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절대로 공짜가 아니다!"

[화제의 책] 조지 레이코프의 <자유 전쟁>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유능한 보수 vs 무능한 진보'를 내세우며 정권을 탈취하는 데 성공한 후,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조지 레이코프의 '프레임(frame) 이론'에 주목하고 있다. 최근 국회도서관의 발표를 보면, 17대 국회 때 정치인의 필독서였던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 이어서 최근 나온 <자유 전쟁>도 대출 순위 2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이 레이코프와 그의 이론에 관심을 가지는 반면, 그의 핵심 주장에 대한 이해는 깊지 못한 게 현실다. 그의 '프레임 이론'을 일종의 홍보 전략의 일환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 예이다. 레이코프의 책이 화제가 된 지 수년이 되었음에도 정작 민주당 등이 그의 조언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자유 전쟁>뿐만 아니라 레이코프의 책 대부분을 국내에 소개한 나익주 박사가 <프레시안>에 글을 보내왔다. 이 기고에서 나 박사는 <자유 전쟁>의 내용을 한국의 상황과 연결시키면서 레이코프로부터 우리가 정말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꼼꼼히 정리한다. <편집자>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나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1970년대와 1980년대 암울한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자유를 갈망하던 우리들의 마음을 절절히 표현했던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의 한 구절이다. 그 시절 우리는 모두 한 마음으로 이 시를 노래했다. 이 구절이 다시금 머릿속을 맴돈다. 피 흘려 싸워서 찾은 '우리의 자유'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언론 길들이기, 집회의 제한, 시위나 농성의 폭력적인 진압, 광장의 사용 제한, 인권 탄압 등 그 시절의 유령이 어느새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자유'를 얼마나 쉽게 빼앗길 수 있는지를 우리는 지난 1년 반 동안 체험하였다.

'자유'는 얻는 것도 힘들지만 지키기는 더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저서가 있다. 바로 미국 진보 진영의 뛰어난 지성으로 평가 받는 레이코프의 최근 저서 <자유 전쟁(Whose Freedom?)>(나익주 옮김, 프레시안북 펴냄)이다.

'자유'를 둘러싼 진보와 보수의 대격돌

▲ <자유 전쟁>(조지 레이코프 지음, 나익주 옮김, 프레시안북 펴냄). ⓒ프레시안
<자유 전쟁>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이념에 대한 전쟁'이라는 부제가 암시하듯이 미국의 진보와 보수가 '자유'를 두고 벌이는 개념 쟁탈전을 다룬 정치 평론이다. 캘리포니아 대학(버클리) 언어학과의 교수이자 저명한 언어학자 겸 인지과학자인 저자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창시자답게 인지언어학 분야에서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내어놓았다. 특히 은유가 본질적으로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 과정의 문제이며 인간의 인지 과정의 많은 부분이 본질상 은유적이라고 주장하는 개념적 은유 이론이 유명하다. 은유가 한 개념(예 : 사랑)을 다른 개념(예 : 불)의 측면에서 이해하는 우리의 사고 기제라고 주장하는 그의 은유 이론은 법과 음악, 신경과학, 수학, 정치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 적용되어 왔다.

