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 그 때 농민 혁명이 성공했다면?

[장석준 칼럼] 120년 만의 갑오년

서양에서는 지난 일들을 주로 10년 단위로 기념하곤 한다. 몇 십 주년 혹은 몇 백 주년이 중요하다. 그렇게 따지면 올해 2014년은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년)이 발발한 지 100년째 되는 해다. 제1차 세계 대전 100주년을 맞이하며 서구인들은 20세기의 색조를 결정한 이 대사건의 의미를 새삼 곱씹고 있다.

가령 지난 25일 영국의 <가디언>에는 "만약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했다면?"이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관련 기사 : "What if the Germans had won the first world war?") 칼럼니스트 마틴 케틀은 이 글에서, 영국 등 연합국이 아니라 독일 제국이 이겼다면 이후 세계사가 훨씬 더 바람직한 전개 양상을 보였을지 모른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독일 패전의 직접적 산물인 나치즘이 인류를 또 다시 세계 전쟁에 내모는 일 따위는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논의다. 하지만 나라면 물음을 달리 던지겠다. 케틀의 칼럼은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것을 전제로 단지 그 승자가 바뀔 경우를 상상한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물음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실제 역사처럼 그렇게 발발하지 않았다면, 세계사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그럼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다. 최소한 그 발발을 막으려는 힘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는 세계 전쟁을 필연으로 만들고 만 제국주의의 극성기이도 했지만, 유럽 여러 나라에서 노동 운동, 사회주의 운동이 가장 힘차게 전진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까지도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등의 지배자들은 노동자 총파업에 시달리거나 그 전조에 겁먹고 있었다.

변혁 세력들은 세계 전쟁 가능성에 맞설 적극적 대응 시나리오까지 모색하고 있었다. 강대국들 사이에 개전 조짐이 보인다면 반전 총파업으로 이에 맞서자는 것이었다. 만약 이러한 반전 총파업이 실제 시도됐다면, 전쟁 자체는 피할 수 없었을지 몰라도 최소한 '세계' 전쟁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경우 20세기 역사는 훨씬 덜 폭력적인 양상을 띠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반전 총파업은 성사되지 못했고, '극단의 시대'(에릭 홉스봄)가 시작됐다.

이런 식의 역사적 가정에는 항상 많은 논란이 뒤따른다. 한가한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는 핀잔도 적지 않다. 하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한 방법으로서 의미가 전혀 없지는 않다. 인간 역사가 단순한 구조의 지속이나 반복만은 아니라는 것을 환기하는 데는 나름 쓸모가 있다. 역사에는 '사건'이라는 중대한 변곡점들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서로 충돌하기도 하는 다양한 발전 가능성들을 내포한 이런 '사건'에서 어떤 가능성이 실제로 전면화하는지에 따라 이후 역사의 색채가 크게 바뀌게 된다.

10년 단위의 역사 계산에 익숙한 서양과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최근까지 60년을 한 주기로 하는 셈법이 통용됐다. 이에 따르면 올해는 '갑오(甲午)'년이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 이후 두 번째로 돌아오는 갑오년이다. 서구에서는 지금 제1차 세계 대전 100주년이 화제인데, 우리에게는 동학 농민 혁명 120주년이 그런 이야기 거리가 될 만하다.

동학 농민 혁명은 분명 그 정도의 대사건이다. 이후 한국인들은 각 세대마다 혁명 또는 준혁명을 반복 경험했지만, 그 규모와 깊이에서 동학 농민 혁명을 능가한 것은 없었다. 3·1 운동도, 4월 혁명도, 1987년 민주화 항쟁도 갑오년 혁명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농민 혁명군이 호남에 실현했던 민중 권력 수준에 도달해본 적은 없다.

1894년 혁명의 의미를 좀 더 생생히 확인하기 위해 이 경우에도 역사적 가정법을 동원해보자. "만약 농민 혁명이 성공했다면, 이후 역사는 어떠했을까?"

