 이런 체제가 사회주의의 실현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부족함을 지적하려던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런 체제를 중간 기착지 삼아 궁극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판단을 돌려 말한 것이기도 하다.

코헨은 복지 국가가 애초에 도대체 무엇을 실현하려 했던 것인지 환기시키기 위해 새삼 궁극 목표를 들춰내 강조한 것이다. 자유주의의 공세 앞에서 어제의 성취들이 속절없이 흔들리는 시대에 맞서서 말이다.

이렇듯 코헨의 논의는 강인하다. 사회주의가 궁극적으로 실패한 것은 아니고 다만 실현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그의 진단이 지나치게 건조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호들갑스러운 사망 선고나 과장된 낙관적 예언 따위에 비하면 그 미덕은 예사롭지 않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인용한 <캠핑장이라면>의 마지막 문구(그러고 보니 이 책의 원제는 아인슈타인의 저 유명한 논설 "Why Socialism?"에 대한 화답임이 분명하다)는, 그래서, 깊이 곱씹으며 가슴에 새길만한 값어치를 지닌다.

"나는 사회주의가 "인간의 발전 단계에서 포식의 단계를 극복하고 진보하려는 인간의 시도"라고 말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모든 시장은, 사회주의 시장조차도 포식의 체계다. 그것을 극복하려고 했던 우리의 시도는 실패했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옳은 생각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캠핑장이라면> 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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