레이코프는 자신의 개념적 이론을 미국의 정치와 미국인의 정치적 사고를 분석하는 데 적용하였다. 그는 국가를 가정으로 이해하는 은유('국가는 가정')가 미국인의 정치적 사고에 깔려 있으며, 미국인의 보수주의적 가치관은 '엄격한 아버지' 가정 모형에서 비롯되고 진보주의적 가치관은 '자애로운 부모' 가정 모형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엄격한 아버지 가정 모형에서는 도덕적 권위인 아버지가 정한 일련의 가치에 자녀들은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반면에 자애로운 가정 모형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등하며 두 사람이 함께 감정이입과 책임감으로 함께 자녀를 양육하면서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환경을 조성한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1996년 <도덕의 정치(Moral Politics)>에서 이론적으로 정립되었지만, 인지언어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레이코프가 많은 미국인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04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펴낸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Don't Think of an Elephant!)>가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덕택이다. 이 책에서 그는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이후 미국의 진보 진영이 잇달아 보수 진영에 패하고 있는 이유가 두 가지 가정 모형에 근거한 프레임 형성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프레임 형성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예를 들어, 보수주의자는 '세금 인하'를 '세금 구제' 프레임으로, '상속세'를 '사망세' 프레임으로 재구성하여 '세금은 모든 납세자에게 고통을 주는 해로운 무기와 같은 것'이므로 반드시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부시를 비롯한 보수 진영은 자신들은 영웅이며 세금 인하에 반대하는 진보주의자들은 악당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데 성공하면서 선거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었다. 뒤이어 2006년 펴낸 <프레임 전쟁(Thinking Points)>에서는 공평성과 정의, 평등과 같은 미국의 소중한 진보적 가치들이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본질적인 의미가 훼손당하고 있는 현실을 주지시키면서 진보주의자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가치와 원리에 충실한 프레임을 재구성함으로써 이러한 가치의 전통적인 의미를 지켜나갈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프레임의 위력은 한국에서도 확인되었다. 한나라당은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마추어적인 운동권 세력들이 지난 10년 동안 나라의 경제를 최악으로 망쳐놓았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이다. 망가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선진화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경제' 프레임을 선점하였다.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러한 '경제' 프레임과 '선진화' 프레임은 그들을 유능한 전문가 집단으로 돋보이게 하며 동시에 진보 진영을 전문 지식이 부족한 아마추어 집단으로 낙인찍었다. 심지어는 '무능한 청렴보다 유능한 비도덕이 낫다'라는 가치관 전도 현상마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수용되었다. 그리하여 한나라당은 대통령선거는 물론 이어진 총선거에서도 압승을 거두었다. 이것은 "사실과 프레임이 충돌할 때, 사실은 무시되고 프레임만 살아남는다."는 레이코프의 진단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결과였다.

'자유'가 위험에 처했다

<자유 전쟁>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자유'의 의미를 보수주의자들이 어떻게 훼손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에서 레이코프는 '자유'가 미국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며, 노예 제도 철폐와 여성 참정권, 노동자의 권리 신장, 시민적 권리의 확대, 기회의 평등, 환경운동 등을 가능케 했던 것은 바로 (자애로운 부모 가정 모형에 근거한) '자유'에 대한 진보적인 해석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레이코프는 현재 이 소중한 '자유'가 위험에 처해 있다고 진단한다. 미국을 위대한 정의의 나라로 만들어준 '진보적인 자유'를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이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출판되었던 2006년 부시 대통령 재임 당시에서 쓴 이야기이지만, 이 명제는 오마바 대통령이 취임한 현 시점에서도 유효하다.) 그는 미국의 보수 우익이 이 '자유'의 의미를 자신의 구미에 맞도록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이 개념을 훔쳐가고 있다고 경고한다.

"이 위험은 단지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즉 의미에 대한 재담이 아니다. 이것은 개념 전쟁이다." 만일 '자유' 개념이 근본적으로 변화한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 때까지 알고 있던 '자유'를 빼앗기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개념을 바탕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개념은 추상적인 대상이 아니다. 개념은 행동의 요소이다. 개념은 이상을 정의하고, 행동의 규범을 만들어내며, 옳고 그름의 특성을 규정한다." 이에 따라 개념은 과거와 현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 미래에 대한 우리의 전망, 그리고 심지어는 나라의 법률도 바꾸어 버린다. '자유'라는 낱말을 소유한다는 것은 이 낱말에 동반되는 개념을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이 개념이 정의하는 문화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래서 "자유를 잃는 것도 두려운 일지만, '자유' 개념을 잃는 것은 훨씬 더 두려운 일이다."