▲ 전봉준(1854~1895년). ⓒwikipedia.org
조선에는 적어도 전봉준이 제시한 "합의법에 의한 정치"(<전봉준 공초>)가 들어섰을 것이다. 즉, 입헌민주제가 수립돼 민중들의 개혁 요구를 실현하는 무대가 되었을 것이다. 농민 혁명이 실패한 지 4년 뒤에 서울에서 폭발한 만민공동회 운동과 같은 양상이 전국적 차원에서 지속됐을 것이다.

봉건 세력과 변혁 세력의 다툼으로 인한 혼란도 있었겠지만, 이런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거친 나라는 1905년의 대한제국처럼 그렇게 쉽게 일제에 굴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뼈아픈 식민지 경험 없이 북유럽 국가들처럼 뿌리 깊은 민주주의 전통을 일구게 됐을지 모른다.

이것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 전체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조선에서 민(民)의 승리는 한반도를 열강의 전쟁터가 아니라 오히려 동아시아 질서 재편의 진원지로 만들었을 것이다.

우선, 청과 일본이 무력 대결을 통해 우열을 확인할 청일 전쟁 같은 기회가 봉쇄 혹은 연기됐을 것이다. 이렇게 제국주의적인 외부 팽창 통로를 차단당한 청과 일본에서는 실제 역사보다 더 빠른 속도로, 더 강력하게 내부 개혁 요구가 부상했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를 낳게 된 요소들이 여전히 작동했겠지만, 그 배출 방식은 우리가 경험한 실제 역사와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동학 농민 혁명은 이 정도로 중대한 사건이었다. 한반도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 역사의 분기점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내포되었던 여러 가능성들 중에서 결국 실현된 것은 최악의 방향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현실이 이렇게 전개되도록 만든 첫 번째이자 결정적인 요인은 청군 파견을 요청한 당시 조선 핵심 지배층의 선택이었다. 더 정확히는 고종과 왕비 민 씨의 선택이었다.

고종과 왕비는 농민 혁명군을 진압하고자 청군을 불러들였다. 덕분에 일본군까지 청과의 조약을 빌미삼아 상륙했다. 외국군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농민 혁명군에 맞설 수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농민 혁명의 승리가 필연적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필연에 거역하기 위해 조선 핵심 지배층은 나라를 외국군의 전쟁터로 열어놓았다. 이와 함께 1894년의 대사건에 내포되어 있던 최선의 가능성은 스러져버리고 최악의 가능성이 엄습했다. 우리의 20세기가 결정됐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고종과 왕비도, 그들의 조정도 '개혁'을 꿈꾸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개혁'은 민과 함께 추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민은 같이 토론하고 합의할 주체가 아니었다. 그들의 개혁은 오직 타국의 동류들과 조율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본군의 영향력 아래 추진된 갑오경장이 바로 이런 '개혁'이었다.

흥미롭게도 박근혜 정부 역시 공기업 '개혁'을 하겠다면서 '갑오경장'을 상기한다. 그러고 보니 대통령이 이 나라 시민들이 아니라 프랑스 자본가들 앞에서 먼저 철도 사유화 구상을 밝힌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닌 듯하다.

다시 갑오년이다. 두 갑자 전 갑오년이 패배로 끝나고 열린 고난과 시련의 120년 뒤에 돌아온 갑오년이다. 많은 이들이 불길하게 지적하는 것처럼, 상황은 1894년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나라 안에서는 다시금, 해외의 동류들과 더 친숙한 지배자들과 분노한 민중이 대치하고 있다. 또한 이번에도, 옛 패권 국가와 새 도전 국가 사이의 대결선이 한반도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번 갑오년에는 과연 어찌 될 것인가? 120년을 숨죽이며 기다려온 '개벽'이 비로소 재개될 것인가, 아니면 또 다시 '파국'인가? 아니, 이렇게 묻기 전에, 지금 우리의 '동학당'은 어디에 있는가? 새해를 맞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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