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망해야 한반도가 산다!

[장석준 칼럼] 남과 북의 투쟁은 하나다

12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특별재판은 그에게 사형 및 전 재산 몰수형을 선고했다.

재판 결과는 3일 뒤인 18일에 <로동신문>에 공개됐다. "공화국 주권을 전복할 목적 아래 간첩, 파괴, 암해, 살인, 테러 등 방법으로 조국 반역의 극악한 범죄"를 감행했다는 것이 판결 이유였다. 대외적으로 정권의 제2인자였던 사람이 말하자면 '내란 음모'로 사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장성택이 아니다. 1주일 전에 돌연 '공화국의 적'으로 지목돼 처형당한 그 사람이 아니다. 위의 이야기는 1955년 12월에 벌어진 일이고, '그'는 이정(而丁) 박헌영이다. 무려 반세기도 더 전의 사건인데, 2013년 12월의 북한과 판박이로 닮았다. 장성택을 박헌영에 댈 것은 아니지만, 권력 중심부 내의 위협 요소라서 죽임을 당했다는 점만은 같다. 북한 사회의 시계는 1955년 언저리에서 멈춰버린 게 아닌가. 장성택의 숙청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새삼 일깨워줬다.

노파심에서 굳이 몇 마디 덧붙이면, 나는 김일성과 대비해 박헌영을 무조건 두둔하는 입장은 아니다. 김일성만큼이나 박헌영에게도 분단의 역사적 책임이 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정권 1, 2인자로서 한국전쟁을 함께 기획했다. 또 해방 공간에서 박헌영이 보여준 모습도 정치 지도자로서는 흠결이 많은 것이었다. 당시 좌파의 올바른 정치 전략은 박헌영 노선이 아니라 여운형 노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헌영은 결코 그렇게 죽었어야 할 인물은 아니었다. 심각한 정치적 오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쨌든 일제에 맞서 가장 치열하게 싸운 불굴의 혁명가였다. 동족의 정권, 더구나 '동지'라고 여겼던 이들에 의해 오명을 덮어쓰고 비참한 죽음을 당해야 할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 박헌영 한 사람이 아니라 이후 북한 인민 전체의 운명이었다. 숙청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주영하, 오기섭 등 일제 강점기부터 북한 지역에서 활동하던 국내파 사회주의자들도 숙청됐고, 중경 임시정부에서 좌파를 대표하던 약산 김원봉이나 연안에서 독립동맹을 조직해 항전한 또 다른 사회주의 세력도 이 운명을 피해가지 못했다. 나중에는 급기야 김일성과 함께 조국광복회 활동을 벌였던 이른바 갑산파까지 철퇴를 맞았다. 해방 후 남한에서 독립 투사들이 탄압을 받았다고 하지만, 더 많은 항일 혁명가들이 더 비참하게 짓밟힌 곳은 북한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모든 정치적 경쟁 세력 혹은 잠재적 경쟁 세력이 뿌리 뽑히고 난 자리에 이른바 '유일 체제'가 들어섰다. '유신 체제'와 발음마저 비슷한 이 체제는 스탈린주의의 일당 독재를 김일성 일가('백두혈통'!)의 일인 독재로까지 극단화했다. 본래 일당 독재 자체가 그릇된 것이지만, 일인 독재는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일당 독재라 하더라도 지배 정당 안에 여러 관료 분파들이 있고 이들의 경쟁과 합의로 국가가 운영된다면, 그 사회는 어쨌든 더 발전된 다원주의로 나아갈 가능성을 키워나가게 된다. 현재의 중국과 베트남이 그러하다. 그러나 일인 독재는 이런 가능성을 철저히 봉쇄한다. 이것을 변호하는 이념이 인민의 의지를 수령이 오롯이 대변한다는 '주체 사상'이다. 덕분에, 출발점이 서로 비슷했던 베트남과 북한 사이에는 이제 거의 '문명' 수준의 심대한 격차가 존재한다.

첫 숙청 이후 반세기 뒤, 장성택의 죽음 앞에서 참으로 착잡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장성택 자체는 별반 관심 대상이 아니다. 그는 기껏해야 유일 체제 내의 소두목 중 한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인민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조직 폭력배의 두목이 하나인 것보다는 여럿인 게 훨씬 낫다. 그래야 서로 다투는 두목들의 틈바구니에서 숨통을 터볼 여지가 생긴다. 이번 숙청은 3세 수령 체제가 이 정도의 권력 분점 가능성조차 참아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집단 지도 체제로 평화롭게 진화하는 것은 기대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그래서 안타까운 것이다.

ⓒAP=연합뉴스

이제 북한 사회에 남은 출구는 무엇인가? 지금의 북한 정권보다는 그래도 더 현대적이었던 스탈린 정권에 대해 10월 혁명 지도자였던 레온 트로츠키가 제시한 해법은 '정치 혁명'을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민의 힘으로 갈아엎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3세 수령이 다스리는 북한에는 더더욱 절실히 필요한 게 이런 혁명일 것이다. 무서운 이야기다. 그러나 진실의 소리다.

그간 좌우를 막론한 남한의 합리파들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도 북한 지배 체제가 되도록 요동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북한의 급변이 한반도 전체의 혼란으로 비화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다른 가치와 가능성에 대한 고려를 억눌렀다. 이 점에서는 주체 사상을 비판하는 독립파 사회주의자들도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이런 금기에 마냥 갇혀있을 수는 없겠다. 무너져야 할 정권은 무너져야 한다. 혁명이 아닌 정변 형태의 유사 혁명으로 어느 특정 관료 분파가 집권하더라도 최소한 지금의 '백두혈통' 지배보다는 나을 것이다. 김 씨 일가가 무너지고 나면 무조건 지금보다 더 파괴적인 상황이 열릴 것이라는 우려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다. 박근혜 정권이 퇴진해야 한다는 주장에 '그럼 대안은 있냐'고 따지고 드는 게 우문(愚問)인 것처럼, 북한 정권이 바뀌어야 한다는 외침은 대안론에 구속될 수 없다. 본래 이것이 혁명의 논리다.

물론 북한 사회의 변화는 북한 인민들 자신의 과제다. 게다가 당장은 남한 좌파가 북한 사회와 직접 소통할 방안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공동의 적이 누구이고 동지가 누군지 분명히 하는 것만으로도 출발점으로는 충분하다. 공동의 적은 남한의 자본 독재이자 북한의 수령 독재이고, 동지는 그에 맞서 싸우는 남한과 북한 인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동의 적들 중에서도 우선, 우리와 직접 마주한 자들과 제대로 대결하는 데서 시작하면 된다. '아랍의 봄'을 보라. 튀니지 민중의 승리가 이집트 민중을 흔들고 이집트 혁명의 성공이 다시 아랍 세계 전체를 격동시켰다.

남한 지배자들에 맞선 투쟁과 북한의 민주 변혁 사이에도 이런 혁명의 전염 논리가 작동할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가 거둔 크고 작은 승전보야말로 북한 인민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기상나팔 소리일 것이다. 수령 독재에 맞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격려이고 응원일 것이다. 말하자면 박근혜 정부, 삼성 독재, <조선일보>에 대한 투쟁과 그 승리가 곧 수령 독재를 흔드는 첩경이다.

정리하자. 지금 휴전선의 이편과 저편 모두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민중의 힘에 의한 대변혁이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모조리 갈아엎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 질기게 오래 살자. 생전에 삼성 이 씨 일가와 <조선일보>와 김일성 동상이 무너지는 꼴은 반드시 봐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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