레이코프는 '자유'에 대한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의 정의가 구체적으로 경제와 종교, 외교 정책, 개인적 자유와 관련하여 얼마나 다른 의미를 함축하는지에 대해 논의한다. 특히 부시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 연설문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보수주의자들이 어떻게 '자유'나 '해방'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여 보수주의자는 물론 진보주의자의 지지도 이끌어낼 수 있는가에 주목한다. 한 마디로 부시의 연설은 자유에 대한 보수적인 정의를 청중들에게 정말로 교묘하게 주입하고 있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역사에는 또한 자유와 자유의 창조자가 정한 분명한 방향이 있다"라는 문장에서 보듯이, 부시는 자유를 하나님 없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그리고 민주주의를 종교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공정성이나 평등, 책임, 해악 등 거의 모든 사회적 정치적 개념과 마찬가지로 자유도 프레임과 은유로 구성되며, '본질적으로 논쟁적인 개념'(essentially contested concepts)이다. '논쟁적인 개념'은 단 하나의 해석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개념을 가리킨다. '공정성'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의미로 이해할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 실제로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는 '공정성'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진보주의자는 사회적 약자 우대조치를 광범위한 불공정을 바로잡기 위한 바른 정책으로 이해하지만, 보수주의자는 단순히 불공정하고 비도덕적인 정책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자유'도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에게 완전히 동일한 의미로 이해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다. '자유'는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완전히 합의된 핵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 외의 중요한 부분은 여백으로 남아 있다. 이 여백이 진보적인 방식으로 채워지는가 아니면 보수적인 방식으로 채워지는가에 따라 동일한 낱말인 '자유'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해석이 나오게 된다.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둘 다 '~으로부터의 자유'와 '~을 향한 자유'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가치 체계에 따라 '자유'를 정의한다. 예를 들어, 진보주의자들은 궁핍과 공포로부터의 자유와, 국민을 감시하고 가족의 의학적 결정에 개입하는 정부로부터의 자유에 초점을 맞추며, 인생에서 교육과 의료 서비스 기회를 제공받아 자신의 목표를 성취할 자유에도 초점을 맞춘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정부의 시장 개입(예 : 규제)으로부터의 자유는 물론 자신들의 마음대로 재산을 사용할 자유를 강조한다. 따라서 당연히 진보주의자들은 사회보장제도나 복지제도, 공공의료보험이 자유를 신장한다고 보는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그러한 제도에 사용되는 세금이 납세자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간주한다.

레이코프가 <자유 전쟁>에서 보여준 가장 뛰어난 통찰력은 이라크 전쟁, 낙태, 과세, 사회보호 프로그램 등 다양한 쟁점이 어떻게 '자유' 개념에 연결되는지를 '국가는 가정'이라는 은유로 설명한 것이다. 그는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이 이러한 쟁점에 대해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이유가 이상적인 가정 모형에 대한 상반된 이해 방식에 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의 정치적 사고는 엄격한 아버지의 절대적 권위와 자녀의 무조건적 순종을 강조하는 엄격한 아버지 가정 모형에 근거한 반면, 진보주의자들의 정치관은 자애로운 부모의 감정이입과 개인적·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자애로운 부모 가정 모형에서 비롯된다. 엄격한 아버지 가정 모형에서는 아버지가 엄격하고 절대적인 권위이며 자녀는 미숙하기 때문에 자녀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절제력을 길러야 한다. 반면 자애로운 부모 가정 모형에서는 부모가 자애로운 감정이입을 통해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책임감이 있는 것이고 도덕적인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자녀들도 자신을 보살피는 책임감과 타인을 보살피는 자애로운 감정이입을 배우게 된다.

이 두 종류의 가치 체계가 자유와 연결될 때,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는 '자유'에 대해 아주 다른 해석을 내리게 된다. 진보주의자들에게 자유는 권리와 기회의 확대를 의미하며, 개인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와 상호 의존적이다. 이 자유는 '~을 향한 자유'(즉, 긍정적인 일을 수행할 자유)는 물론 '~으로부터의 자유'(즉, 궁핍이나 공포 등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날 자유)를 포함한다. 반면에 보수주자에게 자유는 도덕적 권위인 아버지가 나누어주는 것이며, 이 자유는 도덕성과 명령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권위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비도덕적이다. 비도덕성과 혼란은 사회(즉, 가정)를 심하게 위협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의 관점에서는 낙태나 동성결혼은 '엄격한 아버지' 가정(사회)이라는 개념 그 자체에 대한 위협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자유'에 대한 위협이 된다.

