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양호신드롬', 관료들은 책임지기 싫다?

"정책 면책 조항 신설하자" vs "책임 안 지겠다는 정부 어떻게 믿나"

'변양호 신드롬'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이 1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자 가장 많이 회자되는 말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기획재정부 관료들 사이에서 나왔고,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보수언론과 경제지들이 앞다퉈 보도하고 있다.

경제위기 상황을 맞아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일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변양호 신드롬'이라고 이들은 주장하고 있다. '소신 있게 일해 봤자 나만 손해'라는 표본이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이었다는 것. 변양호 씨는 한때 '장관감'이라는 평가를 받는 잘 나가던 엘리트 관료였다. 그가 외환은행 사태로 낙마하는 것을 본 경제관료들은 '복지부동'할 수밖에 없다는 항변이다.일각에서는 "정책 결정에 대한 면책 특권 조항을 신설하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하지만 '면책특권 조항'이 없으면 한국사회가 관료들이 소신 있게 일하지 못할 만큼 엄격한 책임 추궁을 하고 있을까?

사후 책임 추궁해선 안 돼…면책특권 부여해야

서울중앙지법에서 변양호 씨에 대한 무죄 판결을 내리자 주요 언론들은 일제히 환영하며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을 제기한 감사원, 검찰, 시민단체 등을 맹비난했다. 외국자본에 대한 국민적 반감에 편승해 2년이 넘게 쓸모없는 공방을 벌였다는 것.

하지만 이번 판결은 1심에 불과하다. 헐값 매각 의혹의 핵심 중 하나인 'BIS 자기자본 비율 조작' 등 판결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 법원은 BIS 조작은 인정하면서도 "협상 결렬 가능성을 줄이고 대주주 또는 감독 당국을 설득하기 위한 것일 뿐 배임의 의사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결했다. 또 사모펀드인 론스타가 은행법의 예외 조항을 인정받아 외환은행의 대주주가 된 과정과 연관된 행정재판도 진행 중이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와 관련된 재판은 아직도 5개나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언론과 경제지는 '재판은 끝났다'는 식이다.

이들은 이어 외환은행 재판의 부작용 중 하나로 '변양호 신드롬'을 지적했다. <중앙일보>는 25일 '국민정서법이 부른 무리한 재판…국가신인도만 상처 나' 기사에서 "공무원들 사이엔 '책임질 일은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좋다'는 의식이 퍼졌다. '소신보다는 보신'이라는 자조적인 말도 나왔다. 소위 '변양호 신드롬'이다"고 보도했다.

<매일경제신문>은 이날 사설을 통해 "우리 사회가 또 다시 변양호 전 국장과 같은 희생양을 만든다면 누가 책임감을 갖고 일하겠는가. 이미 과천 경제부처에서는 '변양호 신드롬'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공직사회에 보신주의가 만연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머니투데이>도 "변 전 국장의 기소는 한국 관료사회에 심각한 무기력증을 초래했다"면서 "이른바 변양호 신드롬이 만연하자 공무원들의 책임회피와 몸사리기 등의 부작용이 곳곳에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급기야 보수 성향의 학자들은 '정책 면책 특권 부여'까지 주장하고 나섰다. 26일 <매일경제신문>에 실린 "관가에 떠도는 '변양호 신드롬'을 없애라'라는 기사에 따르면, 남주하 서강대 교수는 "판단을 내릴 때 당시 시점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느냐가 중요하지 결과를 놓고 사후적으로 책임을 추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최창규 명지대 교수도 "면책 특권을 도입하지 않으면 위기가 완전히 곪아 터질 때까지 아무도 손을 못 대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며 "여야 정치권이 면책 특권 도입을 포함한 구제금융입법을 논의할 때"라고 주장했다.


변양호, 위법 여부 논란이 된 것…결과에 대한 책임추궁 아니다

하지만 변양호 씨 사례를 '복지부동'의 근거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제까지 우리사회에서 관료들의 정책적 판단에 대해 사후적 책임을 물은 사례는 거의 없다. 1997년 외환위기를 야기한 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 등에 대해서도 사법부는 '관료의 정책적 판단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판결했다. 이번 외환은행 헐값 매각 재판에서 변양호 씨가 무죄 판결을 받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변양호 씨의 정책적 판단이 문제가 된 것은 현행법의 테두리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BIS 비율 조작, 론스타의 산업자본 여부에 대한 판단 등에 대한 의혹은 모두 현행법을 위반한 게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가능한 대목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관료들이 정책적 판단을 할 때 법적 테두리 내에서 했다면 사후에 법적으로 책임을 묻는 것은 현재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관료들의 정책적 자율성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라면서 "그러나 관료들이 법에 정해진 투명성과 책임성 안에서 권한을 행사하다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다. 사후적 책임추궁을 두려워해서 복지부동의 자세를 취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정책에 대해 사후적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면서 "정책에 대한 사후적 평가가 없다면 어떻게 민주 행정이라고 할 수 있겠냐"며 '정책 면책 조항 신설'에 대해 비판했다.

개인들도 투자 결정에 대해 다 책임지고 있는데…

권영준 경희대 교수도 "굳이 법적으로 면책 조항을 두지 않더라도 이미 법원이 다 무죄로 판결하고 있지 않냐"며 "이런 상황에서 면책 조항을 신설하라는 것은 정책을 아무렇게나 만들어도 된다는 보장을 하라는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권 교수는 "개인 투자자나 서민들도 경제위기를 맞아 자기 결정에 대해 다 책임을 지고 있는데 소위 국민의 녹을 먹는 정책 당국자들의 결정에 대해 책임을 묻지 말아달라는 게 무슨 소리냐"면서 "이런 정부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냐"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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