엄격한 아버지 가정 모형에는 단 하나의 강력한 지도자만이 있으며, 모든 구성원은 자신이 누구인가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따라서 도덕성은 도덕적 권위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며, 순종은 하나님이나 자유시장의 보상을 받게 되지만 불순종은 지옥의 형벌과 가난의 굴레라는 벌을 받게 된다. 사람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기제는 어떤 제약도 없는 시장만능 자본주의이다. 이 기제에서는 자기 절제력이 있는 사람만이 자연스러운 경쟁에서 승자가 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야말로 '자유'의 적

사람들은 흔히 자유를 부(富)와 별로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참이 아니다. 부유한 사람은 궁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궁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부는 자유와 불가분의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레이코프는 부를 빼앗기는 것을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는 경제적 자유에 관한 논의에서 보수주의적 경제 원리는 서민 납세자의 돈이 부자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끊임없이 승인한다고 단언하면서, 수많은 서민 납세자의 돈이 엄청나게 부유한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에게 넘어갈 때, 자유도 또한 다수의 서민들에게서 소수의 부자들에게로 넘어가고 있음을 심히 우려한다.

레이코프의 우려는 미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우려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현실이 되었다.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을 썼던 2006년 당시의 저자의 우려와 달리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 이후 '부자증세 빈자감세' 정책을 지향함으로써 미국에서는 이러한 자유의 전이가 많이 개선될 전망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반대로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보수적인 현 정부는 종합부동산세가 부유한 소수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논리로, 또한 부자들의 세금을 감면해 주어야 투자도 하고 소비도 해서 어려운 내수 경제가 살아난다는 논리로 종합부동산세를 사실상 폐지하고 종부세로 걷어 들인 세금을 2% 정도의 국민들에게 다시 돌려주었으며, 또한 소득세와 법인세를 인하했다. 이로 인한 세수 부족을 메우기 위해 모든 국민들이 함께 감당해야 할 다른 세금을 신설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자유 전쟁>에서 저자가 말하는, 대다수 서민의 부를 부유한 소수에게 넘겨주는 자유의 전이에 해당한다. 또한 국민 2%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세금을 깎아주어야 국내 내수 시장이 살아난다는 논리도 허구이다. 재래시장과 영세 자영업자의 매출을 늘려주는 사람들은 주로 부유한 소수가 아니라 중산층과 서민이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유 시장에서는 충분한 절제력을 지닌 사람은 모두 자수성가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자수성가하지 못한 사람은 충분한 절제력을 기르지 못한 사람이므로 자신이 벌지 않은 것은 받을 자격이 없다. 레이코프에 따르면, 이것은 신화일 뿐이지 결코 사실이 아니다. 자수성가하지 못한 4500만 미국인들이 동시에 자수성가해 성공적인 기업가가 될 수 없으며, 자수성가할 수 있는 일자리도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 낮은 임금으로 대다수 미국인의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백 가지 일(예를 들어, 과일 따기와 야채 따기, 도살장 일, 햄버거 뒤집기, 식당의 잡일, 파출부일, 유모, 날품 노동, 잡초 뽑기, 세차 등)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그들은 결코 절제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더욱이 절제력을 기른다고 해서 그들에게 번영의 기회가 오는 것도 결코 아니다. 단지 그들은 상위 4분의 3의 생활을 지탱해주는 저임금 노동의 덫에 걸려 있고 앞으로도 계속 저임금의 덫에 걸려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따라서 그들은 현재 경제적 자유를 거의 누리지 못하고 있다. 시장은 노동 자원을 저임금으로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실업률을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특정한 계층만을 위한 도구가 되는 이러한 시장은 결코 공정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생계를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생계비를 벌어서 노동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시장은 규제를 받아야 한다.

모두의 자유인가? 소수의 자유인가?

우리나라에서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저임금의 덫에 빠져 들고 있다. 문민정부 시대와 외환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이론에 근거한 노동의 유연성과 경영의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구조 조정의 공포와 비정규직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교적 서민과 중산층에게 감정이입을 하고자 지난 10년의 두 정부마저도 신자유주의를 경제 운용의 기조로 삼으면서 경제적 양극화는 심화되었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저임금의 덫에 빠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유통과 시장의 현대화를 명분으로 대도시는 물론 중소도시에도 세워진 대형 할인점으로 인해 전통 시장과 골목의 영세 상점이 거의 고사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라. 예전의 시장 상인과 영세 상점의 자영업자들은 저임금 비정규직 근로자로 고용되어 있다. 레이코프는 이러한 상황을 '지역에 대한 비윤리적 습격'이며 따라서 '지역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라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이 앞으로라도 나아질 희망이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 경제 살리기를 최대 명분으로 집권한 현재의 정부가 서민에게 진정으로 감정이입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보수 언론에서는 지난 두 정부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었던 '잃어버린 10년'에서 해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는 물론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마저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생계의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은 늘어가고, 정부의 정책에 비판적인 의견을 내는 것이 두려워 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정부는 투자 증대와 경기 부양을 통해 대기업과 부유층의 부가 늘어나면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도 자연스럽게 혜택이 돌아가고 결국 국가 전체의 경제가 발전하고 국민 복지가 향상된다는 적하이론에 따른 정책을 펼치고 있다. 또한 의료 산업화를 명분으로 민간 의료보험의 활성화와 영리 의료법인의 허용을 서두르고 있으며, 물과 전기, 통신 등의 공공 분야마저 민영화를 서두르고 있다. 만일 이러한 정책이 시행된다면, 미국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빈부의 격차가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서민들은 의료비와 생계비 부담이 늘어나 질병과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더욱 억압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이 레이코프의 이른바 '자유'에 대한 보수적인 해석을 주창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으로 인해 생계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고통과 목숨을 걸고 생존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외침에 감정이입을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들에게 용산 참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타인의 재산권 행사를 방해하는 부도덕한 사람이기 때문에 전혀 감정이입할 필요도 없다. 6명의 무고한 죽음을 초래한 무리한 진압도 정당한 법 집행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불행한 일일 뿐이다.

'엄격한 아버지 도덕성'의 모형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절제력이 부족해서 자수성가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규정할 뿐 결코 감정이입을 할 필요가 없다. 한 마디로 '누가 가난하라고 그랬냐? 절제력이 부족해서 가난한 것이지.'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정치적 세계관을 스스로 바꾸지 않을 것이다. 레이코프가 주장하듯이, 서로의 삶에 관심과 애정을 갖지 않는다면, 즉 '자애로운 어머니 도덕성'의 사고를 통해 서로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않는다면, 남은 우리들은 결코 '우리의 자유'를 지키지도 되찾지도 못할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진보 진영은 국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와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담을 수 있으며, 또한 진실을 전달하면서도 자신들의 가치와 정체성에 충실한 프레임을 만들어내야 한다. 한나라당이 '선진화' 프레임의 선점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현대화' 프레임을 들고 나온 뉴민주당 플랜은 전통적인 지지자들에게조차도 배신감만을 안겨 줄 것이다. 그리고 보수 언론을 앞세워서 보수 진영이 우리에게 덧씌우고 있는 프레임이 숨은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함으로써 보수적인 프레임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계속 노력해야 한다.

서민 복지 예산을 축소하면서도 서민의 삶이 최우선 관심사라고 외치는 '민생' 프레임이 과연 서민의 삶에 유익할 것인지, '학교 다양화 계획'과 '학교 자율화 조치'가 학생들에게 창의성과 유연한 사고와 서로를 대한 배려를 길러줄지 아니면 획일적인 사고를 강요하고 무한 입시 경쟁과 학교 서열화로 이어져 결국 특정 계층의 학생들에게만 유리한 정책이 될지, 날치기로 통과시킨 미디어 법안이 정부의 주장대로 미디어의 '선진화'를 가져다줄 것인지 아니면 보수적인 언론이 여론을 독점하여 특정한 세계관에 충실한 정보만을 제공할 것인지 등을 생각하면서, 프레임이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를 가려낼 수 있도록 성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소중한 자유의 개념을 지키기 위해 과연 얼마나 진지하게 노력했는지 더 늦기 전에 반성해 보아야 한다.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레이코프의 경고를 되새겨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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